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수난시대 - 단편소설
-그녀의 수난시대(단편소설)
그녀의 발걸음마다에 바람이 달리는 듯 가벼운 소리가 났다.
장난스럽게 소리죽이며 살금살금 아파트층계를 걸어 올라가, 문 앞에 다가가서는, 놀랄 만큼 세차게 문을 두드렸다.
오늘따라 유치원에서 일찍 끝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엄마를 놀라게 할 생각에 들떠있었다.
자신이 올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을 엄마가, 그녀를 보면 얼마나 놀랄까.
생각할수록 재미있다.
세 번이나 연거푸 두드린 후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엄마-"하고 크게 불렀다.
역시 아무 소리가 없다. 다시 두 번을 계속 불러 보았다.
잠시 후, 안에서 엄마 대신 그 남자가 "응-"하고 대답하더니 다시 조용해진다.
그녀는 실망하여 발로 문을 걷어차며 소리 질렀다.
"이 문 좀 열어!"
그 말에 그 남자가 "알았어!" 소리 질러 대답하고는 또다시 잠잠해졌다.
그녀의 가슴속으로 탁한 먹구름이 몰려오며 분노와 슬픔이 고여왔다.
그녀는 알지 못했다. 엄마가 왜 자꾸 그녀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지. 그녀의 엄마가 그 남자와 안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지.
그저 영문 모를 소외감과 돌로 짓눌리는 듯한 무거움을 가슴에 느끼며, 동시에 뜨거워지는 눈시울을 느꼈다.
한 동안 그렇게 서있던 그녀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감추려는 듯 사방을 둘러보았다.
옆집 대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서로 친하게 오가며 알고 지내고 있고, 그녀도 수시로 그 집 언니와 놀곤 했기에, 그녀는 서슴없이 옆집 안으로 들어갔다
안에 들어가 옆집아줌마에게 대충 인사를 하고, 되는대로 아무 이야기나 지껄여 대었다.
늘 그렇듯 친절하게 답해 주었지만, 나름대로의 작업에 바쁜지 그리 반가운 기색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나가지 않고 구석에 앉아, 문 열리기를 기다리며 계속 서있느라 아팠던 다리를 쭉 폈다.
싫든 좋든 엄마가 집 문을 열어줄 때까지는 여기서 이렇게 기다려야 했다.
잠시 후 정리된 가슴속에서는 새로운 슬픔이 돋아나기 시작하였다.
'왜 내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거야? 둘이 뭘 하는 거야?'
그녀는 정확히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엄마가 자신을 점점 더 불편해하고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엄마가 새로운 교제를 시작한 것은, 아빠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라며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어느 날부터였다.
그녀의 아빠는 유명 신문사 기자였다.
아빠가 쓴 기사 하나가 그녀 인생의 걸림돌이 되었다.
대통령인 박정희의 유신헌법에 대해 쓴 기사 중, 무언가가 잘못되었다고 하였다.
아빠는 더 이상 회사에 나가지 않는다고 하였다.
다른 회사에도 못 간다고 하였다.
미국에 가는 것밖에는 길이 없다고 하였다.
그나마 미국에 갈 수 있어서 다행이고 행운이라고 하였다.
그렇게 아빠가 미국으로 가고 난 얼마 후, 엄마는 생활비를 마련해야 한다며, 집안 살림살이 중 아끼던 것들을 하나씩 내다 팔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곧 미국에 이민 갈 거라는 사실은, 엄마가 옆집아줌마에게 수시로 하는 커다란 자랑거리 중 하나였다.
아빠는 처음에는 어서 엄마와 그녀를 미국으로 데려갈 거라며, 그 비싼 해외전화를 수시로 해대더니, 날이 갈수록 차츰 전화하는 횟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더니 위장결혼을 해야 미국 시민권을 빨리 얻을 수 있다며, 엄마에게 이혼을 재촉한다고 하였다.
눈이 빠지게 미국으로 이민 갈 꿈만 꾸던 엄마는, 이 모두가 엄마와 그녀를 미국에 한시라도 빨리 데려가기 위해서라는 아빠의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결국 아빠는 미국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그 이후부터였다.
엄마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더니 수시로 예쁘게 화장하고 어디론가 나갔다 오기 시작하였다.
엄마는 날이 갈수록 불안해했고, 아빠와의 연락이 뜸해질수록, 심하게 신경질과 담배가 늘면서, 그녀가 유치원에서 돌아올 시간에도 종종 집을 비우고 나가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녀만을 바라보고 그녀만이 엄마 세상의 전부인 양, 모든 관심과 사랑을 그녀에게 퍼붓던 엄마는, 차츰 그녀보다 담배를 더 좋아하게 되었고,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는 혼자 외출해 있는 시간을 더 좋아하는 듯하였다.
어느 날 엄마는 낯선 남자와 함께 집으로 왔다.
그 남자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는 양, 아예 눌러앉아 버렸다.
그 남자는 엄마보다 훨씬 젊고 어려 보였고, 새벽에만 잠깐 나가서 일하는 인기 많은 수영강사라고 하였다.
그녀는 낯선 남자와 한집에 있다는 사실도 불편하였지만, 지금까지 그녀에게만 부어졌던 엄마의 마음이 온통 생소한 남자에게로 향해버렸다는 사실이 더 참기 어려웠다.
아니 그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은, 그녀는 이제 엄마에게 불필요하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다.
엄마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는 그녀에게 자꾸만 옆집에 가서 언니랑 놀라고 하였고, 놀이터에 나가 놀라고 강요를 하였다.
그리고는 나갔다 와도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곤 하였다.
그렇게 그녀의 존재를 부인하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이, 그녀에게는 가장 큰 상처이고 아픔이었다.
그녀는 또다시 솟으려 하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옆집에서 소리 없이 나왔다.
'문이 열려있는지도 몰라.' 그녀는 손잡이를 딸각거리며 돌려 보았다.
"누구야?" 신경질적인 엄마의 목소리.
나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무언가 구실을 붙이기 위해 몰랐던 듯 꾸미려 한다.
"나야, 엄마." 그녀는 무서운 인내로 분노와 슬픔을 억누르며 말했다.
"왜 초인종을 누르지 않는 거야? 자, 빨리 들어와."
엄마는 오히려 화를 내며 말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랑받고 싶었다.
엄마의 사랑을 더 이상 잃는 것은 그녀에게 너무나 큰 손실이고 괴로움이 될 것이기에.
방으로 들어가자 안에는 밥상이 놓여 있고, 한쪽에 그 남자가 어정쩡한 자세로 밥을 먹고 있던 것처럼 앉아 있었다.
그녀를 위해 마련된 장면의 왠지 모를 어설픔이, 그녀를 더욱 비참한 기분에 빠져들게 했다.
"밥 먹어." 목이 잠긴 듯 쉰 음성으로 그 남자가 말하고, 엄마는 그녀에게 물을 가져다준다며 부엌으로 나갔다.
어색한 분위기에서 도망치듯 그 남자 역시 엄마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나가 버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엄마와 그 남자는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녀는 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생각이 생겼다.
'정말 내가 온 걸 몰랐는지도 몰라. 둘이 뭔가 중요한 얘기라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그녀는 발소리를 죽여 문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부엌 쪽을 들여다보았다.
엄마와 그 남자는 부엌 안에 함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뭔가 필요치 않은 것을 본 듯 얼른 발소리를 죽여 방 안으로 되돌아왔다.
밥상 앞에 앉아 손등으로 소리 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