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국翠菊, 자국紫菊,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4년 7/8월>
올해도 과~꽃이 피~었읍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읍~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요~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죠~
어효선 작사, 권길상 작곡의 동요 ‘과꽃’이다. 나도 초등학교 시절에 이 노래를 불렀지만 과꽃이 어떤 꽃인지는 몰랐다. 화단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지만 우리 집 담장 밖에 한 줄로 엉성하게 심어진 화초 중에 어머니가 ‘배차국화’라고 부르던 꽃이 있었다. ‘배차국화’는 ‘배추국화’의 안동 사투리이다. 나는 최근에 원예가 최영전崔榮典(1923~?)이 1963년에 간행한 <백화보>를 펼쳐서 과꽃(翠菊) 부분을 읽다가, 이 꽃이 바로 ‘배차국화’ 임을 알게 되었다. 초등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배워서 노래로 불렀던 ‘과꽃’이 그 ‘배차국화’ 였다니! 그럼 나는 초등학교 시절 과꽃을 알고 있었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몰랐다고 해야 하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최영전은 <백화보>에서, “과꽃은 어릴 적에는 마치 배추잎의 모양과 같으나 막상 꽃대가 나오면서는 잎이 좁은 댓잎처럼 꽃대에 돋아난다. 화려한 이 꽃은 품위 있는 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대중적인 꽃으로서 오랜 세월을 우리와 함께 살아왔다. … 과꽃을 당국화(唐菊花)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중국꽃으로 잘못 알고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과꽃은 우리의 꽃으로서 백두산, 고무산, 혜산진, 부전고원 같은 고냉지에 자생으로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해 온 과꽃(Callistephus chinensis (L.) Ness)은 고전에서 어떻게 표현되었을까?
당국唐菊은 추사 김정희의 <완당전집阮堂全集>이나 이유원李裕元(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 등에서 추모란秋牡丹의 우리나라 속명으로 나온다. <중약대사전>이나 <중국식물지>에서 추모란은 Anemone hupehensis var. japonica, 우리가 ‘대상화待霜花’로 부르는 화초로, 과꽃과는 거리가 멀다. 과꽃을 일부에서 당국화로 부르기도 한 것은 사실일 터이지만, 중국의 추모란과는 다르다. 대신 <중국식물지>는 과꽃을 취국翠菊 혹은 오월국五月菊이라고 했다. 그런데, 취국翠菊은 일부 문인들의 시에 쓰이기도 했지만 조선말엽의 한자어휘집인 <물명고>나 <광재물보>에는 실려있지 않다. 대신 <물명고>에는 자국紫菊이 실려있는데, 자국에 대해, “꽃은 국화 비슷하지만 홑 꽃잎이어서 이 이름으로 부른다. 사실 국화는 아니다”*라고 설명하고 한글로 ‘개구화’라고 했다. 이 ‘개구화’는 남광우南廣祐(1920~1997)의 <고어사전>에 “과꽃, 취국(翠菊)”으로 나온다. 이제서야 과꽃이 우리 고전에 어떤 한자로 표현되었는지 실마리가 찾아진 셈이다.
그런데, 한가지 더 살펴볼 점은, <본초강목>에서 마란馬蘭의 이명으로 자국紫菊이 나온다는 점이다. 좀 더 살펴보면, “마란馬蘭, 석명釋名 자국紫菊, 그 잎은 난蘭(등골나물) 비슷하며 크고, 그 꽃은 국화 비슷한데 자주빛이라서 이러한 이름이 지어졌다. 속칭 물건이 큰 것을 말(馬)이라고 한다. … 마란馬蘭은 호수나 연못의 낮고 습한 곳에 아주 많다. 2월에 싹이 크고 붉은 줄기에 흰 뿌리이다. 긴 잎은 깍인 톱니가 있으며 택란澤蘭(등골나물) 비슷한 모양이다. 단 향기는 없다. … 입하入夏에 2, 3척 크기로 자라고 자주 빛 꽃이 피며 꽃이 그치면 자잘한 씨앗이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중약대사전>과 <중국식물지>에서 마란馬蘭은 Kalimeris indica (L.) Schulz-Bip.으로 쑥부쟁이 류와 비슷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자생하거나 재배하지 않는 식물이다. 그러므로 우리 고전의 자국紫菊은 마란馬蘭이 아닐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러므로 과꽃은 중국에서는 주로 취국翠菊이라고 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한자로 자국紫菊이라고 쓰고 민간에서 ‘개구화’로 불렀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속명으로 당국唐菊이라고 했던 추모란秋牡丹이 과꽃이라는 견해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우선, 추모란과 취국翠菊은 <군방보>에 서로 다른 화초로 기재되어 있으므로 최소한 중국에서는 과꽃으로 보지 않았다. “추모란秋牡丹은 초본草本으로 두루 땅으로 덩굴로 뻗는다. 잎은 모란 같은데 조금 작다”**라고 <군방보>는 설명하고 있는데, 과꽃은 덩굴지는 풀도 아니고 잎 모양도 3출엽, 혹은 2회 3출엽인 모란과는 다르다. 그런데 <물명고>에서 추모란秋牡丹을 ‘당구화’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물명고> 기록을 근거로 우리나라 고어사전들은 ‘당구화’를 “당국화唐菊花, 과꽃”으로 해설하고 있다. 아마 이러한 해설 때문에 과꽃을 추모란이라고 하는 견해가 형성되었을 것이지만 이는 제고해볼 문제이다. 왜냐하면, <물명고>에서 서로 다른 식물로 기재한 것이 분명한 두 식물, 즉 자국紫菊과 추모란秋牡丹이 모두 과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추모란을 조선시대에 당국唐菊이라고 불렀고, 과꽃도 당국唐菊으로 부른 사례가 있어서 혼동이 생긴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따름이다.
