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u Ming May 15. 2024

베이징, 가장 낮은 곳에 흐르는 인정(人情)

호구여도 괜찮아 #5


니체와 아빠


재작년, 막 일곱 살이 된 아이는 나에게 물었다. "아빠, 이순신 장군님도 지옥에 가야 해? 어린아이가 죽어도 지옥에 가야 해?" 이 질문을 듣는 순간, 나는 첫째로 놀랐고, 다음으로는 대답하기가 참 어려웠다. 아들은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고, 그 영향으로 깊은 수준의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개신교 교회 권사님인 어머니와, 크리스천인 나, 천주교 모태신앙인 장모님과, 세례명을 가진 아내 사이에서, 니체의 철학이 더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했다.


나는 아이에게 신앙에 대한 나의 경험과 생각을 전달하고 싶었지만, 아들 또한 스스로 가치관을 형성해 나가는 주체이기에,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절한 대답을 찾기보다는, 조금 더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했다.


만약 내가 아이에게 베이징의 가장 낮은 곳에서 보냈던 시간들을 보여줄 수 있다면, 아이의 질문에 답이 될 수 있을까? 가끔 아버지 세대 분들과 이야기하면 인생에 은사님이 있었다는 말을 이따금 들을 수 있다. 나도 군대를 제대하고 중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안, 은사님이라 부를 수 있는 분을 만났다.




이민 가방을 들고 저녁 늦은 비행기에 올랐다


2006년 7월 23일, 중국 비자가 발급된 다음 날, 나는 중국으로 가는 저녁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대한 군인의 티를 벗지 못한 나는 없는 척했다. 그러나 막상 제일 늦은 저녁 비행기에 올라, 비행기 창밖으로 보이는 어두 컴컴한 풍경을 바라보니 불안감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첫째, 안전 문제.
일 년 치 학비와 생활비를 몸에 지니고 겁 없이 저녁 비행기를 탄 점

둘째, 숙소 문제.
학교 앞 호텔에 예약도 하지 않고, 아무 문제 없이 투숙할 수 있으리라 근거 없이 자신한 점

    *그게 어렵다면 공항에서 하루 밤 지내된다라는 무모함은 말할 것도 없음

셋째, 문제해결 능력. (중국어)
중국에 3년 만에 다시 돌아가면서, 문제가 생겨도 모든 게 잘 될 것이라 생각한 점


어머니의 새벽 기도 덕이었을까, 나는 우연히 옆 자리에 앉으신 할아버지 선교사님을 알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선교사 선생님이라 호칭하 글에서는 은사님으로 변경하였다.

은사님은 늦은 저녁 비행기를 탄 나를 걱정되는 눈으로 바라보시며 먼저 말을 걸어 주셨다.

"학생, 우리 집은 작지만, 괜찮다면 며칠이라도 머무를 수 있도록 해요."


나는 감사한 마음이었지만, 늦은 시간, 낯선 외국에서 모르는 남자의 집에 가는 것이 불안했다. 하지만 은사님이 처음 만난 이십 대 청년에게 자신의 집에서 지내라고 말하기까지는 더 큰 용기가 필요하셨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 또한 절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염치 불고하고 하루라도 신세를 지기로 하였다. 비행기에서 내리니 덩치가 산만한 아저씨가 은사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검은색 차에 오르고 40분 정도를 달려 베이징 외각 어딘가의 은사님 댁에 도착했다. 


은사님 댁에 저녁 10시가 넘어 들어갈 수 있었다. 거칠게 칠해진 하얀색 벽과 잘 쓰지 않는 먼지가 쌓인 가구들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고, 안내해 주신 작은 방에는 나무 옷장과 침대가 덩그러니 있었다.


사모님께서 가끔 중국에 오실 때 쓰시는 방으로, 마침 사모님께서 한국으로 가셨으니, 편히 써도 된다는 말을 하시며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다. 은사님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가족이 평소 쓰은 방을 내어주신 것이다. 


은사님은 조건 없이 은혜를 베푸는 분이셨다. 

그날 저녁, 제대한 지 겨우 열흘이 지난 24살의 나는 설렘과 어색함으로 쉽게 잠에 들지 못다.



