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화待霜花, 추명국秋明菊, 추모란秋牡丹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 선생이 세한도에서 그린 송백松柏, 즉 소나무와 측백나무를 보고 있노라면, 매서운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굳센 군자의 기운이 느껴지지만, 아울러 따뜻한 이미지의 수선화도 떠오른다. 세한도를 그렸던 제주도의 유배지 근처에서 추사 선생이 지천으로 들판에 피어나는 수선화를 보고 놀라워하는 글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수선화를 농사를 방해하는 잡초로 여겨 마구 캐내고 소 꼴로 먹였다고 하는데 이를 아쉬워하는 편지 글에서였다. 추사는 수선화에 대한 사랑을 편지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시로 읊기도 했다.
一點冬心朶朶圓 송이 송이 둥근, 한 점 겨울 마음
品於幽澹冷雋邊 고요하고 한많은 변방에서 기품 있구나!++
梅高猶未離庭砌 매화가 고상해도 뜰 섬돌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淸水眞看解脫仙 맑은 물에서 진실로 해탈한 신선을 보는구나.
추사 선생은 수선화 뿐 아니라 각종 화초를 감상하고 시로 남겼다. <완당전집>에는 영산홍映山紅, 백일홍百日紅, 매화, 국화, 난초, 계관화鷄冠花 등을 읊은 시가 실려있다. 그 중에는 이름만 봐서는 언뜻 무슨 꽃인지 알기 어려운 추모란秋牡丹 이라는 시도 한편 있다.
紅紫年年迭變更 붉은 색, 자주색 꽃이 해마다 바뀌어 피니
牡丹之葉菊之英 모란 잎 모양에 국화 꽃 모양일세
秋來富貴無如汝 가을이면 그대만큼 부귀한 것 또 있으랴
橫冒東籬處士名 뜻밖에도 동쪽 울타리 처사 이름을 빌려 쓰고 있구나!
이 시에는 “추모란秋牡丹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국唐菊이라 부른다”*라는 주석이 붙어 있다. 동진東晉의 처사處士 도연명陶淵明이 국화를 좋아해서 “동쪽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고, 하염없이 남산을 바라보네 (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유명한 시를 읊었기 때문에 ‘동쪽 울타리 처사’는 국화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 시 결구의 뜻은 모란 같은 부귀한 꽃에 ‘국화’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것이리라. 아무튼, 이 추모란秋牡丹과 당국화唐菊花를 <우리말 큰사전, 어문각-1991>에서 ‘과꽃(Callistephus chinensis (L.) Ness)’으로 설명하고 있고, <조선식물향명집>을 주해한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 등 일부 문헌에서도 과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모란 잎 모양에 국화꽃 모양일세”라는 추사의 시 구에서 보듯이, 당국唐菊의 잎은 3출엽 혹은 2회 3출엽인 모란 잎 모양이므로, 단엽인 과꽃과는 확실히 다르다. 그러므로 당국唐菊이 과꽃이라는데 대해서는 의문이 생길 수 밖에 없다. 우선, 추사 선생의 시에서 알 수 있듯이 1800년대 당시 당국唐菊은 추모란을 가리키는 우리나라 이름이었다. 19세기 학자 이규경(李圭景 1788~1860)은 당시 민간에서 당국唐菊이라고 부르며 경향 각지에 심는 화초의 이름을 고증하기 위해 ‘당국唐菊 변증설辨證說’이라는 글을 썼다. 그는 이 화초가 중국에서 들여와 심었기 때문에 당국이라고 부르지만 <본초강목>에도 나오지 않고, 초목에 박학다식한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진짜 이름은 모르는 꽃이라고 했다. 아쉽게도 이규경은 당국唐菊이 추모란임은 몰랐던 듯하다.
추모란秋牡丹은 <본초강목>에는 나오지 않지만, <군방보>에는 “초본草本으로 두루 땅으로 덩굴을 벋는다. 잎은 모란 같은데 조금 작다. 꽃은 꽃술이 노란 자학령紫鶴翎과 비슷하다. 가을 빛이 적요寂寥할 때 꽃 사이에 몇 포기 심으면 가을 치장으로 볼 만하다. 나누어 심어도 쉬이 살며 기름진 땅은 더욱 좋다”***라는 내용으로 실려 있다. <삼재도회>에도 “두루 땅으로 덩굴을 벋는다. 잎은 모란을 닮았다. 꽃이 피면 엷은 자주색에 노란 꽃술이다. 뿌리를 나누어 심는다”****라는 설명과 함께 추모란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삼재도회>의 그림을 보면 복엽 모양의 잎 모양이 단엽의 과꽃과는 확연히 다름을 알 수 있다. <중약대사전>이나 <중국식물지>는 추모란을 우리가 ‘대상화待霜花’, 혹은 ‘추명국秋明菊’으로 부르는 Anemone hupehensis var. japonica로 설명한다.
