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u Ming May 15. 2024

바람에 날리는 중국 팬티

호구여도 괜찮아 #4

이른 새벽, 스마트 워치로 날씨를 살핀다.

눈이 많이 온다고 하여 창밖을 살피니 세상이 하얗다. 조금 더 바삐 움직여야 버스 시간에 늦지 않겠구나 하며 집을 나선다. 나무 위에 눈이 소복이 쌓인 건 오랜만이다. 밖에 나서니 구두를 반을 덮을 만큼 쌓인 눈에, 집에 있는 아직 자고 있는 아이가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다 문뜩 '내가 눈을 좋아했었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글을 읽는 이가, 만약 대한민국 현역 군인이었다면, 특히 최전방 어느 곳에 있었다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떠오를 것이다.




  

2004년 7월, 스물두 살의 나는 휴학 후 입대를 하였다. 

내가 복무한 최전방 부대는 가혹행위 부대로 악명이 높아 뉴스에 단골손님으로 자되는 곳이었다. 복무하는 중에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는데, 제대 후 한참이 지나서도 안타까운 소식이 들릴 때면, 이 시대의 고생하는 젊은이들 걱정에 안타까움이 밀려온다. 특히 얼마 전 넷플릭스 드라마 GP를 통해 재조명된 안타까운 사건로 인해, 매일 얼굴을 보던 소대장님이 세상을 떠났으며, 입대 동기들이 크고 작 부상을 입었다. 그 사건 이후, 우리 내무반으로 옮긴 동기들은 총알이 없는 총인 것을 알면서도 총부리 자신을 향하면 기겁을 했으니 그날의 두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한번 고인의 명복을 빌며, 그 자리에 어쩔 수 없이 있었던 젊은이들의 마음의 치유를 바란다. 혹시 그곳에도 내가 복무한 곳처럼 가혹행위가 심각했다면 지금이라도 잘 못된 행위를 한 사람들은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말도 잊지 않고 싶다.


잊을만하면 뉴스에 다시 올라오곤 한다


입대 전의 나는 유행에 민감한 여느 남자애들처럼 노티카 잠바, 칼주름을 잡은 베이지 색 지오다노 면바지, 그리고 갈색의 유광 닥터 마틴을 신고, 지샥 시계를 차고 향수를 뿌리고 다다. 뜨거운 음식은 차가운 물을 옆에 두고 천천히 식혀가며  먹었고, 수증기에 쌓여 한 시간 정도 샤워하는 것을 좋아했다. 설거지는 해봤어도 음식물 쓰레기가 담긴 싱크대 거름망은 갈아본 적이 없고, 화장실 바닥 청소는 해봤지만 변기를 닦아본 적은 없었다. 지 쓰는 것을 좋아했고, 퍼즐을 맞춰 방에 걸어놨고, 이케아에서 산 초승달 모양의 노란색 전등을 침대 위에 걸어놓고 곰돌이 푸의 당나귀(이요르) 인형을 좋아했다. 나는 성실했지만 이요르처럼 걸음이 느릿느릿했다. 릴 적 태권도, 유도, 킥복싱, 쿵후 등 안 배워 본 운동이 없지만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남자 애들 간의 무식한 힘 싸움에서 드디어 벗어나, 마음대로 섬세함을 드러내도 되는 이십 대가 좋았다.  생기진 않아도 굴이 하얗고 피부가 깨끗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었다.


입대 후의 나는 느 예비역 아저씨처럼 안 빨아도 티 안나는 검은색 나이키 잠바에, 다릴 필요 없는 청바지, 막 신어도 되는 스프리스를 신고, 향수는 무슨 향수 로션만 발랐다. 뜨거운 돌솥밥도 물 한잔 마시지 않고 10분이면 식사를 해치울 수 있게 됐고, 샤워는 비누 하나로도 5분이면 오케이다. 설거지는 물론 음식물 쓰레기 처리는 일상이며, 군 복무 시 똥 통에도 두어 번 들어가 보니, 변기 닦는 거야 우스운 일이 되었다. 내가 취미를 갖은 사람이 이었는지 아니 감정이라도 가진 사람이었는지, 먹고사는 문제 외에는 관심이 없고 올해가 되어서야 글 쓰는 취미를 붙이고 있다. 제대한 지 20년이 지난 최근에 피부가 좋다는 말을 듣게 되었지만, 군 복무 중에는 매일 바르는 위장크림(돼지기름)에 얼굴부터 목까지 멍게가 된 듯 거울에 비추어진 괴물 같은 나를 봤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렸었다. 영하 이십 도에 찬 물에 걸레를 빠느라 손은 다 부르텄고, 행군으로 물집이 터진 발바닥을 하고서도 선임이 벗어던진 슬리퍼의 오와 열을 맞추느라고 뛰어다녔다. 24개월 동안 25번의 훈련을 뛰고 GOP까지 다녀왔으니 군 생활 적지 않게 고생이 많았다.


