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여도 괜찮아 #4
이른 새벽, 스마트워치로 날씨를 확인하니 눈이 많이 온다는 소식이 있다.
창밖을 내다보니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버스 시간을 맞추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무 위에 소복이 쌓인 눈이 오랜만에 눈에 들어오자, 기분이 묘했다. 길을 걸으며 눈이 구두를 덮는 감촉이 낯설면서도 반가웠다. 또, 집에서 곤히 자고 있을 아이가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문득, '내가 눈을 좋아했었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 글을 읽는 이가 대한민국 현역 군인이었다면, 특히 최전방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다면, 눈에 얽힌 잊고 싶은 기억들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2004년 7월, 스물두 살의 나는 휴학 후 군에 입대했다.
내가 배정된 최전방 부대는 가혹행위로 악명이 높아,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던 곳이다. 복무 중에도 몇 번이나 부대 내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제대 후에도 비슷한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시대가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같은 고생을 되풀이하는 후배들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특히 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 'GP'에서 재조명된 사건으로, 매일 얼굴을 보던 소대장님이 세상을 떠났고, 동기들은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사건 이후, 우리 내무반으로 옮겨온 동기들은 총에 탄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총구가 자신을 향할 때마다 몸서리쳤다. 그날의 공포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있었던 젊은이들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치유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곳에서도 내가 복무했던 곳처럼 가혹행위가 만연했다면, 지금이라도 그 책임자들은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는 말도 덧 붙이고 싶다.
입대 전, 나는 유행에 민감한 평범한 청년이었다. 노티카 잠바에 칼주름을 잡은 베이지색 지오다노 면바지, 그리고 갈색 유광 닥터 마틴을 신고 지샥 시계를 차고 다녔다. 뜨거운 음식은 천천히 식혀 먹었고, 샤워는 수증기에 쌓여 한 시간 동안 하는 것을 즐겼다. 설거지는 했어도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싱크대 거름망을 갈아본 적은 없었다. 나는 편지 쓰기를 좋아했고, 퍼즐을 맞춰 방에 걸어놓곤 했다. 나는 성실했지만 이십 대를 느리고 여유 있게 보냈다.
특히 어릴 적 태권도, 유도, 킥복싱, 쿵후 등 안 배워 본 운동이 없지만,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자 애들 간의 무식한 힘 싸움에서 드디어 벗어나, 마음대로 섬세함을 드러내도 되는 이십 대가 좋았다.
입대 후의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안 빨아도 티 안 나는 검은색 나이키 잠바에 다릴 필요 없는 청바지를 입고, 향수 대신 로션만 바르는 사람이 되었다. 뜨거운 돌솥밥도 물 한 잔 없이 10분이면 먹어치웠고, 샤워는 비누 하나로 5분이면 끝냈다.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일상이 되었고, 군 복무 시 똥 통에도 들어가 본 경험 덕에 변기 닦는 일은 우습게 여겨졌다.
군 복무 중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있다. 점호 시간에 허리를 펴고 앉아 두 시간 동안 빨랫줄을 바라보며 정신이 혼미해지던 순간, 뜨거운 여름날 방독면을 쓰고 산을 오르며 숨이 막힐 것 같았던 순간, 어두운 산을 오르며 눈을 감고도 깜깜함을 느꼈던 순간들. GOP에서는 경차만 한 멧돼지 가족이나 하늘을 메운 독수리들, 북한에서 떠내려온 형체가 불분명한 시체들을 찾던 경험, 사격장에서 땅벌과 뱀의 공격을 받았던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북한군이 보이는 최전방 부대에서, 24개월 동안 25번의 훈련을 뛰었으니, 군 생활 동안 적지 않게 고생을 했다.
침낭 안의 퀴퀴한 곰팡인 냄새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건 어느 겨울날, 솜이 터져 나온 침낭 안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다.
입대 전, 아버지는 군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사회생활도 잘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나는 군 생활을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항상 최선을 다했지만 군대는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힘들었던 일병 시절, 유일한 위로가 되어준 말년 병장이 제대하며 깨끗한 침낭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말년병장이 제대한 다음 날, 그 말년병장에게 미움받던 선임병은 물려받은 깨끗한 침낭을 빼앗아 갔다. "야, 저 XX, 침낭 뺏고, 이거 줘!" 당시 이등병, 일병은 모포나 침낭을 머리 위로 덮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나는 솜 터진 침낭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중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 미친놈처럼 수백 번 웅얼거렸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국방부 시계는 돌아간다.
군대가 나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첫째, 두려움이 사라졌다.
늦은 저녁, 아이를 재우기 위해 방에 들어가면 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어둠이 내려앉은 방이 무서운지, 아니면 꿈속의 괴물이 두려운지, 아이는 나를 바라보며 묻는다.
"아빠, 아빠는 무서운 게 뭐야?"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웃으며 대답한다. "아빠는 배고프거나 추운 게 무서워. 가장 무서운 건 춥고 배고픈 거야. 아! 한 가지 더 있다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갑자기 똥 마려운 것?"
아이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지고, 다음 날 아침 아파트 단지에는 "쇠똥구리 아빠"라는 별명이 퍼져 나갔다. 아이 앞에서는 찬 물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는 이야기를 마음에 새겼어야 했는데...
둘째, 인내심이 강해졌다.
가끔 아내는 나를 뜬금없이 칭찬한다.
"여보, 당신은 군대를 다녀와서 그런지 배고픈 것도 잘 참고, 추운 것도 잘 견뎌."
이 말이 단순한 칭찬이 아니라는 걸, 따뜻한 어묵을 아이에게 건네며 웃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깨닫는다.
그 순간, 내 눈앞에 군대의 추운 겨울날이 스쳐간다. 얼음장 같은 물로 손이 얼어붙을 때까지 걸레를 짜던 기억, 입술이 파랗게 질릴 때까지 참아야 했던 추위, 그리고 최전방에서 아찔했던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들과 빈번한 인격 모독들까지. 군대 생각에 씁쓸해질 때 즘, 아이가 깔깔댄며 말한다.
"아빠 못 참는 것 있어! 똥!" 그놈의 또 똥...
셋째,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분명해졌다.
한국 영화 '범털' 속 재소자가 꿈꾸는 것은 교도소 담장 너머 산 정상이다. 나에게 그곳은 '중국'이었다. 군대에서 내가 사용했던 모든 물건에 새겨진 '中國'이라는 글자는, 내가 돌아가야 할 곳, 내가 새롭게 시작할 곳을 의미했다.
군대에서의 경험이 나를 강하게 만들었고, 이 모든 경험들은 나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 제대 후 남은 3년의 시간은 나에게 마지막 기회였다. 초조함보다는 설렘이, 걱정보다는 기대가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내 앞에 놓인 목표를 향해 무작정 달려가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