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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u Ming May 19. 2024

도피유학생으로부터 도피하기

호구여도 괜찮아 #7

2007년 여름, 스물다섯 나는 베이징에서 2학년을 마칠 때 즘, 유학생활을 힘들어하고 있었다.

베이징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은사님을 비롯해 은사님을 통해 알게 된 선생님들, 개미집에서 함께 살았던 중국인 친구들, 그리고 학교에서는 교수님들과 일본인 친구 D와 T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 만나는 한국인들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없었다. 군대에서 꿈꿨던 유학생활은 중국음식을 먹고 중국옷을 입고 중국인들에게 둘러 쌓인 삶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한국인 유학생들로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연락이 왔고, 나는 그들의 연락을 매번 일일이 거절해야 했으며, 거절당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은 좀처럼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함께 운동을 하거나, 술을 마시거나, 주말에 놀러를 가거나, 공부를 하자고 연락해 왔다. 유학 생활은 내가 꿈꾸던 대로 중국인들과 어울리며 중국 문화를 온전히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한국인들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나는 마치 두 세계 사이에 낀 존재처럼 느껴졌다. 한쪽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꿈의 세계였고, 다른 한쪽은 나를 끊임없이 제자리로 되돌리려는 현실의 세계였다. 이런 상황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또 그만큼 학업 성적도 좋았고, 재미있고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계획했던 유학의 모습은 아니었다. 중국인들에게 둘러 싸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중국인들과 함께 살기도 했고, 학교에서도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들과만 최대한 어울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의지나 행동과는 다르게 자신을 선후배라고 부르는 한국인들이 점점 늘어났고, 나는 내가 꿈꿨던 유학생활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나의 유학이, 끊어내지 못하는 한국 사람들로 인해 그 의미가 퇴색되고 있는 듯했다. 점점 깊어지는 고민 속에서, 이곳에서의 생활이 원했던 바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며,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했다. 중국에서 만나는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서의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였다. 유학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나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나는 도피 유학생으로부터 하고 싶었다.

나 또한 중국에서 유학을 했고, 중국에서 학교를 나온 유학생이면서도, '유학생'이라는 세 글자는 나를 불편하게 했다. 2000년대 초반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문제가 됐었던 재 중국 한국 유학생들은, 학교는 안 가도 베이징 한인촌(우따커우)은 매일 출퇴근 도장을 찍는, 한국인들끼리 어울려 한심한 얘기를 나누는 철없는 아이들이었다. 지금의 유학생들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굳게 믿지만, 그때의 많은 유학생들은 성숙하지 못했다. 어쩌면 20대 초반의 아이들은 한국과 중국, 국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부모의 통제로부터 벗어났다는 해방감에 어디서든 그럴 수 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생각나는 유학생들을 소개해보고 싶다.


유학생 A : 오도구에서 한 달 생활비를 이틀 안에 탕진하는 것으로 유명한 유학생 A는 한 달에 한번 큰 손이 되어 친구들의 따꺼(큰 형님)를 자처했다. 집안 환경이 좋은 유학생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A는 특별히 유복했지만, 특이하게도 A는 짝퉁을 좋아했다. 그의 옷장에는 그가 명품이라고 주장하는 아르마니 바지가 넘쳐났다. 그는 한국에서 있었던 싸움이나 여자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학교에서 누구를 괴롭혔거나, 여자 친구들의 몸과 마음에 상처를 준 이야기는 그의 이야기 단골 메뉴 중 하나였다. 유학생 A는 학교 서편에서 동편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도 택시 타는 것을 좋아했는데 택시 기사와 나누는 그의 중국어는 자신감이 넘치지만, 학교 진급 시험에서는 매번 낙방하여 만년 2학년이다. 그는 유학생 선후배 사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며 의리 빼면 시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유학생 B : 유학생 B는 중국에 오기 싫었던 것이 자랑이었다. 고등학생 때, 영국에서 유학을 한 것이 자랑인 유학생 B는 중국음식을 못 먹는 것도 자랑이다. 중국 국내 항공사 음식은 입에 대본적이 없다는 식으로, 내가 매일 먹는 학생 식당 음식을 어떻게 먹냐며 자주 묻곤 했는데 대답을 들은 적은 없는 것 같다. 점심시간에는 남자 친구 차를 타고 왕징(한인촌)에 가서 먹는 김가네 김밥과 파리바게트 슈크림 빵이 그렇게 달콤할 수 없었다며 다른 여학생들의 부러움을 사곤 했는데, 그럴 때면 그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유학생 C : 유학생 C는 한국에서 건달이었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명문대를 다니는 유학생 C는 백두산 호랑이 축구부 출신으로 축구를 할 때도 무서운 사람이지만, 술을 먹으면 더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등하교를 할 때에도 술을 먹었을 때에도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취미였다. 유학생 C는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강남에서 유명한 건달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유학생 D : 술이라면 남의 집 땅문서를 훔쳐서 팔지라도 오늘의 한 잔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수중에는 돈이 한 푼 없지만, 주변에 빌린 돈은 많은 레버리지 술꾼이다. D는 술을 마시면 설교하거나 남의 인생에 훈수 두는 것을 좋아했다. D는 어느 모임에서도 잘 불리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D도 참석해야 하는 공식 저녁 모임의 다음 날에는 D가 친 사고를 막느라 진땀을 뺀 서너 명이 D와의 절교를 선언하곤 했다. 물론 D는 필름이 끊겨 잘못을 기억하지 못했다. 신기하게도 A~D 중에서는, D가 제일 일반적인 사람에 가까운데 그건 술을 먹지 않았을 때 이야기다. D는 지금은 술을 좀 줄였을까?


