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필기류 문헌의 식물 (1)
곧은 나무가 먼저 베어짐을 싫어하여
몸을 굽혀 자란 듯하지만
곧은 성질은 안에 있나니
어찌 도끼를 피할 수 있으랴
(似嫌直先伐 故欲曲其身 直性猶存內 那能免斧斤)
박수량朴遂良(1475~1546)의 『삼가선생집三可先生集』에 실려있는 ‘충암 김정의 척촉장 시에 화답하다 (和金冲菴淨躑躅杖詩)'라는 시이다. 척촉躑躅은 철쭉(Rhododendron schlippenbachii)이니, 척촉장은 철쭉으로 만든 지팡이이다. 철쭉은 관목으로 구불구불 자란다. 진달래에 비해서 더 크게 자라고 단단하다. 울퉁불퉁 자란 고목 줄기는 여간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박수량은 철쭉이 곧게 자라지는 않지만 단단한 성질 때문에 도끼에 잘려 지팡이로 만들어진 상황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충암冲庵 김정金淨(1486~1521)은 금강산 유람길에 스님으로부터 철쭉 지팡이 2개를 얻어 돌아오는 길에 그 중 한 개를 박수량에게 주었다. 이때 김정이 지은 시에 대해 박수량이 화답한 것이다. 『충암집』에 ‘지팡이를 주다 (贈杖)’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 김정의 원시는 다음과 같다.
옥 같은 1만 층층 벼랑 속에서
늦가을 서리와 눈 견뎌낸 가지를
지니고 와서 군자에게 주노니
늙도록 이 마음 기약하세나!
(萬玉層崖裏 九秋霜雪枝 持來贈君子 歲晩是心期)
얼마 전 나는 17세기 문인 신명규申命圭(1618~1688)가 쓴 필기인 『묵재기문록』 강독 시간에 이 시를 만났다. 김정과 박수량이 강릉에서 철쭉지팡이에 대한 시를 주고 받은 후 김정은 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1521년 사사되었다. 기묘사화는 조광조趙光祖, 김정金淨, 김식金湜 등 사림파의 신진 선비들이 남곤南袞, 심정沈貞, 홍경주洪景舟 등 훈구파에 의해 화를 입은 사건이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정치를 추구했던 사림파가 중종 반정공신 중 자격이 없는 사람들의 위훈僞勳 삭제를 주장하자, 훈구파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후 이것을 빌미로 사림파를 일거에 제거했다. 이때 사림파의 일원으로 화를 입거나 은거한 사람들을 ‘기묘명현’이라고 하며, 사림파의 후예들이 오래오래 존숭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박수량이 “곧은 성질은 안에 있나니, 어찌 도끼를 피할 수 있으랴”라고 읊은 것은 김정의 미래를 암시한 것이라고 하여 후배 문인들에게 회자되었던 듯하다. 『묵재기문록』에서는 “삼가 박수량은 기묘명현으로 화를 피하신 분이다. 이분의 시를 음미하자니 충암 김정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아는 듯하니, 읊조리자니 눈물이 난다.”*라고 적고 있다.
이수광李睟光(1563~1628)의 『지봉유설』에서는 글자의 출입은 있지만 박수량의 시를 인용하고 나서 “대개 화를 피하라고 경계한 것인데 충암은 마침내 피하지 못했으니 애석하도다.”**라고 했다. 허균許筠(1569~1618)의 『성소부부고』 ‘설부說部’에도 김정의 시가 수록되어 있고, 이긍익李肯翊(1736~1806)의 『연려실기술』의 ‘기묘당적己卯黨籍’에서는 허균의 기록을 재수록했다.
『충암선생연보』에 따르면 김정은 31세되던 병자년(1516) 가을에 금강산 유람을 했다. 돌아오는 길에 강릉에 살고 있던 박수량朴遂良을 방문하며 철쭉지팡이와 시를 써주었다. 당시의 자세한 정황을 『연보』에서 살펴본다.