우리나라 문헌으로, 유희(柳僖 1773~1873)의 <물명고>는 추모란秋牡丹을, “냄새가 조금 나는 풀이다. 9월에 국화보다 먼저 핀다. 자주색 홑꽃이다. 잎은 모란 비슷하지만 모란이 아니고 대개 국화 종류이다. ‘당구화’. 동국에서 나는 것에는 붉고 흰 여러 색이 있다”*****라고 설명했다. 이 <물명고>의 설명은 <군방보>나 <삼재도회>와 비슷하지만 더 구체적이다. 이 추모란을 민간에서 ‘당구화’라고 불렀는데, ‘당구화’는 당국화唐菊花의 우리말 발음일 것이다. 신위(申緯 1769~1845)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와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가오고략嘉梧藁略>도 <군방보羣芳譜>의 추모란牡丹草 설명을 인용하면서 추모란을 우리나라에서 당국으로 부른다고 했다. 이와 같이 여러 문헌에서 당국唐菊을 추모란이라고 했고, <군방보>를 인용하면서 잎이 모란 비슷하다고 했으므로, 당국은 과꽃이 아니라 대상화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한편, 황필수(黃泌秀 1842~1914)는 <명물기략名物紀畧>에서, ‘당국唐菊’을 “곧 해아국孩兒菊이다. 각각의 색이 있다”******고 했다. 해아국은 <중약대사전>에서 등골나물 류인 Eupatorium fortunei Turcz로 보고 있으므로, 황필수는 당국으로 과꽃이나 대상화가 아닌 다른 화초로 본 듯하나 확실치는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현재 우리는 당국唐菊을 과꽃으로 이해하게 되었을까? 우선 근대 식물분류학자들이 저술한 문헌을 살펴보면,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과 1949년 <조선식물명집-초본편>은 대상화를 싣지 않았으며, 과꽃은 실려있으나 한자명을 기록하지는 않았다. 그 후, 정태현의 1956년 <한국식물도감-하>에도 대상화는 실려있지 않다. 하지만, 과꽃에 대해서는 ‘남국藍菊’이라는 한자명을 채록했다. 대상화가 기록된 최초의 식물분류학 문헌은 박만규朴萬奎가 편찬하여 1949년에 간행한 <우리 나라 植物 名鑑>이다. 이 책에는 “미나리아재비科 Anemone Sieboldi Honda, 대상화, 栽培(南部) シウメイギク 待霜花”*******라고 기록되어 있다. 과꽃에 대해서도 “국화科 Callistephus chinensis Ness 과꽃, 北部, エゾギク 翠菊(觀)”으로 실려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1947년에 초판이 발행된 <한글학회 지은 큰사전-2>는 ‘당구화’와 ‘당국화(唐菊花)’를 ‘과꽃’이라고 설명한 점이다. 즉, 해방 전후로 식물학자들은 과꽃의 한자명을 취국翠菊이나 남국藍菊으로 보았고, 당국唐菊에 대해서는 명확한 의견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국어학자들은 당국을 과꽃으로 확정했던 것이다. 그 후, 1957년에 초판이 발행된 <한글학회 지은 큰사전-5>에서도 추모란을 과꽃으로 설명하게 된다. 이 후 대부분의 국어사전과 고어사전은 당구화, 당국, 당국화, 추모란을 ‘과꽃’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국어학자들은 추모란, 즉 당국을 과꽃으로 보게 되었을까? 아마도 그 배경은 밝히기 어려울 터인데, 한 가지 실마리는 과꽃의 영어 이름이 ‘China Aster’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원예가 최영전의 <백화보>에서 과꽃 부분을 보면, “이 꽃은 1731년에 중국에 와 있던 프랑스의 선교사에 의해서 파리 식물원에 소개되었는데, 이때 중국을 원산으로 하여 China aster라고 잘못 소개한 것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과꽃을 영어로 China Aster라고 하는데, 이 영어 이름의 영향으로 해방 후 큰사전 편찬자들이 먼저 당국唐菊을 과꽃으로 이해해고, 아울러 추모란도 과꽃이라고 했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정태현의 제자로 식물명 연구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이우철의 <한국 식물명의 유래>를 보면, 당국唐菊은 실려있지 않은데 반해 ‘추목단(秋牧丹)’을 “대상화의 이명“으로, ‘추명국’을 “대상화의 중국 옌볜 방언”으로 기록해두었다. 그러므로 식물분류학자들은 추모란을 과꽃보다는 대상화로 보는 것 같다.
