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햇살, 그리고 작은 생명을 돌보는 한 계절
가을의 시작, 배추와 무를 심다
2019년 8월 말.
햇살은 아직도 여름의 기세를 꺾지 못한 채 따가웠다.
시골집 마당에 김장배추와 가을무를 심기로 마음먹은 날, 종묘상에 들러 배추 모종 서른 포기와 파란색 옷을 입은 무씨앗 한 봉지를 샀다.
퇴비도 필요했다. 유박이라 불리는 복합비료 20킬로짜리를 주문하니 사장님이 한마디 덧붙인다.
“토양살충제 꼭 하셔야 돼요. 배추엔 벌레가 금방 붙거든요.”
그 말을 듣고 살충제 한 봉지를 더 얹었다. 그렇게 여름 텃밭이 시작되었다.
삽과 괭이, 호미와 꽃삽까지 총동원해
퇴비와 살충제를 뿌리고 괭이질로 흙을 뒤집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밭에는 세 줄의 두둑이 가지런히 자리 잡았고, 그 위에 배추 모종을 지그재그로 심었다.
작지만 생명력 가득한 푸른 잎들이 뿌리를 내릴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무씨 앗은 반 평 남짓한 공간에 두둑을 만든 뒤 흩뿌렸다.
까꾸리로 살짝 흙을 덮었지만 파란 씨앗이 곳곳에 드러났다.
결국 손끝으로 하나하나 꾹꾹 눌러 흙 속에 묻어주었다.
작은 씨앗에게도 정성과 배려가 필요했다.
처음 물을 뿌렸을 때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둑이 너무 높아서인지 물줄기를 따라 흙이 흘러내렸고,
그 흙에 섞인 무씨 앗도 함께 떠내려갔다.
배추 모종 몇몇은 뿌리가 드러나 다시 심어야 했고,
유난히 작았던 포기들은 흙 위에 철퍼덕 붙은 채 일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배추는 기력을 되찾기 시작했고,
무는 어느 날 새파란 싹을 올려 밭을 초록으로 물들였다.
나는 시골집을 오가며 이틀에 한 번씩 물을 주었다.
텃밭은 손이 갈수록 살아났고,
그 속엔 작은 기쁨과 애정이 자라고 있었다.
이웃 밭을 기웃거리면
크게 만든 두둑에 듬성듬성 심은 무도 있었고,
좁은 골에 씨를 뿌려 살짝 흙을 덮어놓은 방식도 보였다.
방식은 달랐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만큼은 비슷해 보였다.
주말이면 아내는 솎아낸 가느다란 열무를 수돗물에 헹궈
고추장을 듬뿍 넣고 계란 두 개를 프라이해 함께 비볐다.
그 한 그릇이면 도시의 어떤 비빔밥도 부럽지 않았다.
입안 가득 시골의 여름 향기가 퍼지는 진수성찬이었다.
점점 자라는 배추는 벌레들에게도 매력적인 존재였나 보다.
어느 날부터 잎 곳곳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푸른 몸을 부풀린 배추벌레들.
토양살충제는 그들에게 무력했나 보다.
아내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배춧잎을 샅샅이 뒤졌다.
통통하게 살찐 벌레를 잡아 올리고는 죽이지 못해
멀리 던져버리곤 했다.
그날 이후 시골집에 올 때마다
우리는 배추벌레와 조용한 술래잡기를 했다.
어느 날 아내는 종이컵 하나 가득 벌레를 잡아 내게 건넸다.
나는 작은 구덩이를 파고 그 속에 벌레들을 묻었다.
흙으로 돌아가게 해주는
그 조용한 매장은 이상하게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무는 주먹만 한 크기에서 성장을 멈추었다.
파종이 늦었던 탓인지 거름이 부족했던 탓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단단하고 맛이 좋아 국물김치를 담그기엔 충분했다.
배추는 속이 꽉 차지는 않았지만,
쌈으로 먹기엔 아삭하고 고소해 도시 마트에서는 맛볼 수 없는 풍미로
가족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그해 가을, 우리는 벌레와 흙, 땀과 햇살이 빚어낸
소박하지만 값진 수확을 맞았다.
자연이 내어준 선물과 우리의 손길이 어우러진,
진정한 가을의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