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일부터 25일까지 아내가 쓴 일기입니다.
7.24.(수) 비, 맑음
느긋한 하루
몇 번 깨긴 했어도 기분이 상쾌하다. 적막과 불안이 있던 밤과 달리 남해 집 아침은 고요하고 아늑하다. 세세히 계획을 짜 돌아다녀야 하는 부담이 없어 오전은 여유 있게 보내려 한다. 긴 여행의 매력이다.
간밤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찍부터 해가 뜨겁다. 젖은 이불을 한 번 헹궈 마당 빨랫줄에 널고, 늦잠 자는 아이가 깨길 기다리며 창가에서 커피 마셨다. 잔디밭 마당과 남해, 지족해협, 남해도, 멀리 가지 않아도 문밖이 아름답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기다 하늘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하늘은 쨍쨍한 햇빛이 조금씩 구름에 가리어지고 있었다. 혹시 비가 올까 서둘러 이불을 집안으로 옮겼다. 장마 끝난 여름 하늘은 변덕스럽다.
아이와 여행지에서 맞은 여느 아침처럼 간단하게 누룽지를 먹었다. 식탁에 나란히 앉아 나는 노트북으로, 아이는 아빠가 사주고 간 공책에 일기를 썼다.
아니나 다를까 먹구름이 몰고 온 비가 쏟아졌다. 시원하게 내린 굵은 빗줄기는 녹색과 파란색으로 꽉 찬 풍경에 싱그러움을 더해주었다. 한 시간쯤 후 비가 그쳤다. 여전히 입맛이 돌아오지 않은 아이에게 달걀부침 두 개를 억지로 먹이고 집을 나섰다.
남해군 한낮 바다가 아닌 곳은 탈 듯 뜨겁다. 큰 지도를 펼쳐 아이와 표시해 둔 실내 시설을 하나하나 가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탈공연박물관. 세계 각국의 탈과 그림자 공연 등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었다. 넓은 실내에 천천히 둘 뿐인 관람을 마치고 탈 만들기 체험장 갔다. 클레이로 보기를 따라 만드는 사뭇 진지한 얼굴은 새로운 레고 상자를 뜯고 조립할 때와 비슷했다. 난 곁에서 남해 관련 책을 읽으며 천천히 기다렸다.
여행지의 기념품은 그 순간을 기억해 내는 매개가 된다. 특히 크기가 작은 마그넷이나 컵이 좋다. 결혼 후 십 년간 여행 다니며 유럽, 아시아, 제주, 심지어 남산을 담은 것까지 모아두었다. 남해 집으로 돌아오며 기념품 가게에 갔다. OO스토어. 아이는 남해 지도 모양 마그넷, 지금은 남동생이 키우고 있는 같이 살던 삼색 고양이 ‘꼬맹이’를 닮은 작은 방향제와 물통을 골랐다. 사장님은 고민 없이 빠르게 고르는 아이가 귀여운지 집어 들다 슬며시 내려놓은 연필 두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오랜만에 엄마와 아이의 데이트였다.
마트에 들러 물과 아이스크림을 사고 집으로 왔다. 그 사이 아이가 고른 멜론 맛 바가 더위에 녹아 버렸다. 다시 얼린 모양으로 먹자고 하니 아이가 웃음으로 답했다.
조촐한 저녁 식사. 아이가 좋아하는 야채볶음밥을 준비했다. 서울 텃밭에서 남편과 매일 땀 흘려 수확한 감자, 당근, 호박을 넣어 만들었다. 내 손으로 기른 채소는 작고 못생겼지만 다른 것에 비할 수 없었다.
해거름 마당에서 캐치볼을 했다. 공을 잘 못 던지거나 빗나가기 일쑤에도 연신 웃어대는 아이 웃음소리가 해맑다. 다만 무더운 날씨 온몸이 땀에 젖었고 풀숲에 숨어있던 모기가 사납게 달려들어 여기저기 발갛게 부풀었다. 의욕을 잃은 나는 아이를 달래 집안에 들어갔다. 욕실에서 나오니 아이가 남편과 전화 통화를 한다. 구청 텃밭 관리자가 애지중지 키운 애호박 세 포기를 잘라 더 이상 기를 수 없다는 이야기였다. 사월 말 심을 때는 막지 않았던 데다 애호박 같은 덩굴 호박은 금지 작물이란 문자가 최근 한 번 통보되었을 뿐이라는 것에 크게 기분 상한 눈치였다. 사실 텃밭 입구에 금지 작물 안내 팻말이 있었으나 실제 벌어지리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팔구월 계속 수확할 수 있는 작물이라 나도 크게 아쉬웠다.
잠자리에 들기 전 나란히 앉아 오늘 일기를 썼다. 언젠가부터 덥다며 집안에서는 팬티만 입은 아이 배가 유난히 도드라졌다. 요 며칠 수족구병에 홀쭉해져 예전 같은 맑은 울림소리가 나지 않았다. 살이 빠진 거 같다며 문지르는 모양이 우스워진 지 한참 깔깔댔다.
7.25.(목) 맑음
구석구석 남해
이틀 전 아이는 바다 수영 후 온몸에 수포가 넓게 번졌었다. 이제는 조금씩 줄어드는 모양. 입맛은 여전히 없나 보다.