“선생은 그가 어질다는 소문을 듣고, 풍악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의 집을 방문했다. 집은 매우 가난하여 (박수량은) 품팔이들 사이에서 손수 새끼를 꼬고 있었다. 선생은 처음에 그가 주인인 줄 몰랐다. 말을 나누면서 그가 마음에 온축한 것이 있음을 알았다. 마침내 옛 친구를 만난 듯 마셨는데, 질그릇 술병에 나물 안주였다. 이틀 밤을 묵으며 한껏 놀다가 돌아왔다. 헤어질 때에 철쭉지팡이와 시를 주었다.”***
기묘명현으로 일컬어지는 사림파 신진 김정은 박수량과 철쭉지팡이를 매개로 시를 주고받은 다음 5년 뒤에 참혹하게 사사되었다. 기묘사화가 일어나기 전, 아직은 중종이 사림파를 등용하고 있던 1516년경, 사물에 호기심이 많고 유람을 좋아하는 젊은이로서 박수량을 만났을때의 김정을 상상해본다. 당시 박수량은 42세로 김정보다 10여년 선배이다. 연보의 내용으로 보아 서로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이 때 처음 만났을 가능성이 크다. 이틀간 유숙하면서 사림의 일파로서 서로 품은 뜻을 펼쳤을 것이다. 김정이 시를 지어 박수량을 ‘군자君子’로 칭하면서 우리 뜻을 늙도록 굽히지 말자고 다짐한다. 죽을지언정 소인은 되지 말자고 다짐했으리라. 이렇게 굳은 뜻을 가진 김정을 아끼는 마음으로 벼슬을 버리고 은거한 10년 선배 박수량은 “곧은 성질은 안에 있나니, 어찌 도끼를 피할 수 있으랴!”라고 은유하면서 부디 곧은 마음은 지키되 화를 입지는 말라는 뜻을 간곡하게 화답시에 담았을 것이다.
김정은 『제주풍토록』을 저술하면서 제주도와 남부 해안지방에만 자라는 멀꿀(Stauntonia hexaphylla)을 다음과 같이 처음으로 ‘멍’이라는 우리말 고어를 사용하여 기록한 인물이다.
““산의 과실로 말응末應(멍)이 있는데, 열매는 크기가 모과(木瓜)와 같다. 껍질은 검붉은 색이며, 쪼개보면 씨앗이 임하부인林下夫人 같지만 좀 더 크고 맛이 더 진한 것이 다른 점이다. 대개 임하부인 종류지만 더 큰 것이다. 해남 등지의 해변에 간혹 있다고 들었으나, 믿을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하늘이 김정에게 수를 허락하여 이런 호기심과 기록 정신을 더 발휘하게 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김정이 남긴 유산을 더 많이 볼 수 있었을 터이다. 곧음을 지켜 군자가 되고자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 김정이 애석하다. (끝)
* 三可亦己卯名流 而能免於禍者 味其詩 若知冲老之不能脫禍 諷之可涕 – 묵재기문록
** 朴雙閑守良江陵人 以龍宮縣監 退隱于鄕 金冲庵自楓嶽往訪 以躑躅杖幷詩贈之曰 萬玉層巖裡 九秋霜雪枝 持來贈君子 歲晩是心知 公和贈曰 似嫌直先伐 故爲曲其根 直性猶存內 那能免斧斤 蓋戒其避禍 而冲庵竟亦不免 惜也 – 지봉유설
*** 訪朴君擧 遂良 于江陵. 先生聞其賢 自楓嶽歷路訪其家 家甚貧 手綯索 雜於傭保 先生初不知其主人 及語知其所蘊 遂班荊而飮 瓦尊菜蔌 信宿極歡而還 臨別 以躑躅杖留贈以詩 – 충암선생연보
**** 有山果末應멍 實大如木瓜 皮丹黑 剖之子如林下夫人而異 子差大 味差濃 蓋林下夫人之種而大者耳 聞海南等邊海處或有之 未知信否 - 濟州風土錄
+표지사진 - 철쭉 꽃 (2020.4.18 남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