가장 낮은 곳에 흐르는 인정(人情)


학교 사정으로 기숙사에 들어가지 못해 살 집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은사님께 염치없이 3주 동안 신세를 지게 되었고, 그 시간 동안 은사님을 따라다니며, 몸이 아프거나 사정은 어렵지만 마음은 따뜻한 중국인들을 만나서, 위로했고 또 받을 수 있었다. 어느 날 은사님이 특별히 물으셨다. "혹시 토요일에 봉사활동에 같이 가지 않겠어요?" 흔쾌히 은사님을 따라나섰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베이징 대법원 근처의 판자촌이었다. 여기에는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 의도치 않게 몇 년씩 장기화되는 항소심을 기다리며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극빈층이 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이들은 불법 거주하며 판자로 만든 집이나 길거리에서 노숙하고 있었다.


매주 은사님과 봉사단은 빵과 소면 등을 수백 개씩 준비하여, 당장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판자촌은 각종 쓰레기와 썩은 음식물의 악취가 가득했고, 질퍽거리는 진흙과 철로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판자촌이라 불리지만, 판자로 지은 집보다 길거리에서 노숙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 우리의 임무는 먹을 것을 가지고 한 사람당 하나씩 빵과 소면을 나누어 주는 일이었다.


때로는 수백 명이 한 개라도 더 얻으려 몰려들어 위험할 때도 있었고, 며칠을 굶었다며 애원하는 사람들의 팔목을 꽉 잡고 놓아주지 않는 상황에 당황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우리는 상황이 어려운 분이나 몸이 불편한 분이 계셔도 최대한 공평하게 음식을 나누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출처 : 중국 징지르바오 / 현실은 이보다 말할 수 없이 열악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음식을 준비해도 도움을 바라는 사람들은 계속 늘어나 빵과 소면은 자주 부족했다. 어느 날, 특이하게도 모든 사람에게 빠짐없이 음식을 나누어 드리고도 평소보다 훨씬 많은 빵과 소면이 남았다. 봉사활동을 마치고 땀에 젖어 마천루 아래에서 쉬고 있을 때, 길 건너편에서 약 10미터 거리에 있는 7살쯤 된 여자아이와 큰 가방을 멘 어머니가 쭈뼛쭈뼛 다가오지 못하고 서 있었다.


나는 따뜻한 표정을 지으며 가방을 열어 남은 빵과 소면을 보여주었다. 어머니는 딸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걸어오셨고, 나는 최대한 예의 바르게 "많지 않아서 죄송해요, 모두 가져가세요"라고 말했다. 어머니는 눈물이 글썽이면서도 주섬주섬 가방에서 때가 묻은 생수 두 병을 꺼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제가 가진 것이 없어 죄송해요. 물이라도 마시세요." 평소에 쉽게 울지 않는 나도 어머니의 눈을 보며 빵과 소면을 건네자마자 고개를 돌렸다. 동정의 표시가 상처가 될까 두려워서였다.


사람은 힘든 상황에 처하면 평소 보이지 않던 예민한 면을 드러내곤 한다. 

전쟁이나 지진 같은 극단적인 상황에서의 고통이나, 중병, 자연재해, 예기치 못한 사고를 떠나서, 끼니가 조금 늦어지거나 잠을 못 자는 상황에서도 사람들은 예민해지고 여유를 잃는다. 나 또한 잠을 못 자고 몸이 힘들어지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평소처럼 대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로 사랑하라는 신의 가르침으로 사회를 구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동일한 논리를 적용해 보면, 판자촌의 사람들은 가진 것이 부족하고 상황이 열악하기 때문에 마음의 여유도 부족할 것이라 예상된다. 하지만 내가 일 년 동안 경험한 그들의 삶은 예상과 달랐다.




달팽이 마을 안쪽으로 사람들을 찾아서


2008년, 베이징 시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정비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88년 대한민국의 서울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었다. 판자촌은 점차 축소되었고, 원래 살던 지역에서 점점 더 안쪽으로 밀려났다. 철거원들이 판자촌의 가장 바깥쪽을 철거하면, 사람들은 다시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결국, 좁은 공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었고, 마치 달팽이가 집 속으로 숨어들듯, 판자촌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더 좁은 곳으로 밀려갔다. 


