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옥 ‘중흥유기’ 초목 1칙의 식물 해설과 노간주나무樅

조선시대 필기류 문헌의 식물 (3)

by 경인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소품체 문예 작품 창작에 매진한 문필가로 이옥(李鈺, 1760~1815)이 있다. 문체반정 정책에 배치되는 작품을 썼다고 하여 정조로부터 유일하게 실질적인 처벌을 받은 불우했던 문인이다. 그러나 이옥은 지금 읽어봐도 신선하고 사실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뛰어난 작가인데, 그 중에 소품체 기행문으로 중흥유기重興遊記가 있다.* 이옥이 김려金鑢(1766~1822) 등 친구들과 함께 1793년 가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북한산 노적봉 아래에 있던 중흥사 일대를 돌아본 후 쓴 짧은 산수유기이다. 이 글에 이옥이 북한산 중흥사 주변에서 본 식물을 기록한 ‘초목艸木’ 두 꼭지가 있다. 그 중 첫째 꼭지를 읽어본다.


“불전 앞에는 금봉화金鳯花, 계상화鷄箱花, 홍고랑초紅姑娘艸, 황규화黄葵花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 당국唐菊 같은 것은 곳곳에 심어져 있는데, 꽃은 붉거나 희거나 자줏빛의 세 가지 색깔이었다. 산을 에워싼 것은 모두 소나무(松)였다. 절 부근에는 종樅과 자단紫檀 나무가 많고, 시내를 따라서는 혹 위성류(檉)와 상수리나무(橡), 밤나무(栗)가 민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잡목은 이름을 모르는 것이 많았다.”**


금봉화는 봉선화(Impatiens balsamina)이다. 계상화鷄箱花는 문헌에서 찾을 수 없는데, 아마도 계관화鷄冠花를 뜻하는 듯하다. 계관화는 맨드라미(Celosia cristata)이다. 홍고랑초는 꽈리(Physalis alkekengi)이다. 이옥이 참고했던 『한청문감』에 “홍고랑紅姑娘 꼬아리”가 수록되어 있다.


식물명실도고의 장국(해바라기)와 추모란(대상화) 그림


이덕무李德懋(1741~1793)의 『앙엽기』에서는 해바라기(Helianthus annuus)를 황규黄葵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아메리카 원산의 해바라기는 동양에 도입된 후 장국丈菊 또는 향일규向日葵로 불리었다. 『한청문감』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규화를 뜻하는 ‘서번규화西番葵花’가 수록되어 있는데, “줄기는 대나무 같고 꽃은 접시(楪) 같은데 황색이다.”***라고 설명했다. 아마 해바라기일 것이다. 한편 황규黄葵는 황촉규黃蜀葵의 별명으로도 많이 사용되었으므로, 여기에서는 닥풀(Abelmoschus manihot)을 뜻하는 듯하다. 만약 18세기 말 북한산성 안 중흥사에 아메리카 대륙에서 전해진 해바라기가 많이 심어져 있었다면, 사물에 관심이 많았던 이옥은 이 새로운 꽃에 대해 세심한 기록을 남겼으리라.


『큰사전』에서 당국화唐菊花를 ‘과꽃’으로 설명하면서, 대개 당국唐菊을 과꽃으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당국은 추모란秋牡丹일 가능성이 더 크다. 18세기 말에 당국으로 불린 화훼가 잎이 모란 잎을 닮은 추모란임을 추사 김정희선생이 읊은 바 있다. 추모란은 현재 추명국, 혹은 대상화(Anemone hupehensis var. japonica)로 부른다. 이옥의 『백운필』 담화(談花)를 보면, ‘수국綉菊’를 설명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수국을 ‘당국唐菊’ 혹은 ‘서번국西蕃菊’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이를 봐도 당국이 과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과꽃은 우리나라 북부지방에 자생하는 꽃인데, 이를 서번국으로 부를 이유는 적을 것이다.****


흰색, 붉은색 대상화 (2023.10.22 성남시청 정원)


이제 이옥이 종樅과 자단紫檀으로 표기한 북한산의 나무가 무엇인지 살펴볼 차례이다. 종樅은 일본에서 전나무 류인 Abies firma를 뜻하는 글자여서 대개 전나무로 이해하는 경우가 많으나 중국에서는 향나무를 가리킨다. 그리고 전나무는 중부 이북의 높은 산지에 자라며, 현재 북한산에는 전나무가 자생하지 않으므로 전나무는 아닐 것이다. 창덕궁 봉모당 뜰에 있는 천연기념물 향나무를 ‘종樅’으로 표기한 사례가 있어서,***** 이옥이 이 글자로 향나무를 뜻했을 가능성도 있으나, 자단紫檀으로 향나무를 표기했을 가능성도 있어서 종樅이 무엇인지 확정하기가 쉽지 않다.


