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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May 15. 2024

베이징, 가장 낮은 곳에 흐르는 인정(人情)

호구여도 괜찮아 #5


니체와 아빠


재작년, 막 일곱 살이 된 아이는 나에게 물었다. "아빠, 이순신 장군님도 지옥에 가야 해? 어린아이가 죽어도 지옥에 가야 해?"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은 아들은, 내가 처음으로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했다. 권사님인 어머니와, 크리스천인 나, 천주교 모태신앙인 장모님과, 나이롱이라는 세례명을 가진 아내 사이에서, 두 할머니나 부모보다 니체가 더 영향력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이에게 내가 보았던 신앙의 역사에 대해 말해주고 싶지만, 아이 또한 스스로 가치관을 지닌 주체이기에 강요가 될 것 같아,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고 다음 기회를 기약했다.


만약 아이에게 내가 베이징 가장 낮은 곳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보여줄 수 있다면, 아이의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까? 가끔 아버지 세대 분들과 이야기하면 인생에 은사님이 있었다는 말을 이따금 들을 수 있다. 나도 군대를 제대하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은사님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을 만났다.




이민 가방을 들고 저녁 늦은 비행기에 올랐다


2006년 7월 23일, 중국 비자가 나오는 바로 다음 날, 나는 중국으로 가는 저녁 비행기에 앉아 있었다.  

제대한 군인의 티를 벗지 못한 나는 없는 척했다. 그러나 막상 제일 늦은 저녁 비행기에 올라 동그란 창문으로 보이는 어두 컴컴한 창 밖을 쳐다보니 그제야 걱정이 시작되었다.  


첫째, 안전
일 년 치 학비와 생활비를 몸에 지니고 겁 없이 저녁 비행기를 탄 점

둘째, 숙소
학교 앞 호텔에 예약도 하지 않고, 아무 문제 없이 투숙할 수 있으리라 근거 없이 자신한 점

    *그게 어렵다면 공항에서 하루 밤 지내된다라는 무모함은 말할 것도 없음

셋째, 문제해결 (중국어)
중국에 3년 만에 다시 돌아가면서, 문제가 생겨도 모든 게 잘 될 것이라 생각한 점


어머니의 새벽 기도 덕이었을까, 나는 우연히 옆 자리에 앉으신 할아버지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선교사 선생님이라 호칭하 글에서는 은사님으로 변경하였다.

은사님은 늦은 저녁 비행기를 탄 나를 걱정되는 눈으로 바라보시며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학생, 우리 집이 작지만 학생만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며칠이라도 머무르도록 해요"

나는 감사한 마음이 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늦은 시간, 외국에서 모르는 남자 집에 간다는 것이 겁이 났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 생각해 보니, 은사님께서는 늦은 비행기에서 만난 처음 만난 이십 대 건장한 청년에게 자기 집에서 지내 말을 꺼내시기까지, 더 큰 용기가 필요하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염치 불고하고 하루라도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덩치가 산만한 아저씨가 은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차에 오르고 40분 정도를 달려 베이징 외각 어딘가의 은사님 댁에 도착했다. 저녁 10시가 넘어 어둑어둑한 아파트에 들어서니, 거칠게 칠해진 하얀색 벽과 잘 쓰지 않는 먼지가 쌓인 가구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안내해 주신 작은 방에는 나무 옷장과 침대가 덩그러니 있었다.


사모님께서 가끔 중국에 오실 때 쓰시는 방으로, 마침 사모님께서 한국으로 가셨으니, 편히 써도 된다는 말을 하시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다. 은사님도 불편하실 텐데 작은 집의 방 한 칸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내주신 것이다. 은사님은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는 분이셨다. 그날 저녁, 제대한 지 겨우 열흘이 지난 24살의 나는 설렘과 어색함으로 쉽게 잠에 들지 못다.



가장 낮은 곳에 흐르는 인정(人情)


교의 사정으로 숙사에 들어가지 못했기에, 살 집을 마련하는 데까지 시간이 필요했다. 염치없게도 은사님 댁에 3주나 세를 졌다. 3주의 시간 동안 은사님을 따라다니며 이 아프거나 사정어렵지만 마음만은 따뜻한 중국들을 만나 위로하고 또 위로받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은사님은 특별히 물으셨다. "혹시... 토요일, 봉사활동 같이 가지 않을래요?" 흔쾌히 은사님을 따라나섰다.


베이징 대법원 근처, 다양한 사연을 가진 분들이 의도하지 않게 몇 년씩 장기화되는 항소심을 기다리는 동안 일자리를 구할 수 없어 극빈민층이 되어버린 사람들끼리 불법 거주하는 판자촌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은사님과 봉사단은 매주 빵과 소면 등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먹을 것을 수백 개씩 준비하셨다.


