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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Oct 21. 2021

9장,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겨울이 왔다. 겨울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상에 쌓이는 건 눈만이 아니다. 그냥 넘겨버리기에는 괴로운 일들이 가득하고 우린 그걸 별일 아닌 듯이 넘겨버린다. 그런 일상이 쌓이고 그런 일상이 쌓여 삶을 만든다.  


겨울이 다가오자 나는 더 깊이 체감할 수 있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시간이 버텨주던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 시간을 버틸 힘이 없다. 빨리 지나가길 바라던 순간들이 지나고, 덧없이 보낸 나들이 지나, 허무하게 가버린 하루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울다 지쳐 잠이 들면 영원히 먼 곳으로 떠날 수 있기를 매일 밤 기도했다.  


그러나 아침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오늘은 왠지 할머니를 보러 가야만 할 것 같아 할머니가 좋아했던 할미꽃 한 다발과, 팥이 듬뿍 들어간 시루떡과 소화가 잘 된다며 즐겨 드셨던 매실주를 사들고 천안행 기차를 탑승했다. 오랜만에 할머니를 볼 생각에 설레기도 하면서 눈에 덮여 추울 할머니를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급해지기도 했다. 두 시간에 걸쳐 도착 한 할머니의 묘지는 현대식을 가꾸어져서 그런지 생각보다 깨끗했다. 주기적으로 묘지를 관리해주시는 분도 있어서 잡초나 눈들이 덮여 쌓여있지 않고 처음 관에 들어갔을 때의 모습 그대로인 것만 같았다. 한참을 바라보다 꺼낸 나의 첫마디.  


“할미…. 보고 싶어…” 할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처음 꺼내본 한마디이다. 

“할머니…”

“세상에 할머니처럼 좀 더 괜찮고, 멋진 어른들이 많았으면 어땠을까…”


상처 받지 않으려 먼저 말을 꺼내지 않고, 상대방의 뻔한 이기심에도 쉽게 낙담하는 어른들의 점잖음이란 그토록 외로운 것이었나. 어른 그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나에게 유일한 어른은 할머니뿐이었다.  


‘그대 보내고 멀리

가을 새와 작별하듯

그대 떠나보내고…’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할머니와 마당에 앉아 유선 이어폰을 한 줄씩 나눠가지고 바람에 찰랑거리는 갈대밭과, 둥지를 짓느라 바쁜 새들이 움직임, 해안도로 끝에서 세밀하게 보이는 파도를 바라보며 들었던 김광석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이라는 노래가 오늘따라 유난히 더 슬프게 들렸다. 마음속 점점 더 크게 느껴지는 공허함, 점점 더 무감각해져 가는 감정들, 과거에 대한 그리움, 그 마저도 잊혀 가는 쓸쓸함, 이제야 나는 할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이렇게 다시 하루가 지나고 어둠이 찾아오고 별이 빛나고 빛은 사라져 가는 존재들이 말하는 희망 같은 것. 말없이 밤하늘을 바라보며 어딘가에 있을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드리며, 강 건너 우주 저편이 축복이 드리우기를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하길. 좋은 기분으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기를 바라며 모두가 잠든 이 깊은 밤 내가 아직 깨어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세상은 잠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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