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속 길
- 심연 속 길
목적 없이 밖으로 나가 걸었다.
답답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점점 멍청해지는 느낌.
감각 없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어가 차츰 내 존재를 잊고
그래도 좋다는 식으로 심신을 고정시킨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공간 속에, 사방은
육면으로 쌓인 벽, 부드러운 태반 속,
아니 목재로 다듬어진 좁은 관이어도 좋았다.
이 세계의 사람들은 얼마나 살고 있을까.
늘 생각하고 계획한 대로 뜻하는 바를 이루며
그 보람으로 살아가는 것일까.
끝없이 뚫린 길이 있다.
양 옆은 심연으로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
그곳에 나 혼자 몸을 움직여 걷고 있다.
아무도 없다. 보이지 않는다.
손을 뻗쳐 보았다.
무언가 잡힌다.
사람이다. 나 아닌 다른 사람.
무표정하게 걷고 있다.
심연 속을 자세히 보니 한 명뿐 아니다.
하나, 둘, 셋, 아니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내 옆에, 앞에 그리고 뒤에서 걷고 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다. 볼 것이 없다.
아무것도 듣고 있지 없다. 들을 것이 없다.
그저 걷고만 있다.
자세히 보니 무척 바쁜 것도 같다.
부지런히들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 걸까.
이 멀고 먼 길 끝에는 무엇이 있길래
이처럼 열심히들 걷고 있을까.
그때였다.
내 뒤에 있던 누군가가 나를 앞질러 달려갔다.
한 명뿐 아니다. 여러 명이 달려 지나간다.
그러자 내 옆에 걷고 있던 사람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는 저 앞으로 달려갔다.
조그만 점이 되더니 그만 뵈지 않는다.
저렇게 달리면 목적지에 더 빨리 닿을 수 있을까.
나도 달려본다.
내 앞에 있던 사람들을 물리치면서 마냥 앞으로 달렸다.
기분이 좋았다.
이렇게 달리면 나는 저들보다 먼저 닿겠지. 상쾌하다.
한참을 달렸다.
아직도 멀었는지 끝은 뵈지 않는다.
그래도 달렸다. 숨이 찼다.
다리가 아프고 힘이 빠졌다.
맥이 풀려 주저앉아 버렸다.
사람들은 여전히 바쁜 듯 걷고 있다.
옆을 바라보니
달리기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음을 문득 발견한다.
분명 먼저 앞을 달려왔건만
여전히 깊고 깊은 심연에 둘러싸인
멀기만 한 길이다.
똑같은 풍경이다.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까지 달려도 이런 곳뿐일까.
무엇 때문에 저렇게들 바삐 걷고 있을까.
어딜 가고 있을까.
나는 기운이 빠져 버렸다.
그러나 일어나 저들과 함께 걸어야지.
내가 저들보다 늦어서는 안 되지.
사람들 틈에 끼어서 걷기 시작한다.
열심히 열심히 걷는다.
어디인지 모르는 곳을 향해 걷는다.
저쪽 끝에 닿을 수 있을지 그건 알 수 없다.
아무튼 걷고 있는 건
어디론가 가기 위해 걷고 있는 건 아니다.
모두가 걷고 있고, 그들과 보조를 맞추어
나의 위치나마 유지하기 위해 걷고 있는 것이다.
내가 이 길 위에 서있고, 내 앞으로 길이 뻗어 있기에
걷는 것뿐이다.
그리고는 저 먼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가끔씩 그려보며
마냥 걷기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