북한산 노간주나무 (2017.8.5)

그러나 이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백운필』의 담목(談木)에는 이옥이 침엽수를 구분하는 흥미로운 글이 있는데, 이 글에서 “향나무(香木)은 자단紫檀이다. 노간주나무(老家材)는 종樅이다.”라고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물명에 관심이 많았던 이옥은 종樅을 노간주나무로 이해했던 것이다. 당시 절 근처에 노간주나무들이 자생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고, 향나무는 아마도 조경용으로 심은 것일 터이다.


이렇게 한자로 표기한 식물명은 필자에 따라 다른 식물을 가리킬 경우가 많아서, 그 실체를 밝히는 것이 쉽지 않지만 다행히 중흥유기의 식물은 이옥의 다른 글을 통해 대강 추정할 수 있었다. 아울러 중흥유기 초목 1칙은 북한산이라는 특정 지역에 자라는 나무 중, 종樅으로 노간주나무를, 자단紫檀으로 향나무를 표기한 명확한 사례를 담고 있어서 옛글의 식물명 탐구에 큰 도움이 된다.


이제 중흥유기 초목 1칙에서 이옥이 한자명으로 불러주었던 북한산의 식물 11종을 다시 우리말로 불러보자. 금봉화金鳯花는 봉선화, 계상화鷄箱花는 맨드라미, 홍고랑초紅姑娘艸는 꽈리, 황규화黄葵花는 닥풀, 당국唐菊은 대상화, 송松은 소나무, 종樅은 노간주나무, 자단紫檀은 향나무, 정檉은 위성류, 橡은 상수리나무, 율栗은 밤나무. 이를 바탕으로 초목 1칙을 다시 읽어본다.


“불전 앞에는 봉선화, 맨드라미, 꽈리, 닥풀이 많이 심어져 있었다. 대상화 같은 것은 곳곳에 심어져 있는데, 꽃은 붉거나 희거나 자줏빛의 세 가지 색깔이었다. 산을 에워싼 것은 모두 소나무였다. 절 부근에는 노간주나무와 향나무가 많고, 시내를 따라서는 혹 위성류와 상수리나무, 밤나무가 민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잡목은 이름을 모르는 것이 많았다.”



이 외에도 북한산에는 이옥이 잡목(雜木)으로 표현하면서 이름을 불러주지 못한 수많은 멋진 나무들이 있다. 2023년 12월 9일 식물애호가들과 함께 북한산을 오르며 감상하고 사진으로 남겼던 잡목들을 나열해본다. 물오리나무, 작살나무, 팥배나무, 생강나무, 참회나무, 귀룽나무, 개암나무, 붉나무, 산초나무, 벚나무, 노린재나무, 땅비싸리, 다릅나무, 철쭉, 갯버들, 조록싸리, 누리장나무, 왕머루, 광대싸리, 국수나무, 회나무, 개옻나무, 병꽃나무, 미역줄나무, 물푸레나무, 참빗살나무, 털갈매나무, 신갈나무, 털개회나무, 진달래, 산딸나무, 당단풍나무, 까치박달, 화살나무, 쥐똥나무, 산사나무, 층층나무, 고로쇠나무, 덜꿩나무, 사위질빵, 참개암나무, … 북한산은 잡목으로 취급하기엔 너무도 아름다운 이 나무들이 소나무, 노간주나무 등 침엽수들과 어우러져 생명의 향연을 벌이는 곳이다. (끝)


*완역이옥전집 2,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기고 엮음, 휴머니스트, 2009. (초목1칙 번역 참조했음)

** 佛殿前 多萟 金鳯花 鷄箱花 紅姑娘艸 黄葵花 若唐菊在在植 花紅白紫三色. 環山皆松 近寺多樅與紫檀木 沿溪或檉橡栗繞人居 雜木多不可名. – 중흥유기 초목2칙 중

*** 西番葵花 莖似竹 花如楪而色黃 – 한청문감

**** “추사 선생이 노래한 추모란, 당국唐菊이 과꽃일까? - 대상화待霜花, 추명국秋明菊, 추모란秋牡丹”(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77) 참조. (화훼에 밝으신 페친 이문규 선생이 꽃의 번식 특성으로 보아 당국은 과꽃일 가능성이 더 크다는 의견을 주셨다. 당국, 추모란이 과꽃인지 대상화인지 아직 확증하기 어렵다.)

***** “창덕궁 향나무와 '이문원노종기(摛文院老樅記)'”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159) 참고

+표지사진: 노간주나무 (2021.4.4 청계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