이제 우리 옛 글 속의 추모란과 당국을 미나리아재비과의 대상화로 이해하면서 시 한편을 더 감상해보자.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가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 1785~1840)으로부터 1835년에 대상화를 받고 쓴, “황산黃山이 추모란秋牡丹 기품奇品을 나누어준다. 이 시를 지어 사례한다 (黃山分贈秋牡丹奇品 題此爲謝)”라는 제목의 시이다.
嘉卉天生殿衆芳 하늘이 낳은 아름다운 풀이 뭇 꽃을 누르니
玉臺金盞禀非常 옥색 꽃잎에 금잔 꽃술이 예사롭지 않구나.
詩於老境偏工艶 늘그막에 시 지으며 곱게 꾸미려고만 하고
花亦秋心另試香 가을 깊어 꽃들도 향기 맡으며 나누네
黃菊贈形堪啜露 국화 꽃 형상으로 이슬 먹고 견디며
牡丹借葉也凌霜 모란 잎 모양으로 서리를 이긴다네
移來野逸徐煕墨 초야로 옮겨오니 서희徐煕의 그림인데********
澹對吟窓卷石傍 잔돌 곁 창가에서 읊조리며 담담히 마주하네
<끝. 2022.6>
* 秋牡丹 東人曰唐菊 – 완당전집. 또한, 신위(申緯 1769~1845)의 <경수당전고警修堂全藁>,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가오고략嘉梧藁略> 등에서도 <군방보羣芳譜>의 추모란牡丹草 설명을 인용하면서 이 추모란을 우리나라에서 당국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 김영전은 <백화보>에서, “과꽃을 당국화(唐菊花)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중국꽃으로 잘못 알고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과꽃은 우리의 꽃으로서 백두산, 고무산, 혜산진, 부전고원 같은 고냉지에 자생으로 있는 것이다.”라고 했으며, <한국 식물 이름의 유래>에서는 과꽃의 옛이름으로 추모란秋牡丹, 당국唐菊, 당구화 등을 들고 있다.
*** 秋牡丹草本 徧地蔓延 葉似牡丹差小 花似菊之紫鶴翎黃心 秋色寂寥 花間植數枝 足壯秋容 分種易活 肥土為佳 - 佩文齋廣羣芳謂卷第三十四 (明나라 黃省曾, 周履靖의 <국보菊譜>에 나오는 국화 품종 이름에 “紫鶴翎 淡紫色千葉”이 나온다. 황심黃心은 국화 꽃 모양을 묘사하는 것이며, 품종 명은 아니다.)
**** 秋牡丹 徧地蔓延 葉肖牡丹 花開淺紫黃心 根生分種 – 삼재도회
***** 秋牡丹 草有微臭 九月先菊而開 單瓣紫色 葉似牡丹 然非牡丹而殆菊類也. 당구화. 東産又有紅白諸色 – 물명고
****** 唐菊당국, 卽孩兒菊有各色 - 명물기략
******* Anemone sieboldii Honda와 Anemone hupehensis var. japonica는 모두 Anemone scabiosa H.Lév. & Vaniot의 이명이다.
******** 서희徐熙는 남당南唐 시대 강령江寧 사람으로 그림을 잘 그렸고 특히 꽃과 과일 그림에 솜씨가 뛰어났다고 한다.
+ 표지사진 - 대상화, 2021.10.16 화담숲
++유담냉전幽澹冷雋 : 漢語사전에 의하면 유담幽澹은 잔잔한 물결, 幽靜, 靜寂을 뜻한다고 한다. 冷雋은 의미심장함을 뜻한다. 이 구절의 해석이 다양하지만 여기서는 추사가 귀양살이하고 있는 제주도를 묘사한 것으로 풀어본다. 그러면 어조사 於를 장소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