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 당시의 감정은 그저 추억이 아닌, 복잡하게 얽힌 애정과 증오로 변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중국인 친구들에게 "중국은 나에게 애증의 대상이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한자어의 의미를 알면서도 이 생소한 표현에 호기심을 보이며 눈에 물음표를 띄운다.
스무 살, ‘중국’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던 시절이 있었다.
중국의 주석이 장쩌민이던 때, 나의 마음에 애정이 가득했던 20년 전의 중국 이야기를 되새기고 싶다.
2022년 2월 17일, 중국에 첫 발을 딛다.
2002년 2월 17일, 나는 스무 살의 젊은 마음을 안고 중국으로 출국하고 있었다.
인천공항에서 인파를 헤치며 출국장으로 향했다. 기대감으로 들떠 주절주절 말이 많았던 나와는 달리, 부모님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지켜보듯 말씀이 없으셨다. 출국 시간이 가까워 오자, 사람들은 짧은 헤어짐의 인사를 시작했다.
부모님과 마지막 포옹을 하며 아기처럼 울음소리를 내는 아이들부터, 중국에서의 유의사항을 일일이 확인하는 부모들까지, 이별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지만, 그들의 헤어지는 마음은 비슷한지 알 수 없는 온기가 출국장 앞을 뜨겁게 했다.
어머니는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에도 나의 손을 잡고 때때로 눈을 맞추셨고, 아버지는 뒤에서 말없이 지켜보며 애틋한 마음을 감추시려 애쓰셨다. 여권 검사를 마치고 출국장 문 안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설렘이 사라지고 부모님과의 이별이 현실로 다가왔다.
뒤를 돌아보니, 자동문 사이로 슬픔에 젖어 나를 바라보는 어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시며 발걸음이 무거워질까 걱정되어 급히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나는 스무 해 동안 키워주신 부모님을 뒤로하고, 새롭게 펼쳐질 미래를 향해 성큼 걸어갔다.
2000년대 초반의 베이징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도착했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에 처음 도착했을 때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하다. 베이징은 중국의 역사적인 고도이자 현재 정치와 경제의 중심지로, 인구 2천만이 넘는 대도시다. 서울의 면적과 비교하면 27배, 경기도와 비교해도 면적과 인구 모두 1.6배 이상인 이곳은 그 규모에서 압도적이었다.
20년 전의 베이징은 오늘날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나는 사람들에게 "당시 베이징에는 마차와 스포츠카가 함께 달렸다"라고 이야기하지만, 처음 들은 사람들은 이를 쉽게 믿지 않는다. 실제로 베이징 올림픽 전, 도로교통 관리를 위해 마차의 도심 진입이 금지된 사실도 있다.
저녁에 산책을 하다 말 똥을 밟아 흰색 신발을 버린 기억까지 생생하기에...
이 이야기를 여전히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기사와 사진을 보여주고 싶다. 이제는 믿어줄까?
마차가 다니던 베이징은, 불과 20년만에 마천루가 즐비하게 되었다.
2000년대 초반, 베이징의 거리는 과일을 실은 마차와 삼륜 오토바이 그리고 자전거가 뒤섞여 어지럽게 달렸다. 2024년 현재, 마천루가 즐비한 첨단 도시를 중국산 전기차와 독일산 고급차들이 질서 정연하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좀처럼 과거의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다.
현재 베이징 중심의 상무중심구를 가면, 60층의 삼성그룹 사옥이 꼬마 빌딩처럼 보이고 마치 홍콩에 온 듯 세련된 사람들이 길거리를 활보한다. 그러나 20년 전, 학교 주변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베이징 TV 타워였고, 거리에는 '베이징 비키니'(상의를 가슴까지 돌돌 말아 입는 형태)를 입은 아저씨들과, 엉덩이 부분이 오려진 바지를 입은 아기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지금 베이징 시내에서 점심 한 끼를 먹으려면 인민폐 100위안(약 2만 원)으로는 부족할 때가 많다. 그러나 20년 전, 그 시절의 베이징의 물가는 놀라울 만큼 저렴했다. 그때는 건장한 청년 세 명이서 양꼬치와 맥주를 배불리 먹어도 100위안(약 1.2만 원)이면 충분했다.
