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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May 15. 2024

중국, 애증(愛憎)의 시작

호구여도 괜찮아 #3

애증 (愛憎), 중국에 대한 애정과 증오


중국인 친구들에게 "중국은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애증(愛憎)이 한자어로 구성되어 그 뜻을 예상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익숙지 않은 표현에 눈에 물음표를 띄운다. 2002년 월드컵이 열리던 해에 중국과 인연을 맺어 벌써 20여 년이 지났다. 자식을 키우면 어릴 때 평생 효도를 다 한다고들 하지만, 내 마음속의 중국은 유학 시절 애정을 다한 후 지금은 안하무인의 갑질 고객이 되어 증오만이 남아 있는 듯하다. 중국이 미워서 여러 번 헤어질 결심을 해보았지만, 가장이 먹고사는 문제 앞에서 가진 무기 중 하나를 쉽게 내려놓기는 어려웠다.


우리나라 사람 열 명 중 일곱 명 이상이 중국을 비호감 국가로 꼽는다. 20년 전에는 중국 여행이 유행이었으며, 중국에서 병마용 피규어 기념품이라도 사 오거나 중국의 문화유적이나 계림 등을 보고 온 것이 마치 대단한 경험이라도 한 듯 여러 사람 앞에서 자랑하기도 했다. 90년대 홍콩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남자들의 마음에는 주윤발과 이연걸이, 여자들의 마음에는 여명과 장국영이, 어린이들에게는 성룡과 홍금보가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권위주의+시장경제'로 점점 괴물로 변해가는 중국은, 냉정함을 유지하여 중국의 시장 기회를 이성적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나의 주장의 설득력을 점점 잃게 하고, 한국의 중국(홍콩) 문화 황금기는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천상천하 유일 중화사상에 가슴 벅차하며, 이기주의로 주변 국가에게 힘을 과시하는 중국을 볼 때면, 오히려 조금은 촌스러워도 모든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전 세계 외국인들을 불러모았던, 20년 전의 중국이 오히려 그들이 좋아하는 '대국'이라는 단어에 조금이라도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스무 살, 중국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 중국의 주석이 장쩌민이던 시절, 애증의 '애(愛)'를 담당하는 20년 전의 중국 이야기를 해보고 싶다.




2002년 2월 17일, 스무 살, 나는 인천공항에서 중국으로 출국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인산인해의 사람들 사이를 지나, 출국할 사람들 사이에 섰다. 기대감으로 들떠 주절주절 말이 많았던 나와는 달리, 부모님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지켜보듯 말씀이 없으셨다. 출국 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은 짧은 헤어짐의 인사를 시작했다. 부모님을 끌어안고 울음소리를 내는 아이들부터, 중국에 도착하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체크하는 부모들까지, 출국장 앞의 이별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지만, 헤어지는 마음은 같은지 알 수 없는 온기가 출국장 앞을 뜨겁게 했다.


어머니는 출국장에 줄을 서있는 짧은 시간에도 나의 손을 잡고 때때로 눈을 마주치셨고, 아버지는 그저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셨다. 여권을 검사하고 출국장 문 안쪽으로 들어서니, 갑자기 흥분된 마음이 가라앉고 부모님과 헤어진다는 사실이 실감이 되었다. 그제야 뒤늦게 뒤를 돌아보니 닫히는 출국장의 자동문 사이로, 나를 슬프게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나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부모님의 발걸음이 무거워질까 걱정되어 급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스무 해를 키워주신 부모님을 뒤로한 채, 내 미래를 향해 성큼 걸어갔다.


부모님과 헤어진 지 불과 30분도 안 되어,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삶이 시작되고 있었다.

출국장 안으로 들어가 보니 모든 것이 낯설었다. 아침에 어머니께서 인민폐 2000위안(당시 한화 30만 원)을 비상금으로 챙겨 주셔서 나는 수하물과 중국돈을, X-ray 검색대 회색 플라스틱 바구니 안에 시키는 대로 올려놓았다. 저 검사를 받은 중국 아저씨 앞에서 물건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었다. 아저씨는 자기 물건을 챙기다 말고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다음 바구니의 내 중국돈을 은근슬쩍 어 들었다. 나는 급하게 소리치며 제지하는 공항 직원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그건 제 돈이에요!" 아저씨는 다급한 나의 외침을 듣더니, 주머니까지 갔던 돈을 다시 구니에 돌려놓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황급히 그 자리를 탈출했다당시의 중국 평균 월급은 1000위안 정도였으니, 아저씨는 인천공항 경찰이 지키는 와중에도 과감하게 손을 뻗었던 것이다. 쌈짓돈은 다행히 내 주머니로 안전하게 돌아왔지만, 눈 감고 코 베인다더니, 코가 거의 떨어졌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기분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했다.

