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구여도 괜찮아 #7
유학생들의 딜레마
중국 친구들, 외국인 친구들과의 유학생활을 최대한 즐기고 싶었다.
나는 열심히 공부했고, 학업 성적도 좋았으며, 재미있고 행복한 순간들도 많았다. 그러나 내가 꿈꾸고 계획했던 유학의 모습은 아니었다. 중국인들에게 둘러싸인 환경을 만들기 위해, 중국인들과 함께 살기도 했고, 학교에서도 중국인이나 다른 외국인들과만 최대한 어울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의지와는 다르게, 자신을 선후배라고 부르는 한국인들이 점점 늘어났고, 나는 내가 꿈꿨던 유학생활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토록 기다리고 소중히 생각했던 유학이, 끊어내지 못하는 한국인들로 인해 그 의미가 퇴색되는 듯했다.
점점 깊어지는 고민 속에서, 이곳에서의 생활이 원했던 바와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며, 더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힘들어했다. 중국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그 속에서의 나 자신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할 때였다. 유학의 의미를 되찾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이 깊어졌다.
일부 철없는 유학생들
나 또한 중국에서 유학을 했고, 중국에서 학교를 다닌 유학생이지만, '유학생'이라는 말은 여전히 불편했다. 2000년대 초반에 문제를 일으킨 재중 한국 유학생들, 특히 베이징 한인촌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며 한국인들끼리 어울려 한심한 이야기만 나누는 모습은 내게 불편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유학생들은 대부분 성숙하지 못했고, 부모의 통제로부터 벗어난 해방감 때문에 한국과 중국, 국적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비슷한 행동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억이 나의 유학생활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 시절을 떠올리며 몇몇 유학생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유학생 A : 유학생 A는 오도구에서 한 달 생활비를 이틀 만에 탕진하며 친구들에게 큰 손이 되어 따꺼 ( 혀님)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집안 환경이 매우 유복했지만, 특이하게도 짝퉁 명품을 선호했다. 그의 이야기 중에는 학교에서의 무례한 행동이나 여성과의 문제 등 부정적인 것들이 많았다. 유학생 A는 자신감을 가지고 중국어를 구사했지만, 학업에서는 늘 낙방하여 만년 2학년이었다. 그는 유학생 선후배 간의 의리를 중요시하며 '의리 없으면 시체'라는 말을 자주 했다.
유학생 B : 유학생 B는 중국에 오기 싫었던 것을 자랑하곤 했다. 영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강조하며, 중국 음식이나 학생 식당 음식을 먹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점심시간에는 남자 친구와 함께 한인촌에서 한식이나 양식을 먹으며 다른 여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그럴 때면 그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유학생 C : 유학생 C는 한국에서 건달이었다고 한다. 중국 최고의 명문대를 다니는 유학생 C는 백두산 호랑이 축구부 출신으로 축구를 할 때도 무서운 사람이지만, 술을 먹으면 더 무서운 사람이 되었다. 등하교를 할 때에도 술을 먹었을 때에도 오토바이를 타는 것이 취미였다. 유학생 C는 한국으로 돌아가 다시 강남에서 유명한 건달이 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그들과 가까이할 수도 멀리할 수도 없는 유학생활
'근묵자흑, 백로가 까마귀와 어울리면 검게 물든다'
한국인 친구는 한 명만으로 충분했다.
그는 내가 흔들릴 때는 넘어지지 않게 잡아주었고, 성장에 필요한 자극을 주었다. 주말에 함께 수영을 하고, 베이징 대학 앞 허름한 노포에서 갓 구운 닭날개 꼬치와 시원한 맥주를 즐기던 기억은 나의 인생 맛집 리스트에서 언제까지나 손에 꼽을 것이다. 그와의 추억은 중국을 넘어 현재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는 내 남은 삶에서도 전우이자 스승으로 영원히 함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매일 매번 연락을 거절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 힘든 일이었다.
낯선 나라에서 유학생으로서 적응하기도 벅찬데, 불편한 사람들로부터 지속적인 연락을 받는 것은 큰 스트레스였다. 단호하게 거절하는 방법을 잘 알지 못했고, 예의를 지키면서도 거리를 두는 것이 중요했다.
하지만 나는 미안한 나머지 다섯 번 연락이 오면, 한 번은 모임을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성장과 행복을 위해 나의 감정과 정신적 건강을 우선시하고,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들로부터 거리를 두는 것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았어야 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에게 더 단호하고 명확하게 나 자신을 지킬 방법을 알려주고 싶다. 유학 생활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를 소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나의 거절을 비난으로 돌려준 사람들
나에게 연락을 거절당한 한국인 유학생들은, 얼마가지 않아 하나둘 나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 말씀처럼, 사람 사귀는 것을 매우 조심했다. 매일 저녁 모임을 만들어 파티를 하는 유학생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싫었던 나는 갖은 이유(아프다, 시험이 있다, 운동 중이다 등)로 거절했지만, 정말 집요하게도 연락을 해왔다. 반년쯤 지났을 때, 사람들은 내가 본인들과 어울리기 싫어한다는 것을 눈치채기 시작했고, "너 혼자만 공부하고, 너 혼자만 잘났냐"는 식의 원색적인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주로 들었던 비난은 "사회생활을 그렇게 하면 안 된다" 혹은 "그릇이 작다" 등이었다.
15년이 넘는 사회생활을 하며, 연락처에 천명이 넘고 매주 다른 사람을 만나 다른 주제들로 담소를 나누니, 아무래도 나의 사회생활에는 문제가 없는 듯하다. 다만 그릇이 작다는 비난에 대해서는 수긍하고, 다름을 인정해 달라고 호소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내가 유학 중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던 이유는, 중국에서 굳이 한국 사람을 만나기 위해 노력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중국에서의 유학 생활은 오로지 중국 문화와 사람들 속에서 성장하고자 했던 나의 꿈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그 꿈을 지키기 위해 겪는 외로움과 어려움도 나에게는 즐거움의 일환이었다.
다름에 대한 인정
그러나 중국 유학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한국 사람에게 등을 지고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예로 중국 유학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절친이 있다. 그는 그릇으로 치면 대중목욕탕처럼 큰 그릇을 가진 사람이었다. 절친은 결혼식을 큰 호텔의 제일 큰 홀에서 했음에도 불구하고, 절친 지인(친구)만 백오십 명이 넘어 사진을 여러 번 나누어 찍었다. 그는 모범생이든 날라리든, 잘 나가든 자기 앞가림을 못하든, 만나서 즐겁든 불쾌하든 가리지 않고 자기 그릇에 담았다.
유학시절, 나는 절친처럼 대중목욕탕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뒤 깨달았다. 나는 대중목욕탕처럼 많은 사람을 한 번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을 갖지 못했다. 다만, 진심을 담은 작은 찻잔이 되어 나와 만나는 사람에게 깊은 향기를 안겨줄 수 있고, 작은 소주잔이 되어 쓰린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누구든 개똥철학으로 남의 인생에 어설픈 훈수를 두려 하거나, 술을 마시기 위해 만남이라는 것을 만드는 사람들은 더 이상 주변에 두지 않을 권리가 있다. '다름'을 인정하는 방식이 꼭 대중목욕탕처럼 큰 그릇으로 모든 사람을 품어야 할 필요는 없다. 나의 작은 그릇은, 나 혼자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작은데, 어찌 수십 명을 담을 수 있겠는가.
그릇이 작은 나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진심을 담아내는 그릇의 크기가 아니라, 그 그릇이 전하는 깊은 향기와 진정성이다.
나를 만나는 사람에게 향기와 위로를 줄 수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