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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Sep 18. 2024

<양화소록> 서향화 한 구절을 자세히 읽다

<고금합벽사류비요/서향화/격물총론>

강희안姜希顔(1417~1465)의 <양화소록>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원예관련 문헌으로 유명하다. 노송老松, 만녕송萬年松(눈향나무)에서 석창포石菖蒲까지 16종의 식물을 다루고 있으며, 그 중 7번째가 서향화瑞香花이다. 이 서향화는 지금도 서향瑞香(Daphne odora)으로 불리는 꽃나무이다.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에서는 서향을, “중국산의 상록관목으로 남부지방에서 심고 있으며 높이가 1m에 달하고 원줄기는 곧으며 가지가 많고 튼튼한 갈색 섬유가 있다. 잎은 호생하며 타원형 또는 타원상 피침형이고 예두銳頭 또는 둔두鈍頭이며 예저銳底이고 길이 3~8cm로서 가장자리가 밋밋하다.”라고 설명한다.


서향, 2023.2.25 화성 우리꽃식물원 온실


백서향, 2018.11.10 제주도 청수곶자왈


이 서향은 이색李穡(1328~1396)의 목은집 등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에는 우리나라에 도래한 듯하다. 우리나라의 제주도와 서남해 섬지방에 서향과 유사한 백서향나무(Daphne kiusiana)가 자생하고 있지만, 아마도 조선시대 문인들이 노래한 서향화는 중국 원산의 꽃나무일 것이다. 이 서향에 대해 강희안은 서향화에 대해 중국문헌 <고금합벽사류비요>를 인용하여 설명한 부분이 있다. ‘격물론格物論’으로 시작하는 이 인용문의 식물명은 모두 중국에서 통용되는 이름일 터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아래 인용문을 뜻을 헤아려 본다.*



“格物論 瑞香 樹高三四尺 枝幹婆娑 葉厚深綠色 有楊梅葉者 有枇杷葉者 有柯葉者 有毬子者 有欒枝者 花紫如丁香 惟欒枝者香烈 枇杷者能結子 (격물론 서향 수고삼사척 지간파사 엽후심록색 유양매엽자 유비파엽자 유가엽자 유구자자 유난지자 화자여정향 유난지자향열 비파자능결자)”**



일종의 백과사전인 <고금합벽사류비요>에서는 각 항목을 설명할 때, ‘격물총론格物總論’, ‘사류事類’, ‘시집詩集’ 등의 소제목을 두고 있다. ‘격물총론’ 부분에서 대상 항목의 특성을 소개하고, ‘사류’ 부분에서 산문 전고들을 인용하고, ‘시집’ 부분에서는 관련된 각종 시를 인용한다. 위 인용문의 격물론格物論은 격물총론을 말하며, 책 이름은 아니다. 길이 척도 척尺은 대략 30.3 cm이다. ‘파사婆娑하다’는 가볍다, 가냘프다, 약하다, (소리가) 꺾임이 많다 등 여러가지 뜻이 있지만, 서향 나무의 가지와 줄기를 묘사하고 있으므로 ‘가냘프다’ 혹은 ‘약하다’ 정도가 좋을 것이다.


소귀나무 (양매), 2020.11.14 서귀포
비파나무, 2024.3.16 여수 금오도


양매楊梅는 우리나라 제주도에도 자생하는 소귀나무(Myrica rubra)이다. 비파枇杷는 지금은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남부지방에서 재배하는 비파나무(Eriobotrya japonica)이다. 가엽柯葉의 뜻은 무엇일까? 줄기와 잎을 뜻할까? <강희자전>에 의하면, 가柯는 도끼자루(斧柄), 창 끝(槍梢), 법(法), 가지(枝), 풀 줄기(草莖), 바리(盂), 지명, 성(姓), 나무 이름(木名) 등을 뜻한다. 여기에서는 문맥으로 보아 나무 이름으로 보인다. <중약대사전>에 의하면 가수柯樹는 Lithocarpus glaber이다. 이 나무는 중국과 일본, 대만에 자생하는 상록 교목으로 우리나라 남부지방의 구실잣밤나무와 비슷하다.