베이징을 잠시 소개하면, 베이징은 중국의 역사적인 고도 중 하나로, 국의 정치 및 경제를 이끄는 현재의 수도이기도 하다. 인구 2천만 이상이 사는, 베이징은 단일 도시로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리나라 서울의 면적과 비교하면 27배, 경기도와 비교하여도 면적과 인구 모두 1.6배 이상이다.

나는 항상 사람들에게, 20년 전의 베이징에는 마(馬) 차와 스포츠카가 함께 달다고 하지만, 베이징을 처음 가본 사들은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다. 기사를 찾아보니 베이징 올림픽 전도로교통 관리를 위해 마차의 베이징 진입을 불허했다고 한다. 베이징에서 저녁에 산책을 하던 중, 말 똥을 밟아 아끼던 흰색 신발을 버린 이야기 도무지 믿지 않는 이들에게 기사와 사진을 전달해 줘야겠다. 이제는 믿어주겠지...


2000년 초반, 베이징에서는 말 혹은 당나귀가 과일을 실은 수레를 끌었다.


마천루가 즐비한 지금의 베이징과 달리베이징 TV 타워가 학교 주변에서는 제일 높은 건물이었고, 길거리에는 베이징 비키니(참 이름을 잘 지었다)를 입은 아저씨들부터, 엉덩이 부분을 오려낸 바지를 입은 아기들까지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당시 나는 한 달에 1200위안 정도를 생활비로 썼다. 면 나보다 세네 배가 많은 생활비를 쓰면서도 부족하다는 유학생들도 많았다. 나는 생활비가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점심은 학생 식당에서 먹었고, 저녁은 학교 주변에서 먹고 싶은 것을 먹었으며, 가끔 좋아하는 양꼬치에 맥주를 먹기에는 충분한 돈이 있었다. (당시에는 100위안이면 남자 3명이서 맥주와 양꼬치를 배불리 먹었다.)




그건 그렇고, 40만 원이나 지불한 유학원에서는 학교 정문 앞에 마음대로 내려주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바쁘게 제 갈길을 갔다. 덩그러니 중국의 처음 가보는 에, 이민 캐리어와 함께 남겨진 나는 어쩔 줄 몰라 당황다. 다행히 학교 앞에는 유학원에게 이미 한 차례 횡포를 당한 유학생들이, 똑같은 일을 겪을까 걱정되었다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상에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다.


선배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하루 $4.0의 2인 1실 기숙사를 어렵게 배정받았다.

기숙사는 다섯 평 정도에 직사각형 모양으로, 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두 개의 침대 나무 책상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장판이 깔려 있지 않은 시멘트 바닥이 어색했고, 하필이면 화장실 맞은편 방을 배정받아 여름이면 특유의 냄새마저 코를 찔렀다. 첫날, 기숙사 방에 캐리어를 겨우 밀어 넣고, 방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 하얀색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이 생각났다. 집에 잘 돌아가셨을까, 많이 걱정하실 텐데 어떻게 전화드리지 생각하니 유학을 온 것이 실감되었다. 시 앉아 있으니 긴장이 풀리고 배가 고파왔다. 증은 기숙사 수돗물로 억지로 해결했지만 배고픈 건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전자사전이 없던 시절, 나는 캐리에서 두꺼운 중한 대사전을 찾았다. 하나하나 틀리지 않길 바라며 '제발' '빵' '주세요'를 찾아 1층 매점에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请我.. 面包 ( 주세요)"  부모님 곁을 떠나니 밥 한 끼 해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운 기숙사 六號樓 앞 (리우 하오로 우)

 



중국과 비즈니스를 최근에 시작한 사람들에게는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이때의 중국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다. 조금 바꾸어 말하면, 친절했다기보다는 순박(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순수하며 인정이 두터운)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은 내가 교포(조선족)가 아닌지, 혹은 중국인 아내와 결혼한 것은 아닌지,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본다. 하지만 아마 20~30년 전의 중국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나누고 싶은 미담 하나즘은 떠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 사람들은 특히 한국 사람들을 좋아했다. 

중국인들만 오는 허름한 양꼬치 집에서 목욕탕 의자에 쭈그려 앉아 한국어로 대화를 하고 있으면, 건너편 테이블에서, 엄지를 치켜세우고 멋쩍게 웃 한국을 좋아한다 말하는 사람들을 흔하게 만날 수 있었다. 조선족 할머니가 하시는 동네 노포에 가면, 할머니는 한국에 있는 손자가 생각난다며 주문한 '돌솟밥(돌솥밥)' 외에도, 배불리 먹고 가라고 계란말이라도 급히 만들어 주셨다. 학생들은 길을 물으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고, 야채 장사는 감자를 사면 오이라도 덤으로 줬으며, 중국 친구들은 눈만 마주치면 보온병에 있는 차를 나누어 려 하였다.


