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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21. 2021

10장, <함박눈>

모두가 잠든 이 깊은 밤, 나는 준이와 가족들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준이에게,

널 만나기 전까지, 슬픔이란 거대한 밀물처럼 한꺼번에 밀어닥쳐서 나를 파멸시키고 마는 거라고 상상했어. 오히려 슬픔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부터 갑자기 뛰쳐나와 나를 찌르곤 해. 우리는 어쩌자고 그렇게 많은 얘기들을 함께 나누었을까. 그 순간은 행복했고 모든 추억은 지나고 나면 아름다워지는 거라고는 제발, 말하지 마. 내 안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외로움의 깊이 같은 건, 정말로 몰랐으면 좋았을걸. 그러기엔 나의 내면의 병이 너무 곪아버려 너에게 더 다가갈 수 없었어. 우린 서로에게 그 사실을 일깨워주기 위해 만났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이 슬픔을 이겨낼 길이 없을 것만 같아. 너에게 마지막으로 쓰는 편지라고 생각하니 펜을 놓기가 참 힘드네. 너와 함께 했었던 모든 시간, 정말 행복했어. 고마워. 


이 세상에 제대로 된 이별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이별은 엉망진창이다. 준이를 위해 선택한 일방적인 결정과 통보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상황이 심각해질수록 분명 준이가 힘들 것을 알기 때문에 한 결정이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보고 싶었지만, 그건 준이를 기만하는 행위다. 상처 받지 않으려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상대방의 뻔한 이기심에도 쉽게 낙담하는, 어른들의 점잖음 이란 그토록 외로운 것이었나. 어른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남긴 편지에는,


가족들에게,

당신들에게 모든 걸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오늘까지 살았다는 건 내가 당신들을 사랑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신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주고 싶었던 것이 너무 많았지만, 아무것도 주지 못한 죄책감과 보답하지 못한 결과물에 텅 빈 마음으로 하루를 채워 나갔습니다. 하지만 세상엔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것이 존재했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많은 시간이 지났습니다. 내가 나를 버려 서든, 내가 남을 훔쳐 서든. 당신이 갖고 싶어 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당신에게 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에서야 깨닫습니다. 정작 내가 챙기고 돌봐야 할 것은 당신이 아니라 ‘나’ 였다는 것을요. 사랑하는 법고, 사랑밥는 법을 알려줬었던 할머니와 함께 지냈던 그 섬에서의 시간이 제 삶에 있어선 가장 행복으로 가득했었던 섬이었습니다. 자식으로서, 동생으로서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먼저 떠나 죄송합니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났다. 끝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벽은 허물지 못했다. 그저 나는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없는 그릇이었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뿐, 그 누구의 탓도 아니며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마지막에도 진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이유가 되니까. 다만, 확실한 건 엄마, 아빠, 언니는 내가 가장 사랑하고 믿었던 후회였다. 그리고 그렇게 나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인 겨울에  함박눈이 되어 세상에 흩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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