구실잣밤나무, 2018.11.25 제주도 서귀포
모감주나무, 2021.7.10 성남


구자毬子는 둥근 공 모양의 열매를 뜻할 것이다. 난지欒枝는 무엇일까? 난欒의 뜻을 살펴보면, 나무이름, 파리한 모양(瘠貌), 종구鐘口의 양각兩角, 굽은 상인방(曲枅) 등이다. <중약대사전> 등은 난수欒樹를 모감주나무(Koelreuteria paniculata)라고 했다. 하지만, 관목인 서향 가지를 소교목인 모감주나무 가지에 비유했을 것 같지는 않다. 여기에서는 바로 앞의 ‘둥근 열매(毬子)’와 대구를 이루어 ‘굽은 가지(欒枝)’ 모양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즉 서향화를 잎과 열매, 가지 모양으로 분류하여 5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정향丁香은 향료로 쓰는 정향나무(Syzygium aromaticum)의 꽃봉우리를 말린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화자여정향花紫如丁香’은 ‘꽃은 정향과 같이 자주색’으로 번역할 수도 ‘꽃은 자주색이며 (그 모양이) 정향과 비슷하다’로도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서향의 꽃 색을 표현하기 위해 정향과 비교했을 가능성 보다는 서향의 꽃 모양을 정향과 비슷하다고 했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백서향, 2023.3.1 황학산수목원
서향, 2023.3.1 황학산수목원 - 이 서향꽃의 꽃받침통이 길어서 정향과 비슷한 모양이 된다.


<고금합벽사류비요>에 수록된 서향화 항목의 격물총론 부분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다. “格物總論 瑞香 樹高三四尺 枝幹婆娑 葉厚深綠色 數種有楊梅葉者 有枇杷葉者 有柯葉者 有毬子者 有欒枝者 花紫如丁香 惟欒枝者香烈 枇杷葉者能結子(격물총론 서향화 수고자삼사척허 지간파사 엽후심록색 수종유양매엽자 유비파엽자 유가엽자 유구자자 유난지자 화자색여정향 유난지자향열 비파엽자능결자).”*** <양화소록> 인용문과 비교해보면 사이 사이에 몇 글자가 추가되어 있어서 문맥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또한 <양화소록> 인용부 다음에 “따뜻한 곳을 좋아한다. 본조(송 시대)에서 비로소 이름이 드러났다. 다른 것으로는 노란색과 흰색이 있다. 특히 들에 자라는 서향은 취할 게 없다.”****가 추가되어 있다. 이 부분도 참고할 만하다. 이제 전체를 가급적 직역 투로 번역해본다.



“격물총론. 서향 나무는 큰 것이 대략 90~120 cm이며, 가지와 줄기는 가냘프다. 잎은 두껍고 짙은 녹색이다. 소귀나무 잎 같은 것, 비파나무 잎 같은 것, 가수柯樹 잎 같은 것, 둥근 열매가 있는 것, 굽은 가지가 있는 것 등이 있다. 꽃은 자주색이고 정향丁香 비슷하다. 오직 굽은 가지가 있는 것이 향이 강하고, 비파나무 잎 같은 것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서울에 사는 조선시대 문인들이 서향 향기를 맡자면 정성을 여간 기울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했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는 상록수이니 서울에서 키우자면 화분에 심어 겨울에는 방 안에 들여놓아야 했을 것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선비들이 서향 기르는 방법을 알지 못해 많이들 말라 죽게 했나 보다. 서향을 몹시도 사랑했던 강희안은 이를 안타까워하면서 서향 재배 기술을 터득하여 <양화소록>에 자세히 기록했다. 또한 강희안이 재배했던 서향은 앵두 같은 열매가 달렸다고 하니, 아마도 "굽은 가지"에 "비파나무 잎 같은" 서향이 아니었을까?