순수하며 인정이 두터웠던 중국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중국 경제 성장의 혜택으로 모두 수십억의 자산가가 되어 옛날의 순박했던 마음을 잊어버린 것일까, 혹은 원래부터 비즈니스(돈) 앞에서는 인정사정없었던 것일까. 지금은 마치 정규 교과 과정 중, '갑질'이라는 과목이라도 생긴 것처럼, 조금의 우위라도 생기면 배운 것을 써먹고 싶어 안달이 난 듯 행동하니, 중국과 비즈니스를 이제 시작한 후배들에게 중국 사람들의 순박했던 모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우리 회사는 출장을 가는 직원에게, 한국과 회사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 교양 있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매번 서약을 요구한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 고객들도 중국인을 대표한다고 생각하여 최소한의 존중이나 예의는 갖추고 일터에 나오면 좋겠다.


한발 더 나아가, 중국이 세계 최대 시장, 군사력, 선진 기술을 무기로, 대국이라고 무조건 '우기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아닌, 적절한 교양과 상대국에 대한 존중을 통해, 주변국들에게 대인배라고 '인정받는' 날이 오면 좋겠다. 중국이 G2를 선언하고 달 표면에 오성홍기를 꽂은 지도 벌써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존중과 배려가 있는 사회 문화를 만드는 것이, 누가 먼저 화성에 발을 딛는지보다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원한 부자 후진국'의 오명을 벗는 날이 오길 바란다.


물론 우리나라도 비판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유교문화 + 자본주의'는 또 하나의 괴물이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선진국의 교양과 예의는 갖추지 않았을까 생각하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 2003년 3월, 1학년 2학기 쉬는 시간, 학교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최근 중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야, 지금 중국 남방 지역에서 괴질이 유행한데. 그 옆에서 숨만 쉬어도 죽는데!"   괴담이라 생각했지만,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Sars 북경을 째로 봉쇄시킬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처음 써보는 마스크, 문을 걸어 잠근 식당들교를 선언한 학교집 밖으로 나갈 수 조차 없는 현실에 답답함과 무력감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Sars로부터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학교에 와도 된다는 소식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수개월 후 뜨거운 어느 여름날, 중국은 Sars를 극복하기 시작했고, 2학기가 이미 끝난 여름 방학, 중국으로 돌아가 2학년을 올라가는 진급 시험에 참석하고 통과할 수 있었다.


2003년, Sars가 베이징을 강타했다 (사진출처_Baidu)




20대 초반, 중국에서 유학을 하면 중국통이 되는 줄 알았다. 나는 슬램덩크의 '조재중' 같았다.

어린 시절 나는 슬램덩크 광팬이었다. 이제는 기억이 가물가물해졌어도, 후반부에 나온 조재중은 인상 깊게 기억한다. 북산 고교팀의 안 선생님이 대학 농구팀에서 호랑이 감독으로 불릴 때,  선생님의 제자인 조재중은 스파르타식 가르침이 싫어, 스스로 성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농구의 본고장 미국 유학을 감행했다. 그러나 의 미국 농구 유학은 순탄치 않았고, 멘토가 없는 미국에 온 것을 후회하며 안 선생님께 부치지 못한 편지를 썼다.

'안 선생님... (중략) 농구의 나라 미국... 그곳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전 높이 날아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건지...'


조재중은 꼭 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만화 속의 조재중처럼 중국의 공기를 마시는 것만으로 더 높이  수 있을 줄 알았다.

중국어를 공부하고, 중국 사람들과 어울리면 자연스레 좋은 멘토를 만나고, 나의 길이 열릴 것이라 생각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성실함이 국에 맞닿으면 중국통의 길이 알아서 열릴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걸어야 할 좁은 길도, 지고 가야 할 십자가도, 나를 따르라는 사람을 낚는 어부도,  어느 하나 찾아낼 수 없었다. 유니콘(멘토)은 동화 속에나 있다는 것을 그때는 알 수 없었다.


2003년 7월, 2학년 진급 시험에서 응시한 1학년 재학생 중 70%가 탈락했으나, 나는 그래도 좋은 점수로 2학년에 진학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 시절을 어영부영 허송세월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불안한 마음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별 중의 별은 아니어도 중국통 되고 중국에 왔는데... 중국 유학생을 도피 유학생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의 일부 시선에서 나는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인지, 학년 진급 시험만 통과하면 순탄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도 괜찮은 것인지, 한국에서 명문대를 다니는 친구들과 혹시 격차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구심과 함께 불안함은 날로 커져갔지만, 21살 7월 이미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반이나 지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멈출 수 없는 고민 앞에서,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특권, '쉼표' 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휴학을 신청했고 군 입대를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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