2000년대 초반의 중국 유학 생활은 황무지나 아마존과 같았다. 좋은 선배는커녕 주위에는 대부분이 도피 유학생들 뿐이었다. 물론 나도 한인촌에서 밥을 먹거나 술을 마셔본 적도 있고, 스타크래프트에 빠져 PC 방에 소중한 생활비를 탕진한 적도 있지만, 도피 유학생들의 삶과 가치관은 그런 일반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근묵자흑, 백로가 까마귀와 어울리면 검게 물든다'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던 말씀이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한다고 하신 말씀이지만, 나는 백로가 아니었고 백로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특히 다른 사람을 함부로 까마귀라 부르는 것이 싫었다. 하지만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은 부정하기 어려웠다. 만약 내가 그렇게 싫어했던 '도피 유학생'과 조금이라도 비슷해진다면 나 자신이 너무 싫어질 것 같아 친구를 사귀는 것을 아버지 말씀처럼 항상 조심했다.


한국인 친구는 절친 한 명이면 충분했다. 

그는 내가 흔들릴 때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었고, 또 성장이 멈춘 것 같을 때는 성장할 수 있도록 나를 마구 흔들었다. 친구와 주말에 수영을 하고 좋아하는 영화를 골라 베이징 대학 앞 허름한 노포에서 먹던 갓 구운 닭날개 꼬치와 시원한 맥주는 나의 인생 맛집 리스트에서 손에 꼽는다. 그와의 추억은 중국을 넘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는 내 남은 삶에서도 전우이자 스승으로 영원히 함께 해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연락을 매일 매번 거절하는 것은 나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유학생으로서 적응하기도 벅찬데, 불편한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인 연락을 받는 것은 큰 스트레스였다. 나는 단호한 태도로 거절하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그들이 연락해 올 때마다 예의는 지키되,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한 나머지 다섯 번 연락이 오면, 한 번은 모임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나의 감정과 정신적 건강을 우선시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에게 더 단호하게, 더 분명하게 나 자신을 지킬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유학 생활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나에게 연락을 거절당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얼마가지 않아 하나둘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 말씀처럼, 사람 사귀는 것을 매우 조심했다. 매일 저녁 모임을 만들어 파티를 하는 유학생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싫었던 나는 갖은 이유(아프다, 시험이 있다, 운동 중이다 등)로 거절했지만, 정말 집요하게도 연락을 해왔다. 반년쯤 지났을 때, 사람들은 내가 본인들과 어울리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너 혼자만 공부하고, 너 혼자만 잘났냐"는 식의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로 들었던 비난은 "사회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혹은 "그릇이 작다" 등이었다. 

15년이 넘는 사회생활을 하며, 연락처에 천명이 넘고 매주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주제들로 담소를 나누니, 아무래도 나의 사회생활에는 문제가 없는 듯하다. 다만 그릇이 작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다름을 인정해 달라고 호소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유학을 하며 새로운 사람들을 찾아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중국에 유학을 하며 굳이 한국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동일한 의미에서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오로지 중국 문화와 사람들 속에서 성장하고자 했던 나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그 꿈을 지키기 위해서 겪는 외로움과 어려움도 즐거움의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중국 유학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 사람에게 등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중국 유학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절친이 있다. 그는 그릇으로 치면 대중목욕탕처럼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었다. 절친은 결혼식을 큰 호텔의 제일 큰 홀에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친 지인(친구)만 백오십 명이 넘어 사진을 여러 번 나누어 찍었다. 그는 모범생이든 날라리든, 잘 나가든 자기 앞가림을 못하든, 만나서 즐겁든 불쾌하든 가리지 않고 자기 그릇에 담았다. 


유학시절, 나는 절친처럼 대중목욕탕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 깨달았다. 나는 대중목욕탕처럼 많은 사람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갖지 못했다. 다만, 진심을 담은 작은 찻잔이 되어 나와 만나는 사람에게 깊은 향기를 안겨줄 수 있고, 작은 소주잔이 되어 쓰린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든 개똥철학으로 남의 인생에 어설픈 훈수를 두려 하거나, 술을 마시기 위해 만남이라는 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주위에 두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이 꼭 대중목욕탕처럼 큰 그릇으로 모든 사람을 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나의 작은 그릇은, 나 혼자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데어찌 수십 명을 담을 수 있겠는가. 


그릇이 작은 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진심을 담아내는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그 그릇이 전하는 깊은 향기와 진정성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향기와 위로를 줄 수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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