판자촌은 각종 쓰레기와 음식물이 썩는 악취가 진동했고, 질퍽질퍽한 진흙과 철로길을 지나 겨우 도착한 판자촌에는, 판자촌이라 불렸음에도 판자로 만들어진 집에 묵는 사람들보다 길거리에서 노숙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우리의 임무는 수 백개의 먹을 것을 지고 걸어가며 당장 먹을 수 있는 빵과, 두고서 이틀 정도 먹을 수 있는 소면을, 한 사람당 각 한 개씩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때로는 수 백 명이 빵이나 소면을 한 개라도 더 달라고 몰려들어 위험하기도 했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며칠을 굶었다며 팔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당황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감사함을 표했고, 우리는 설사 사정이 더 힘들어 보이거나 몸이 불편한 분이 계시더라도, 최대한 공평히 더 많은 분께 먹을 것이 전달되도록 노력했다.


출처 : 중국 징지르바오 / 현실은 이보다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그러나 먹을 것을 아무리 많이 준비해도,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이 더 많았기에 빵과 소면은 자주 부족했다. 어느 하루, 특이하게도 만나는 모든 분께 빠짐없이 나누어 드리고도 평소 같지 않게 빵과 소면 각 개 정도 남았다. 봉사활동을 끝내고 땀에 젖어 마천루 밑에서 쉬고 있는데, 길 맞은편 10미터 정도 거리에서 7살 정도 되는 여자 아이와 큰 가방을 멘 아이 어머니가 쭈뼛쭈뼛 다가오지 못하고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주머니를 향해 최대한 따뜻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가방을 열어 남은 빵과 소면을 보여 드렸다. 아주머니는 한 손에는 딸의 손을 잡고 아주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오셨고, 나는 딸과 함께 있는 아주머니에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많지 않아 죄송해요, 모두 가져가세요." 하고 말씀드렸다. 아주머니는 눈물이 글썽거리시며 주섬주섬 가방에서 때가 묻은 생수  병을 꺼다.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어요. 물이라도 마시세요" 본래 잘 울지 않는 나는 글썽 거리는 아주머니의 눈을 보며 빵과 소면을 건네자마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돌렸다. 내가 마음 아픈 것이 혹시라도 동정하는 것처럼 보여 상처를 드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힘든 상황이 오면, 평소 보이지 않는 예민한 모습을 보인다.

굳이 전쟁이나 지진으로 인한 기근, 중병이나 전염병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 자연재해나 예상치 못한 사고로 인한 상실감까지 말하지 않더라도, 그저 끼니 시간이 조금 늦어지거나 잠을 못 자는 상황이 되어도 사람들은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예민해지고 여유가 없어진다. 나 또한 잠을 못 자게 돼서 몸이 힘들어지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조차도 평소같이 대하지 못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사회를 신이 말한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으로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동일한 논리를 대입하면, 판자촌은 가진 것이 부족하고 상황이 열악한 만큼, 마음의 여유도 부족한 것이 맞겠으나, 내가 일 년간 경험해 본 그들의 삶은 좀 달랐다.




달팽이 마을 안쪽으로 사람들을 찾아서


베이징 시정부에서는, 2008년 올림픽을 한 해 앞두고 도시 정비에 열을 올렸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1988년 올림픽이 열리기 한해 전과 같이, 도시 안의 판자촌은 그 규모가 점점 축소되어 갔다. 철거원들과 판자촌 사람들은 사람들은 원래 살던 곳에서 판자촌 안쪽으로 들어갔고, 철거원들이 찾아와 그곳마저 철거해 버리면, 다시 더 안쪽으로 거주지를 옮겨 들어갔다. 판자촌 마을의 가장 안쪽은 본래 넓은 장소가 아님에도,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좁 장소를 나누어 살게 되었다. 마치 숨어버린 달팽이의 몸통을 찾듯 달팽이 집안으로 점점 숨통을 조여 오는 철거원들의 모습에 우리나라의 옛날도 이와 같았을까 마음이 아팠다.


매주 판자촌을 찾을 때마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야 사람들에게 빵과 소면을 나누어 줄 수 있었지만 하루는 아무리 찾아도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베이징 시정부가 그들의 주거지를 철거하고 강제 이주 시키는 건 막을 수 없는 결정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의 먹는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 주지는 않았기에 며칠을 굶었을 사람들 생각에 어떻게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판자촌 마을 중심으로 제일 깊숙이 들어가야 하는데, 먹을 것을 싸들고 들어가면 며칠을 굶은 사람들에게 둘러 싸일 수 있어 자칫하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또 그날 하필이면 문제가 생기면 해결해 주시는 곰처럼 덩치가 큰 중국 아저씨가 자리를 비우셨기에, 우리는 판자촌 제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더욱 망설여졌다.


