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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Mar 11. 2022

잊혀진 이름, 여인의 눈물을 먹고 자란 추해당秋海棠은?

베고니아, 큰베고니아

“저녁 때가 될수록 더위가 한결 더 치열해진다. 급히 사관으로 돌아와서 북쪽 들창을 높이 떠괴고 옷을 벗고 누웠다. 뒷뜰이 꽤 넓은데, 파 이랑과 마늘 두둑이 금을 그은 듯 곧고 방정하다. 오이 덩굴, 박 덩굴을 올린 시렁이 착잡(錯雜)하게 뜰을 덥고, 울타리 가에 붉고 흰 촉규화(蜀葵花)와 옥잠화(玉簪花)가 방금 한창 피어나고, 처마 끝엔 석류(石榴) 몇 분(盆), 수구(繡毬) 한 분, 추해당(秋海棠) 두 분이 심어져 있다. 주인 악군(鄂君)의 아내가 손에 대바구니를 들고 나와서 차례로 꽃을 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 1780년 여름에 압록강을 건너 심양瀋陽으로 가는 길을 기록한 <도강록>의 한 장면이다. 정확히는 책문柵門을 지나 중국 땅에 들어간 첫째 날인, 음력 6월 27일에 악군(鄂君) 집에 숙소를 정하고 바깥 구경을 한 후 숙소로 돌아와서 본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 대학시절 읽었던, 1973년 대양서적 발행 한국명저대전집의 <열하일기>에서 인용했는데, 안동 출신의 한학자 이가원李家源 선생 번역이다.


(좌) 베고니아 '케이시 코윈', 2021.11.23 서울식물원, (우) 렉스베고니아, 2022.3.6 물향기수목원
(좌) 베고니아 'Shirtsleeves', (우) 베고니아 'Oh No', 2021.12.23 서울식물원


만물에 대한 호기심이 컸던 연암이었으니 응당 꽃도 좋아했으리라. 박지원은 북경에서도 화초포花草舖, 즉 꽃집을 방문하고서, “모두가 풀꽃들이다. 가장 많은 것이 수구(繡毬)와 ‘가을 해당화(秋海棠)’와 석죽(石竹)이다. 여러 가지 꽃을 구색에 맞추어 병에 벌여 꽂은 것은 모두 사계화(四季花)”**라고 묘사했다. 이렇게 연암이 중국 땅에서 만난 꽃 중, 촉규蜀葵는 접시꽃이고 수구繡毬는 수국, 석죽石竹은 패랭이꽃, 사계화四季花는 장미 류인데, 이가원이 ‘가을 해당화’로 번역한 추해당은 무엇일까?


박지원이 중국 여행길에 만났던 추해당은 당시 우리나라에도 있었던 듯하다. 이 추해당은 김창업金昌業(1658~1721)이 읊은 시에도 보이는데, 그 후로, 유득공柳得恭(1748~1807), 박제가朴齊家(1750~1805), 신위申緯(1769~1845), 심상규沈象奎(1766~1838), 이유원李裕元(1814~1888) 등 주로 조선 후기 문인들의 글에 가끔 보이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김창업의 <노가재집老稼齋集>에 실려 있는 시를 읽어본다. 김창업은 추해당에 대한 시를 몇 편 지었는데, 그 중, “우연히 읊다 (偶吟)”와 “족형 김성후金盛後(1659~1713) 중유仲裕씨를 방문하여 추해당을 구하다 (訪族兄仲裕氏 盛後 求秋海棠)”라는 제목의 시이다.


長夏荒郊見客稀   긴 여름 황량한 성밖엔 손님이 드물어

高齋獨坐雨霏霏   높은 집에 홀로 앉으니, 비가 내리네

小庭掃得淸如水   물처럼 깨끗하게 작은 뜰을 씻어내니

秋海棠開並紫微   추해당과 배롱나무 꽃이 함께 피었네!


卯酒醒來尙掩關   아침 술 깨고 왔는데, 아직 문빗장이 닫혀 있구나!