오전 집안일 하는 동안 아이가 공부를 마치도록 했다. 아이는 일곱 살까지 집에서 학습하지 않았다. 가까운 공부방에서 한글과 산수를 익히던 중 선생님이 코로나에 걸려 반년 정도 문을 닫게 되었다. 마침 육아휴직을 받은 남편이 가르쳐준다는 말에 아이에게 물었다. “야니야 다른 공부방 갈래? 아빠랑 공부할래?” 새로운 장소에 낯설어하던 아이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아빠랑 할게.” 돌이켜보면 좋은 선택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상당 기간 둘은 공부 시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아빠는 새로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힘겨워하는 아이를 다그치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때마다 아이는 감당하지 못해 굵은 눈물을 떨궜다. 지금은 어느 정도 습관을 들여 한 시간쯤 스스로 공부한다. 내 눈에는 노력하는 모습만으로도 대견하나 남편은 아직 성에 차지 않는 눈치, 휴일은 물론 긴 여행 기간에도 평소처럼 정해진 분량을 끝내길 바란다. 그걸 아는 아이는 제주와 강릉 한달살이 때처럼 읽기와 산수, 한자책을 펼치고 스스로 끝냈다.
아이와 남해 지도를 펼쳤다. 가고 싶은 장소를 골라 길 얽힘 없이 경로를 짜는 일은 제법 익숙해졌다. 지도와 내비게이션으로 쓸 아이 휴대전화 역시 챙겨 이틀째 둘만의 여행을 시작했다.
힐링빌리지(라키비움 남해)는 도서관, 기록관, 박물관을 한데 모아놓은 곳으로 곁에 카페와 빵집도 있다. 아이는 쿠키, 난 아이스커피를 사 들고 LP를 전시해 둔 공간에 앉았다. 평일 정오 시간 넓은 공간에 여전히 둘뿐이다. 전망 좋은 아늑한 실내가 마음에 들었다. 두 번째는 남해 가인리 화석 산지. 공룡 발자국 화석을 보러 가는 길, 아이는 내비게이션을 켜고 안내했다. 푸른 산과 들, 쪽빛 바다가 연이어 펼쳐진 길을 우리만 달려갔다. 세심사라는 절 근처부터는 더 이상 차로 갈 수 없어 내려 걸었다. 갓 지난 정오, 얼마 걷지 않아 땀이 주르륵 흘렀다. 둘만 선 넓은 유적지에 공룡 발자국을 보려 열심히 찾아다녔으나 분간하기 힘들었다. 그나마 용각류가 낸 큰 발자국은 선명했으나 작은 것들은 얕고 희미해 다른 짐승이 남겼는지, 비바람에 풍화된 자국인지 알 수 없었다. 아이가 남해군에서 두 번째로 고대한 장소는 뜨거운 햇볕과 더위에 곧 작별했다. 뮤지엄남해&동창선아트스테이는 동쪽 창선도에 있는 폐교를 개조해 만들었다. 시각예술, 조형, 설치 등 다양한 장르를 전시한 문화공간이다. 힐링빌리지와 유사한 데다 전시장이 작은 건물 1층 한 곳이라 빠르게 보고 나왔다.
어느덧 두 시가 넘었다. 먹고 싶은 음식을 물으니 군만두가 좋단다. 창선교 근처 수 메밀 짜장에 들어가 군만두와 짬뽕, 자장면을 하나씩 시켰다. 여러 가지를 맛보고 싶어 약간 무리하게 주문했는데 역시 입 짧은 나와 입맛 잃은 아들에게 많았다. 또 한 번 한 사람 빈자리가 느껴졌다.
다음은 독일마을. 도착해서 차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열기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가인리에서 진하게 더위를 맛본지라 땡볕 아래 다시 걸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곳은 다시 오기로 하고, 근처 바람흔적미술관으로 갔다. 전시물 교체 중이라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밖에서 사진을 찍고 가려는데 그곳에서 조각하는 아저씨가 마리오네트 인형을 들고 와 아이에게 보여주었다. 하릴없이 발길 돌리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한참을 설명했다.
남해 힐링숲타운에 갔다. 체험 거리가 다양한 생태문화 공간으로 산림휴양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마감은 다섯 시, 우리가 도착한 건 네 시 이십 분이었다. 보고 즐길 거리가 많아 보였으나, 폐장 시간이 가까워 나비생태관과 곤충 표본 전시관에 만족했다. 지도를 펼쳐 든 아이는 마지막으로 물미해안전망대에 가자고 한다. 원통형 건물은 등대를 본뜬 모양. 일 층은 특산품 판매장, 이 층에는 카페와 하늘 산책로가 있다. 겁이 많아 전망대 투명한 유리 길은 두고 옆 계단을 따라 내려가며 바다를 등 뒤로 한 장 담았다. 하지만 갑자기 만난 사람이 반가운 모기떼. 바다까지 가지 못하고 집에 돌아왔다. 오늘 찍은 영상과 사진을 하나로 모았다. 하루 동안 일곱 곳에 갔던 터라 짧지 않은 길이, 기억에 남을 만했다.
내일이면 남편이 온다. 단단한 문단속은 오늘까지면 되겠지 라며 문을 걸었다. 내일 도착하는 시간 묻는 문자를 보내자 휴대전화로 진하게 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같은 날 친구들도 가족과 함께 온다는데, 날씨 앱을 보던 아이가 주말에 계속 비 소식이 있다고 한다. 일기예보가 틀리길 바랐으나 밖에서 갑자기 빗소리가 들렸다. 낮은 덥고 내내 해가 쨍하더니 어느새 또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