은사님께서 결정을 내리셨고 나는 용감히 앞장서 판자촌 중심으로 걸어갔다. 판자촌 중심의 모습은 지금까지 내가 겪은 판자촌의 모습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한걸음 한걸음 옮기기 어려울 만큼, 썩은 내가 나는 진흙 바닥은 더욱 질퍽질퍽했고, 지나가며 보이는 속옷 차림의 사람들은 위협은커녕 경계도 하기 어려울 만큼 말라 있었고 눈에는 힘이 없었다. 도대체 이 많은 파리들은 여기에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눈앞을 가릴 정도로 날아다니는지, 손을 휘이휘이 젓지 않으면 파리들을 쫓을 수 없었다.


판자촌 외각에는 가족끼리 거주하는 집도 꽤나 있었다. 그 집의 아버지들은 해진 옷을 입고 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고 어머니들은 빵보다는 오래 먹을 수 있는 소면을 더 달라고 하셨었다. 그러나 판자촌 중심에는 부상을 입어 치료가 필요해진 혼자가 된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판자촌 제일 중심에 도착할 때 즘, 자연스레 우리를 따라온 분들의 행렬이 줄이 되어 있었다. 몸의 이곳저곳에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들에게 빵과 소면을 나누어 드리기 시작했다.


머리가 다친 사람, 손가락이 절단된 사람들은 그래도 손과 발을 사용할 수 있었기에 비교적 부상이 크지 않은 편에 속했고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사람, 거동조차 할 수 없어 누워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어렵게 줄을 서서 먹을 것을 받아가시는 만큼, 하나라도 더 드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계속 커져갔다. 몸이 불편함에도, 모두 질서 있게 줄을 서주셨지만, 준비한 빵과 소면이 다 떨어질 정도로 그 줄은 한참이나 길었다. 그러나 줄 뒤에는, 다리가 절단되어 걸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는 사람이, 줄을 서지 못하고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가져온 빵과 소면을 한두 개라도 따로 빼두고 싶었지만 '공평'이라는 규칙 앞에 내 마음대로는 할 수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하는 중에, 방금 팔이 절단되어 한 팔로 빵과 소면을 어렵게 받은 사람이 급히 뒤로 돌아 다리가 절단된 사람에게 가고 있었다. 며칠을 굶었을 팔이 절단된 사람은, 다리가 절단된 사람에게 자신은 소면을 먹으면 된다며 빵을 양보해 주었다. 


판자촌 달팽이 마을 제일 낮은 곳에, '서로 사랑하라'가 살아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여보, 종교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쓰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동감이다. 나는 평소 종교, 정치에 대해 내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그저 누군가 나에게 종교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네, 교회를 20년째 가지 않는 크리스천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러나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어 나누기로 마음먹었기에, 작금의 우리 현실에 대해 짧게라도 개똥철학 밝힘으로써 답답한 마음을 걷어내고 싶다.


이 시대에 종교를 가졌다고 말하는 것, 특별히 유일신 사상의 기독 신자라고 말하는 것은, 독선주의에 빠진 사람으로 보일 수 있어 주의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천주교나 특히 기독교(개신교)를 떠올릴 때, 가난하지만 의 사랑을 전하는 신부님이나 개척 교회 목사님이 아닌, 수리남의 전요한 목사(사기꾼)나, 명동에서 피켓을 들고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독선주의자가 떠오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된 걸까?


현재의 기독교는 부정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기독교는 기독교 외에는 모든 것을 부정한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검색해 보아도 기독교인들은 이 책과 니체를 부정하기 바쁘다. 누가 봐도 논리가 부족해 보이는 주장보다는, 그저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베이징에서 만났던 은사님처럼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는 건 어떨까?


내가 존경했던 베이징에서 만난 은사님은 베이징 판자촌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 주며 나에게 물으셨다. "제가 하고 있는 일중에 어떤 일이 가장 이 분들께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당연히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라고 대답했지만, 은사님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아니요, 기도입니다. 나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아주 보잘것없습니다. 하지만 신이 살아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라고 생각해요."

신이 성경 안의 죽은 글자가 아니라면, 신이 정말로 살아 있다면,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할 것이다. 우리 부모가 형제들에게 그만 좀 싸우라고 윽박지르듯이 말이다. 나는 지금의 기독교가 부정과 비난이 아닌, 존중과 기도의 종교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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