2000년대 초반의 베이징은,
유학생들에게, '마음이 열려 있는 도시' 그리고 '입이 즐거운 도시'였다.
베이징에서의 첫날
베이징의 첫 정착은 순탄하지 못했다. 유학원에서는 나를 학교 정문 앞에 덩그러니 내려놓고는 바쁘게 떠났다. 갑자기 중국이라는 낯선 땅에 이민 가방과 함께 남겨진 나는 멍해졌다. 다행히 학교 앞에는 유학원에게 이미 한 차례 횡포를 당한 선배 유학생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배 유학생들의 도움으로, 하루 4 달러의 2인 1실 기숙사를 어렵게 배정받았다.
기숙사는 다섯 평 정도에 직사각형 모양으로,마치 데칼코마니처럼 두 개의 침대와나무 책상이나란히놓여 있었다. 장판이 깔려 있지 않은 시멘트 바닥이 어색했고, 하필이면 화장실 맞은편 방을 배정받아 여름이면 특유의 냄새마저 코를 찔렀다.
첫날, 짐을 방 안으로 겨우 밀어 넣고 문을 잠그고, 침대에 누워 하얀 천장을 바라보니 부모님이 떠올랐다. 집에 잘 돌아가셨을까, 많이 걱정하실 텐데라는 생각이 들며 유학을 온 것이 실감되었다.
긴장이 풀리면서 배가 고파왔다. 갈증은 기숙사 수돗물로겨우 해결했지만, 배고픔은 도무지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전자사전이 없던 시절, 두꺼운 대사전을 뒤져서 '제발', '빵', '주세요'를 찾아 1층 매점으로 갔고 어렵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었다.
부모님 곁을 떠나니, 밥 한 끼를 스스로 해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리운 기숙사 六號樓 앞 (리우 하오로 우)
베이징에서의 꿈같은 시간
베이징에서의 1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그리운 시절 중 하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새로운 기운이 가득하고, 자유로운 공기가 나를 설레게 했다. 기숙사 문을 열고 나오면 친구들이 나를 맞이했고, 기숙사 앞에는 내가 평생 본 것보다 더 많은 외국인들이 모여 삼삼오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수업에서 중국어로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고, 개인적으로 과외 선생님을 구해 배울 수 있는 환경도 좋았다. 중국 음식과 문화, 그리고 개방적인 중국인들의 태도에 완전히 빠져들었다. 그 시절, 중국의 매력에 푹 빠져 있었던 나는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2003년 3월, 1학년 2학기 쉬는 시간에 친구들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최근 중국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2003년, Sars가 베이징을 강타했다 (사진출처_Baidu)
"야, 지금 남방 지역에서 괴질이 유행 중이야. 그 근처에서 숨만 쉬어도 죽을 수 있대!"
처음에는 단순한 괴담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로부터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Sars가 베이징을 통째로 봉쇄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마스크가 그렇게 답답한 것인지 처음 알았고, 문을 잠근 식당들, 휴교를 선언한 학교, 집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상황에 답답함과 무력함이 몰려왔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Sars로부터 안전한 한국으로 돌아가서, 학교가 다시 개방되기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수개월 후, 뜨거운 여름날, 중국은 Sars를 극복하기 시작했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비록 1학년 대다수가 한 학기 동안 수업을 참석하지 못했기에, 2학년 진급 시험에서 많이 탈락했지만, 나는 좋은 성적으로 2학년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무렵에는과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중국에서 혼자 유학을 했기에, 한국에서 명문대학에 다니고 있는 친구들과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불안감이 커졌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의 결정에 책임을 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었다.