매주 판자촌을 방문할 때마다 더 깊숙이 들어가야만 사람들에게 빵과 소면을 나눠줄 수 있었지만, 어느 날에는 아무리 찾아도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다. 베이징 시정부의 강제 이주와 철거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아직 남아 있는 사람들의 식량 문제를 완벽히 해결해주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어떻게든 먹을 것을 나누어 주고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판자촌 중심부로 가기 위해서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음식을 들고 들어가면 며칠을 굶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수 있어서 상황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게다가 그날, 문제를 해결해 주는 큰 덩치의 중국 아저씨가 자리를 비우셨기에 우리는 더욱 망설였다.


은사님께서 결단을 내리셨고, 나는 용기를 내어 판자촌의 가장 깊은 곳으로 걸어갔다. 판자촌의 중심부는 지금까지 경험했던 것보다 훨씬 열악했다. 한 발 한 발 내딛기 어려울 만큼 썩은 냄새가 나는 진흙 바닥은 더욱 질퍽질퍽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위협적이지도 경계하지도 못할 정도로 말라 있었다. 도대체 이 많은 파리들은 여기에 무슨 먹을 것이 있다고 눈앞을 가릴 정도로 날아다니는지, 손을 젓지 않으면 앞으로 나아가기도 어려웠다.


판자촌 외곽에는 가족 단위로 거주하는 집들도 있었다. 그곳의 아버지들은 해진 옷을 입고 있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있었고, 어머니들은 빵보다는 오래 먹을 수 있는 소면을 더 달라고 하셨다. 그러나 판자촌 중심부에는 부상을 입어 치료가 필요한 혼자된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그곳에 도착하자, 자연스럽게 우리를 따라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우리는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들에게 빵과 소면을 나누기 시작했다.


머리에 상처가 난 사람들과 손가락이 절단된 사람들은 비교적 부상이 가벼운 편이었고, 팔이나 다리가 절단되어 누워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픈 와중에도 줄을 서서 음식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하나라도 더 드리지 못하는 아쉬움이 커져갔다. 준비한 빵과 소면이 다 떨어질 정도로 줄은 길었고, 그 끝에는 다리가 절단되어 줄을 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위해, 빵과 소면을 몇 개라도 따로 빼두고 싶었지만, ‘공평’이라는 규칙 앞에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고민하던 중, 방금 팔이 절단된 사람이 급히 다리가 절단된 사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팔이 절단된 사람은 자신은 소면만으로도 충분하다며 빵을 양보해 주었다.


판자촌의 달팽이 마을 제일 낮은 곳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살아 있었다.

 



아내는 나에게 말했다. "여보, 종교에 대해 쓰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동감이다. 나는 평소 종교, 정치에 대해 내 생각을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의 질문과 나의 경험은 깊은 고민을 외면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마음속의 이야기를 꺼내어 나누기로 마음먹었기에, 현재의 우리 현실에 대해 짧게라도 개똥철학 밝힘으로써 답답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한다. 


이 시대에 종교를 가진다는 것, 특히 기독교를 말하는 것은 때로 독선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다. 사람들은 종교를 떠올릴 때, 가난하지만 신의 사랑을 전하는 신부님이나 개척 교회 목사님보다는, 수리남의 전요한 목사나 명동에서 외치는 독선주의자를 떠오르게 되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현재의 기독교는 배타적인 성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강하게 주장하면서도 다른 사상이나 신념을 부정하는 경우가 많다. 니체의 경우를 들여다봐도, 기독교인들은 이 책을 무조건적으로 배척하려는 경향이 있다. 수용 없는 배타적 태도는 종교에 대한 신뢰를 흔들리게 만들고, 사람들을 종교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베이징에서 만난 은사님은 그걸 몸소 보여주셨다. 그는 판자촌에서 매주 먹을거리를 나누며, 나에게 물으셨다. “내가 하는 일 중에서 무엇이 가장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요?” 나는 당연히 지금의 활동이라고 대답했지만, 은사님은 땀을 닦으며 말씀하셨다. “아니요, 기도입니다. 나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지만, 신이 살아 있다고 믿는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라고 생각해요.”


결국, 신앙은 단순히 교리나 종교적 의무를 넘어, 실제 삶에서 인간애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성경 안의 죽은 글자가 아니라면, 신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다른 종교에 대한 비방을 멈추고, 상대방의 천당이나 지옥을 걱정하기보다 따뜻한 손을 내밀어야 한다. 원수를 위해 기도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사랑할 때, 신은 우리에게 한 걸음 더 다가올지도 모른다.


                    

이전 04화 바람에 날리는 중국 팬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