군 복무 시에 잊고 싶어도 잊히지 않는 순간들이 몇 가지 있다.

군 점호 시에 허리를 펴고 앉아 한 시간 내내 눈앞의 대각선 위의 빨래 줄을 보고 있으면 정신병에 걸릴 것 같았고, 뜨거운 여름날 방독면을 쓰고 수 백 미터의 산을 군장을 메고 오를 때, 방독면 안이 땀과 김으로 가득 차 금방이라도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고늦은 밤 훈련 중 적군을 공격한다고 불 빛 하나 없는 산을 오르며 눈을 감은 것보다 깜깜한 칠흑 같은 어둠에 눈꺼풀을 움직는 촉감으로 눈을 뜨고 감은 것을 구분할 수 있었고, GOP에서 무섭게 쳐다보는 경차만 한 멧돼지 가족이나 하늘을 가득 메운 독수리가 무서웠고, 5분 대기조로 출동해서 북한에서 홍수로 떠내려온 체가 불분명해진 검은색의 시체을 찾기도 했고, 사격장을 제초 작업하다가 손가락만 한 땅벌과 께 빨간색 큰 뱀의 공격을 동시에 받아 우사인 볼트만큼 빠른 속도로 도망을 쳤으며, 최전방이라 헛것을 자주 봤지만, 하루는 아주 또렷한 정신 속에 다리가 없는 검은색의 어떤 것이 태연하게 코 앞까지 걸어왔던 순간들은 과연 사실인지 기억의 오류인지 헷갈린다.


그중에서도 잊히지 않는 건 어느 겨울날 솜이 터져 삐져나온 침낭 안의 퀴퀴한 곰팡이 냄새다.

입대 전, 아버지는 군 생활을 잘하는 사람이 사회생활도 잘한다고 하셨기에, 군 생활을 잘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상 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군대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제일 힘들었던 일병의 어느 시간을 지나갈 때 즘, 유일한 위로가 되어준 말년병장이 제대하며 깨끗한 침낭을 물려주었다. 하지만 말년병장이 제대한 다음 날, 그 말년병장에게 미움받던 선임병은 물려받 깨끗한 침낭을 빼앗아 갔다. "야, 저 XX, 침낭 뺏고, 이거 줘!"  당시 이등병, 일병은 모포나 침낭을 머리 위로 덮을 수 없다는 규칙이 있었지만, 나는 솜 터진 침낭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가 내 코를 찔렀다. "중국에 다시 돌아가고 싶다" 미친놈처럼 수백 번 웅얼거렸다... 


사람은 참 신기하다. 불행하거나 힘들었던 기억은 뇌리 속에 마음대로 자리 잡고, 좀처럼 행복한 기억에게 그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나는 물을 먹은 이불이나 벽에 붙은 곰팡이를 볼 때면, 어디선가 그날의 퀴퀴한 냄새가 올라오는 것 같아 고개를 가로저으며 애써 외면하 한다.

이 정도면 A급, 군인들에게 도대체 무슨 침낭을 주는 것인가? 


훈련소 재래식 화장실에서 '제대는 오지 않는다'는 낙서에 낙담했지만, 국방부 시계는 달팽이 같더라도 느릿느릿 흘러갔고, 제대라는 두 글자가 나에게도 허락 됐다.  날을 2년이나 손꼽아 기다렸기에, 새벽 3부터 눈이 떠져 아침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특별히 더디 오던 아침이 밝고 내무반에 첫 햇살이 내려왔다역 신고를 니 중대장이 굳이 헹가레를 쳐주라 한다. 덩치가 좋은 후임병들이 한 껏 높이 올려주니 하늘이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대에서 나와 고생한 동기들 의정부에서 부대찌개를 먹고 집으로 가는 전철에 랐다. 군복을 벗기 전까지는 군인의 신분이었기에, 최대한 전철에서도 집에 가는 길에서도 군인처럼 절도 있게 행동했다. 그리고 드디어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도착해 문이 닫히며 나 혼자가 되었다. 

