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에 관한 고찰-3

여름의 역설-정신적인 가벼움과 텅 빈 주머니

by 그리운 나무 그늘

필리핀 세부에서 3년을 살다가 작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3년 만에 맞은 가을, 단풍이 수놓은 가을산을 바라보며 얼마나 감탄을 했는지, 형형색색의 국화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높은 가을 하늘과 얼마나 잘 어울리던지, 바람에 구르는 낙엽조차 즐거워 보였던 그때가 떠오른다.


계절은 기억 보조 장치이다.


기억을 떠올릴 때 그날의 날씨와 옷차림을 먼저 생각해 내곤 한다.

그 해 겨울은 무척 따뜻했어.

우리가 만났던 날 비가 억수로 쏟아졌었지.

민소매에 샌들을 신고 너를 만났어.

몇 해 전 가을이었을 거야...


3년 동안 더운 나라에 살면서 나의 기억은 뒤죽박죽이 되었다. 항상 더웠고, 옷차림은 비슷했고 1월이었는지 8월이었는지.. 알 수 없는 그때...

그래서일까?

계절의 색깔이 없어서 그런지 필리핀 사람들은 중국의 설날, 이슬람의 라마단, 서양의 크리스마스, 핼러윈 등을 아주 거창하게 보낸다. 공휴일과 기념일이 기억의 단위인 듯 말이다.


계절은 성찰의 알람이다.


봄의 여리면서 싱그러운 새싹을 보면 내가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다. 힘들었던 마음도 겨울을 버티고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위로받고 다시 기지개를 켜게 한다.

그래! 다시 시작해보자!

여름은 또 어떤가.

열심히 일한 당신에게 이제 좀 쉬라고 햇살을 퍼부어 그늘과 쉼을 주지 않던가.


내가 사랑하는 가을은 화수분이다.

어느 날 문득, 아무 기척도 없이 선선한 바람으로 아침을 열어주고, 높아진 하늘만큼이나 마음도 깊어지게 만든다. 가을이라는 배경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 생각을 하게 만들어 준다.

봄처럼 설레게 하진 않지만,

여름처럼 정열적이지만 지치게 하지도 않고, 한없이 차분하고 깊은 내면의 세계에 빠져들게 한다.


그리고 겨울.

자꾸 뒤돌아보게 하는 계절.

그리움을 쌓게 하는 계절.

그리고 새로운 시작을 독촉하는 계절.


이런 계절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는 필리핀 사람들이 내게는 한없이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항상 즐거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저 사람들에게 삶에 대한 고민이 있는 걸까. 저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이 있는 걸까.

항상 느긋하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아가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계절을 살아가는 방법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한없이 가난하고, 또 그 가난한 현실을 즐거운 마음으로 극복하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필리핀에 겨울이 없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계절의 없음이 저들을 가벼운 가난에 묻혀 살게 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오늘도 가을과 바람과 음악이 어우러지는 아름다운 날이다. 어느 가을날, 계절로 삶을 한 번 되돌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