나는 허락된 '쉼표'를 찍기로 했다. 휴학을 신청하고, 군 입대를 결심했다.
따뜻한 사람들이 가득했던 20년 전의 중국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중국은 우리에게 우호적이고 매력적인 나라였다.
중국 여행이 유행하던 시절, 병마용 기념품을 사거나 만리장성, 계림 등을 여행한 후에는, 마치 특별한 경험을 한 듯 여러 사람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다. 90년대 홍콩 영화는 한 시대를 풍미했고 남자들의 마음에는 주윤발과 이연걸이, 여자들의 마음에는 여명과 장국영이, 어린이들에게는 성룡과 홍금보가 최고의 인기 스타였던 시절이 있었다.
최근 중국과 비즈니스를 시작한 사람들은 믿기 어려울지도 모르겠지만, 20년 전의 중국인들은 정말 순박하고 친절했다. 현대 중국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진정으로 따뜻한 사람들 덕분에 그 시절은 아직도 가슴속에 생생하다.
중국 사람들은 특히 한국인들에게 우호적이었다. 허름한 양꼬치집에서 목욕탕 의자에 쭈그려 앉아 한국어로 대화하고 있으면, 건너편 테이블에서 엄지를 치켜세우며 한국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조선족 할머니가 운영하던 동네 노포에서는, 할머니가 한국에 있는 손자가 떠오르신다며, 계란말이를 자주 서비스로 만들어 주셨다. 학생들은 길을 물으면 끝까지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었고, 야채 장사는 감자를 사면 오이를 덤으로 주었으며, 중국 친구들과 눈이 마주치면 보온병에 담긴 차를 나누려 했다.
그 시절의 순수하고 인정 깊었던 중국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2024년 현재, 한국 사람들은 중국을 비호감 국가로 손꼽고 있다.
중국은 이제 '권위주의+시장경제'의 괴물로 변해가고 있으며, 나는 냉정함을 유지하며 중국의 성장 기회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람들 앞에서 나의 주장은 점점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자식을 키우면 평생 효도를 한다는 말이 틀리지 않는 것 같다. 내 마음속의 중국은 유학 시절의 따뜻함을 남긴 채, 지금은 나에게 증오만을 안겨주는 안하무인의 갑질 고객이 되어 버린 듯하다.
천상천하, 천하제일의 중화사상에 가슴 벅차하며,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주변 국가에게 힘을 과시하는 중국을 볼 때면, 오히려 조금은 촌스러워도 인종, 문화 그리고 진영을 가리지 않고 모든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던, 20년 전의 중국이 오히려 그들이 좋아하는 '대국'이라는 단어에 조금이라도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순수하며 인정이 두터웠던 중국 사람들은 다 어디 갔을까?
중국 경제 성장의 혜택으로 모두 수십억의 자산가가 되어 옛날의 순박했던 마음을 잊어버린 것일까, 혹은 원래부터 비즈니스(돈) 앞에서는 인정사정없었던것일까. 지금은 마치 정규 교과 과정 중, '갑질'이라는 과목이라도 생긴 것처럼, 조금의 우위라도 생기면 배운 것을 써먹고 싶어 안달이 난 듯 행동하니, 중국과 비즈니스를 이제 시작한 후배들에게 중국 사람들의 순박했던 모습을 설명할 길이 없다.
중국이 G2를 선언하고 달 표면에 오성홍기를 꽂은 지도 벌써 4년의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중국은 세계 최대 시장, 군사력, 선진 기술을 무기로, 대국이라고 무조건 우기고 있을 뿐, 그 어떤 나라도 중국을 좋아하거나 선진국으로 인정하는 나라는 없다. 존중과 배려를 배우고 실천하는 사회 문화를 만드는 것이, '영원한 부자 후진국'의 오명을 벗으며 주변국들에게 대인배라고 '인정받는' 길로 가는 첫 번째 걸음이라는 것을 중국은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