"으아아아아! 드디어 제대했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환호 섞인 괴성을 렀고 머리가 쭈뼛쭈뼛 서며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니 2년의 고통을 이겨낸 내가 어색한 웃음으로 나를 칭찬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군복과 군화를 벗어던지고 거실에 속옷 차림으로 대자로 누웠다. 천장을 보고 누워 있으니 인생의 가장 긴 시간의 끝이 실감되었다.




군대가 나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없다, 없다, 없다고 강력히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지만, 만약 질문을 바꿔 군대를 제대하고 발견한 나의 다른 모습이 있냐고 물으면 아래와 같이 답하고 싶다.


첫째, 두려운 것이 없어졌다.

늦은 저녁, 벌써 초등학생인 아이를 재우러 방에 들어가면 아이는 나에게 수도 없는 질문을 하고는 한다. 불 꺼진 방이 무서운 것인지, 가끔 꿈에서 만나는 악몽 속의 괴물이 무서운 것인지 반짝거리는 눈으로 묻는다. "아빠, 아빠는 무서운 게 뭐야?" 나는 대답한다. "아빠는 배고픈 게 무섭고, 추운 게 무서워. 제일 무서운 건 춥고 배고픈 거야. 아! 한 가지 더 있다면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갑자기 똥 마려운 거?" 아이는 배를 잡고 웃고 다음 날 아침 아파트 단지에 나를 쇠똥구리(새벽에 똥 누는 구리라는 설명과 함께)라고 소문을 내서 한동안 동네 아줌마들과 마주칠 때면 민망해서 슬금슬금 피하곤 했다. 돌이켜보면 특히 추운 겨울, 군대에서 헛 것을 참 많이 보았다. 최전방이라 남자만 죽은 것인지 긴 머리에 흰 소복을 입은 처녀 귀신은 만나지 못했지만 군인들이 앞에서 끝도 없이 오기도 했고, 여기저기 검은 물체들이 내 주위를 지나가기도 했다.


둘째, 인내심이 강해졌다.

아내는 나에게 종종 묻는다. "여보, 자기는 군대를 다녀와서 그런지 배고픈 것도 잘 참고, 추운 것도 잘 참아" 내 앞에 있는 따뜻한 어묵을 뺏어서 아이에게 주면서 하는 말이 아니라면, 칭찬으로만 듣겠지만 내 앞을 지나가는 어묵을 보며, 문득 군대와 인내심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생각한다. 일단 2년을 갇혀 있었으니, 인내심이 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어쩔 수 없이 참아야만 하는 것들이 군대에는 참 많았다. 최전방인 사유로 실탄과 수류탄을 나누어주었는데 목숨을 담보로 한 협박들부터, 빈번한 인격 모독들, 그리고 매일 저녁 병장들과 가위바위보로 귀싸대기 때리기 게임을 했던 건 잊히지 않는다. 군대 생각에 씁쓸할 때 즘, 아이가 말한다. "아빠 못 참는 것 있어! 똥!" 그놈의 또 똥..


셋째,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누구나 그렇지만, 나는 군대가 참 싫었다. 기회만 있다면 대한민국 모범시민이자 성실한 납세자로서 군대는 왜 제대로 밥조차 주지 않았는지 묻고 싶다. 식판 위에 새 모이만큼의 밥과, 짬(음식물 쓰레기) 처리하기 귀찮아 주는 오물과 같은 김치 무더기를 내 입에 최대한 빨리 쑤셔 넣어야 칭찬받을 수 있는 곳에 누가 자기 자식을 보내고 싶겠는가?

한국 영화 '범털'을 보면 교도소에 갇힌 재소자가, 형기를 마치고 출소하면 제일 먼저 교도소 담장 너머 간신히 보이는 산 정상에 가고 싶다고 한다. 나에게 '범털이 말한 산 정상'은 중이었다. 나는 내 모든 소지품(전투모, 전투화, 활동화, 심지어 속옷까지)에 中國이라는 두 글자를 새겨 넣고 수 없이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굳이 팬티에까지 중국이라고 쓸 필요가 있었나 싶지만 각오를 다지기 위함이었다고 핑계를 대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중국에 간 후 이미 1학년을 보냈기에 내게 남은 것은 3년의 시간이었다.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초조함 보다는 설렘이, 걱정보다는 기대가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바람에 날리는 중국이라고 크게 주기된 팬티 (사진: 구글)


이전 03화 중국, 애증(愛憎)의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