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구트 꿈 백화점 시리즈 | 이미예
이 책을 읽기 전, 나는 도서물류 센터에서 잠깐 근무한 적이 있다.(우리 동네 저 변두리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큰 출판단지가 있어 출판, 인쇄, 도서물류 업종이 상당히 발달해 있다.) 입고검수 파트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요즘은 어떤 책이 잘 나가는지 알 수 있었다. 많이 들어온다는 건 그만큼 많이 나간다는 이야기니까. 2020년 말~2021년 초 즈음이었는데, 그 당시에 가장 많이 들어오던 책들 중 하나가 바로 <달러구트 꿈 백화점> 시리즈였다.
신비롭고 몽환적인 분위기의 표지, '주문하신 꿈은 매진입니다'라는 흥미로운 캐치프레이즈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굉장히 참신한 소재의 판타지 소설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책인데 이렇게 잘 나갈까?" 그렇게 한두 달 고생해서 번 돈을 들고 서점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 책은 베스트셀러 진열대에서도 가장 잘 보이는 곳에서 영롱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물론, 이 책을 구매하고 바로 읽을 수는 없었다. 며칠 안 돼서 개강을 했고, 졸업을 앞둔 나는 정신없는 한 해를 보냈다. 그 뒤로는 취업 준비하고 뭐 하고... 아무튼 이래저래 바쁘다는 핑계를 대기에 충분한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더 이상 바쁘다는 핑계를 댈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해지고 나서야 책장 저 모퉁이에서 영롱한 자태를 뽐내던 이 책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하루 중 대략 1/3은 잠들어 있다. 깨어있는 동안에는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즉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의식할 수 있다. 하지만 깨어있는 시간만큼이나 긴, 잠들어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이 시간을 상상으로 채워 넣을 뿐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이러한 상상에서 출발한다.
이쪽 세계 사람들의 옷차림은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는 좀 다르다. 대개 잠옷바람이거나, 목이 늘어난 티셔츠 등 내 집 안방에서 입을법한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수면양말이 인기를 끌면서 신발을 팔던 '레프라혼 요정'들의 매출이 반토막이 났다나 뭐라나. 종종 속옷바람으로 나타나는 손님들도 있다! '녹틸루카'라는 털북숭이들은 이들이 입을 가운을 가져다주거나 그 가운들을 수거해 깊은 동굴 속 빨래방으로 가져다주는 일을 한다. 꿈이라는 상품을 구매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것은 화폐가 아니라 '감정'이다. 어떤 꿈은 설렘이라는 감정을, 어떤 꿈은 자신감이라는 감정을, 또 어떤 꿈은 애틋함이라는 감정을 대가로 받는다. 각각의 감정들은 액체 형태로 지불되며 고유한 색을 가지고 있다.
작품의 전반적인 설정이 상당히 귀엽고 포근하며 편안하다. 마치 보송보송한 수면바지나 수면양말의 촉감 같다. 서사 또한 대체로 자극적이지 않고 무해하다. 주인공인 페니와 그 일행이 여기저기 다니며 소소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가 옴니버스 형식으로 진행된다. 격렬하게 요동치는 기승전결은 보이지 않는다.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기승전결의 경계가 흐릿하다. 몰입해서 읽다 보면 정말로 꿈속을 자유롭게 유랑하는 느낌마저 든다.
'꿈'이라는 세계관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꿈보다는 현실의 세계를 잘 살아가는 데 필요한 메시지들을 던진다. 각 장마다 소개되는 인물들의 사연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볼 수 있는 사람들의 사연이다. 장애를 가진 소년이 최고의 꿈 제작자가 되기까지 과정, 영감이 떠오르지 않는 예술가의 이야기,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는 사람들, 사별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나아가 2권에서는 페니가 근무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연봉 협상을 한다거나, 민원관리국과 판매 부서 사이의 이해관계 충돌(?), 꿈과 관련된 민원 처리 등 현실 세계에서 실제로 일어날법한 일들을 다루기도 한다.
... 나는 언제든지 해안가로 돌아갈 수 있는 범고래였다.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세상에서 이렇게나 열심히 헤엄치고 있다는 걸 그리운 해안가의 사람들도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지난 20년 동안 나의 세상은 깊고 넓어졌고, 나는 밤마다 돌아갈 수 있는 너른 해변을 가지고 있었다. (2권, 149p)
프롤로그에서 페니가 보고 있는 문제집의 답은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범고래가 되는 꿈'이다. 프롤로그를 비롯해 이야기 전반에 걸쳐 이 꿈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자, 여기서 잠깐. 자신이 태평양을 가로지르는 범고래가 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자유롭게 헤엄쳐 다닐 수 있는 '바다'를 '꿈'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고 언젠가는 내가 말라비틀어져 죽음을 맞이할 '해안가'를 '현실 세계'로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러구트 꿈 백화점>에서는 이 상투적인 비유를 한 번 뒤집는다. 오히려 해안가를 꿈의 세계로, 바다를 현실 세계로 비유하고 있다. 고래가 있어야 할 곳은 바다다. 해안가로 올라와 햇빛을 쏘이는 순간이 따듯하고 달콤할 수는 있지만 언제까지나 해안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고래가 해안가에 떠내려 온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잠들어 있고, 꿈꾸는 순간이 따듯하고 달콤할 수는 있지만 결국 우리는 더 깊고 넓은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야 한다. 지구 한 바퀴를 헤엄쳐 지치고 고단한 나에게 잠깐 쉴만한 해안가가 있다면, 더 멀리 힘차게 헤엄쳐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의 행복에 충실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아직 만나지 못한 행복을 위해 미래를 기대해야 하며,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행복을 위해 과거를 되새기며 살아야 한다. (2권, 285p)
<달러구트 꿈 백화점> 시리즈는 힐링 소설이다. 단꿈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들에게는 현실을 일깨우며 미래를 기대하게 해 주고, 현실에 치여 비틀거리는 이들에게는 달콤짭짤한 꿈으로 소중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을 되새기게 해 준다. 한편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을 헤쳐나가기조차 힘든 이들에게는 안식의 메시지를 전한다. 문득 모든 이야기들이 나에게 전하는 위로 같다는 기분이 들 때쯤, 어느덧 대단원의 막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