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이번 청춘은 망했다'- 망하지 않은 청춘은 언제인가
이 책은 1979년 10월 26일로부터 시작합니다. 그날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이 기록된 날이네요.
강원도 정선에 살고 있는 주인공 민철은 술도 마시고 친구들과 몰려다니는 그런 친구였습니다.
고등학생인 민철은 국어 선생님과 그녀의 애인으로 보이는 막스, 북에 살고 있는 송희, 친구의 형 광준 등을 만나면서 조금씩 달라집니다. 정확하게는 그들이 함께 겪었던 사건들을 통해서입니다. 사북 광주들의 노동쟁의, 운동권이었던 국어 선생님의 체포와 자살, 광준이 광주 공수부대로 다녀온 일 등을 통해 사람들의 운명은 조금씩 비틀어집니다. 이 책은 역사로 조금씩 비틀린 삶을 살게 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네요.
그 사람들은 어쩌면 지금도 지금의 역사를 살고 있겠지요.
서슬퍼런 경찰, 일상적인 고문, 언론의 통제, 광주 진실의 은폐 등으로 점철된 이야기들입니다. 얼마나 갑갑하고 무서웠을까요. 1980년대 청춘은 그러했을 것입니다.
1990년대 청춘의 이야기를 조금 해보려 합니다.
1990년대 대학에도 시위와 화염병, 최루탄, 사과탄, 지랄탄이 있었습니다.
1990년대 후반까지도요. 직접 화염병을 만들어본 기억도 있는걸요. 최루탄에 유독 강하다고 자랑하곤 했습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사과탄을 터트리거나 사람을 정조준해 최루탄을 쏘기도 했습니다. 친한 선배는 얼굴에 최루탄이 맞아 몇일 입원한 적도 있었어요. 1990년대에도 여전히 시위를 하던 대학생들은 죽어나갔습니다.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부르며 시위를 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들도 무탈했더라면 지금 배가 나온 중년 아저씨가 되어있었을테죠.
1990년대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세상은 평화로워보였지만 정의에 날선 대학생들 교정 안팎은 그렇지 않았어요. 행사를 하던 학교 대강당 안으로 경찰이 급습해서, 2층에서 뛰어내린 언니도 있었어요. 그 언니는 꽤 오랫동안 허리 고질병으로 괴로워했어요.
조마조마하게 경찰 바로 코앞에서 시위를 하면서 마음졸이던 일이 생생해요. 사복경찰과 백골단도 흔한 풍경이었습니다.
학내에선 이렇게 치열했던 반면 세상은 조용했습니다. 문민정부가 되었으니 무관심해진걸까요.
1998년이 되니 IMF가 덮쳤습니다. 아직 나는 세상으로 나갈 준비조차 되지 않았는데, 세상은 무너지고 있는듯 보였습니다. 막막했습니다. 사람들은 금붙이를 들고 금모으기를 했죠. 그런다고 나라가 당장 구해지지도 않는데 말이죠.
우리의 전선은 이제 사라졌습니다. 경찰과 대치하던 전선은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경제적인 문제들이 각자의 삶 속에 가장 치열한 전선이 되었습니다.
대학 동기 중 하나는 최근에야 그 시절 경제적인 문제로 얼마나 힘들었는지 얘기한 걸 들은 적이 있어요. 그때 아버지가 힘들어하시며 담배를 태우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저마다의 전쟁을 치르고 있었어요.
광장에서 함께 대오를 이루던 사람들은 하나 둘 대오를 빠져나갔습니다. 각자의 전선에서 각자의 대오를 만들어 싸우기에 바빴겠죠. 그렇게 우리는 전선 없는 싸움에서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지쳐가며 지금도 싸우고 있습니다.
언론은 더이상 해직언론인이 나오지 않는, 광고를 수주하고 기사를 팔아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싸움에 함께 하지 못해 부끄러워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누군가를 혐오하며 즐거워하는 시대입니다. 불꽃처럼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제 많지 않아보입니다. 자신을 태워 무언가를 이루려는 마음들을 꺼트리고 삽니다. 오히려 손가락질 받기 쉬우니까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추구하기에도 녹녹치 않은 삶입니다. 간신히 붙잡은 일상에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한 노력만으로도 쉽게 지치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청춘을 무사히 살아냈습니다. 각자의 방식으로 청춘을 통과했습니다.
오늘은 2022년 5월18일입니다.
1980년 이날, 청춘이기에 불꽃처럼 시대를 향해 달려가 자신을 활활 태웠던 청춘들이 있었습니다.
영원히 청춘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들이 많습니다.
때로는 싸우기 싫어 숨었지만, 서슬퍼런 그들이 끝끝내 도륙했던 청춘들이 있습니다. 칼로, 총으로 난자하고 생명을 희롱했던 역사가 불과 42년 전의 일입니다.
그들의 불꽃같은 삶 앞에서 숙연해지는 날입니다.
채 청춘이 되어보지 못한 그들을 기억해봅니다.
그런 기억을 잃지 않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80년대 청춘에게 1990년대 청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