천리향으로도 불리는 서향, 2024.3.16 여수 금오도


나는 중부지방에서 식물원 온실에서만 서향을 감상하다가 2024년 3월 여수 금오도 여행에서 정원에 심어진 만개한 서향을 만났다. 서향을 천리향이라고도 하는데, 남쪽 지방 정원의 서향 꽃은 향기가 더 좋은 듯했다. 가지는 가늘고 조금씩 굽어 있다. 잎은 소귀나무, 비파나무, 가수 중 무엇과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비파나무 잎 보다는 소귀나무 잎과 더 비슷하니 열매는 맺히지 않을 수도 있다. 실제로 서향은 양성화가 피지만 근래에 우리나라에서 재배하는 서향은 대부분 임성이 없어서 열매가 없다고 한다.***** 아쉽게도 아직 나는 백서향 꽃도 자생 상태에서 만나지 못했다. 남도의 이른 봄 숲 속에 풍기는 백서향 향기를 맡고 싶구나!

<끝>


*이 글의 번역은 이종묵 역해 <양화소록 – 선비, 꽃과 나무를 벗하다>(아카넷, 2012)와 서윤희/이경록 옮김 <양화소록>(눌와, 2024)를 참조했다.

** 서윤희/이경록 옮김 <양화소록>(눌와, 2024), 부록 - 양화소록 영인 원문 p.28.

*** https://ctext.org/zh

****格物總論 瑞香花 樹高者三四尺許 枝幹婆娑 葉厚深綠色 數種有楊梅葉者 有枇杷葉者 有柯葉者 有毬子者 有欒枝者 花紫色如丁香 惟欒枝者香烈 枇杷葉者能結子 性喜溫潤 本朝始著名 它有黄白二色 特野瑞香無取也 – 고금합벽사류비요/서향화

***** (2024.9.20 추가) 식물학자이신 페친 이선생님께서 주신 의견을 반영하여 수정한다. "D. odora 는 암수딴그루가 아니고 양성화입니다. 다만 근래에 흔히 재배되는 타입들은 이수체(aneuploid)라 임성이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 (2024.9.20) 이선생은 "정향은 Syringa spp. 를 일컫는 것일 수도 있을 듯 합니다. Daphne spp. 도 Syringa spp. 처럼 대개 화관통부가 길고 화관이 네 갈래로 갈라져 화형이 유사하니 말입니다."라는 좋은 의견을 주셨다. 정향은 약재로 옛날부터 쓰여왔는데, 연한 자색 꽃이 피는 우리나라의 털개회나무(Syringa patula)를 '정향나무'라고 부르기도 하고, <중국식물지>에 따르면 Syringa oblata Lindl.을 紫丁香 혹은 丁香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마 Syringa속의 꽃 모양이 정향을 닮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丁香이 Syringa spp.의 꽃나무 이름을 지칭하기도 하므로 송대 문헌인 <고금합벽사류비요>의 정향 용례를 더 검토해야겠다.

++(2024.11.29) <고금합벽사류비요>에서 정향丁香의 용례를 살펴보았다. 몇 곳에 등장하지만, 다음과 같이 향료 ‘계설향雞舌香’을 설명하는 부분에서 식물명을 추정할 근거를 발견했다. “계설향雞舌香. 일명 정자향丁子香. 그 모양이 정자향丁子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곧 정향丁香의 큰 것이다. 지금 정향모丁香母라고 부르는 것이다 (雞舌香 一名丁子香 以其形似丁子香也 即丁香之大者 今謂丁香母是也).” 계설향, 정자향은 모두 Syzygium aromaticum의 꽃봉우리를 말린 향료를 가리키므로, 양화소록에서 인용한 부분의 정향도 이것을 말할 가능성이 높다.

+서향, 2023.3.1 여주 황학산수목원 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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