이제 과꽃 자국紫菊과 국화 黃菊을 대비한 구암懼庵 이수인李樹仁(1739~1822)의 시 “노란색, 자주빛 두 국화를 읇다 (黃紫二菊吟)”를 소개한다.
紫菊生於黃菊邊 자주빛 과꽃이 노란 국화 곁에 자라니
黃菊猶遲紫菊先 국화는 늦어지고 과꽃이 먼저 피네
由來正道多遲就 본래 바른 길은 더디게 이루는 일 많으니
遲就方能耐久全 늦게 피어 오래도록 온전함을 지키려네
일반적으로 과꽃이 7~9월에 피고, 국화는 가을에 피므로, 시인은 과꽃이 먼저 피는 점을 포착하여 자신의 뜻을 국화 꽃에 이입하고 있는 것이다. 취국翠菊으로 과꽃을 표현한 글도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경와敬窩 김휴金烋(1597~1638)의 “한 언덕 (一丘)”이라는 시이다.
一丘煙月屬閑居 한 언덕 풍경은 한가롭게 살기 좋아라
長夏深山樹擁廬 긴 여름 깊은 산속, 초가를 감싼 나무들
荷葉細撓風過後 바람 스치자 연 잎은 살며시 흔들리고
鳥聲微到午眠初 낮 잠이 막 드는데, 새 소리는 희미하게 들리네
疏籬翠菊和煙種 성근 울타리에 과꽃은 요초와 어울리고
晩圃幽蘭帶雨鋤 저물 녘 채소밭에서 비 맞으며 난초를 돌보노라
不逐時人賭寵祿 벼슬살이 녹봉 좇는 사람들을 따르지 않으리니
懶夫生理只琴書 게으른 사나이 생활은 거문고와 책뿐이라
김휴金烋는 <해동문헌총록海東文獻總錄>이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지학 책을 저술하면서 수많은 책을 본 박학다식한 학자였다. 아마도 그는 <군방보>의 취국翠菊이 과꽃임을 알았을 것이다. ‘한 언덕 (一丘)’는 보통 은자가 사는 곳을 뜻하는데, 시골에서 책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뜻이 보인다.
최영전은 <백화보>에서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과꽃을 당국화로 부르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듯, 도봉섭 등이 1956년 평양에서 간행한 <조선식물도감 제2집>에서 “과꽃 (Callistephus chinensis Nees), 북부 산지에 자생하며 또 관상용으로 재배하는 1년생 초본이다”라고 적고 있고, 이창복은 <대한식물도감>에서 “부전고원赴戰高原에서부터 만주와 중국 북부에 걸쳐 자라는 一年草”라고 했다. 하지만 2015년 산림청과 국립수목원에서 간행한 <한반도 자생식물 영어이름 목록집>에는 과꽃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생식물로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비록 남한에는 자생하지 않지만 과꽃은 시골 촌부들에게 사랑 받아 우리집 담장 밖에도 심어졌던 꽃이다. 과꽃을 배추국화라고 부르는 이유는 아마도 어릴 때 잎 모양이 배추와 비슷해일 것이다. 함께 자란 형제들에게 옛날 시골집의 ‘배차국화’가 생각나는지 물어보니, 꽃을 좋아하는 누님과 동생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2024년 7/8월, pp.82~89>
*紫菊, 花似菊而單瓣故名 實非菊也 개구화 - 물명고
**秋牡丹草本 徧地蔓延 葉似牡丹差小 花似菊之紫鶴翎黃心 秋色寂寥 花間植數枝 足壯秋容 分種易活 肥土為佳 - 佩文齋廣羣芳譜 卷第三十四
***馬蘭, 釋名紫菊, 其葉似蘭而大 其花似菊而紫 故名 俗稱物之大者 爲馬也 … 馬蘭湖澤卑濕處甚多 二月生苗 赤莖白根 長葉有刻齒 狀似澤蘭 但不香爾 … 入夏高二三尺 開紫花 花罷有細子” - 본초강목
+표지사진 - 과꽃, 2022.7.25 춘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