有官看似却無官   벼슬 있는 사람이 도리어 벼슬 없는 듯 보이네

騎驢病弟來何意   병든 아우가 나귀 타고 온 뜻이 무엇이겠는가?

秋海棠花欲借看   추해당 꽃을 빌려 보고 싶다네


이 시에 의하면, 김창업은 아침 술 깨고 나서 추해당 꽃을 구하러 족형을 찾아갈 정도였으니, 그가 이 꽃을 매우 사랑한 것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추해당은 17세기 경에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도입된 듯 한데, 유득공은 <경도잡지京都雜志>에서, “화훼花卉를 기를 때는 일본 소철蘇鐵과 종려棕櫚, 연경燕京의 추해당秋海棠을 잘 다루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라고 하여 정조 연간에 추해당이 서울에서 귀한 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희의 <물명고>는 추해당에 대해, “풀꽃 종류의 해당海棠으로 색깔은 부인네 얼굴 같다. 세상에 전해지기를 미인이 눈물을 흘린 곳에서 생겨났다고 한다. 단장화斷腸花이다”****라고 소개했다. 이유원李裕元(1814~1888)도 <임하필기林下筆記> 순일편旬一編에서, “추해당, 옛날에 부인이 사모하는 님을 못 만나서 항상 북쪽 담장 아래에서 눈물을 흘렸다. 뒤에 눈물을 흘린 곳에서 풀이 자랐는데 그 꽃이 매우 아름다워 단장화라 불렀다. 채란잡지採蘭雜志에 실려 있으며, 지금의 추해당이다”*****라고 기록했다.


이 추해당은 <중국식물지>와 <식물의한자어원사전>에 의하면 현재에도 중국과 일본에서 추해당秋海棠으로 부르며, 학명은 Begonia grandis이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큰베고니아’로 부르는 원예용 꽃으로 중국 원산이다. 명나라 말기에 편찬된 <삼재도회三才圖會>에서 추해당 그림을 보면 영락없는 베고니아이다. 그리고, 우리나라 19세기 화가인 신명연申命衍(1808~?)의 산수화훼도山水花卉圖 중 추해당 그림을 보아도 베고니아 류임을 알 수 있다. 신명연은 추해당을 시로 읊기도 했던 자하紫霞 신위申緯의 아들이기도 하다.


(좌) 삼재도회의 추해당 기록, (우) 신명연申命衍(1808~?)의 산수화훼도山水花卉圖 중 추해당 그림 (국립중앙박물관)


지금은 주로 베고니아로 부르지만 추해당이라는 이름은 1960년대까지 줄곧 사용된 듯하다. 우선 일제강점기의 사학자이자 언론인 문일평文一平(1888~1936)은 <화하만필花下漫筆>에서 49종의 꽃 중 하나로 추해당에 대해 글을 쓰면서 추해당 모습과 성질, 재배 방법 등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서 “추해당이란 이름만 들어도 그 꽃의 美가 어렴풋이 想像된다”고 했다. 그리고 추해당을 단장화라고 했지만 베고니아라는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 후, 1946년 <신생영한사전>은 begonia를 추해당으로 번역했고, 1957년간 <한글학회지은 큰사전>은 추해당에 대해서, “추해당과에 딸린 다즙(多汁)의 풀. 정원에 흔히 심는데, 길이 60cm 가량. 줄기는 보통 누른빛을 띠었음. 잎은 사상심장형(斜狀心臟形). 구월쯤에 가지 끝에서 붉은빛의 아름다운 꽃이 자웅동주로 핌. 근래에 유행되는 서양 화초로 여러 가지 품종이 있음. (난장초=爛腸草. Begonia Eransiana Ardr.++)”라고 설명했지만 베고니아 항목은 없다.


원예가 최영전崔榮典의 1963년판 <백화보百花譜>는 Begonia를 추해당으로 소개하면서 다음의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다. “추해당은 베고니아속(屬)의 일종이다. 발그레하게 물든 마디에 베고니아 특유의 한쪽이 약간 찌그러진 애련한 하트형 잎은 짝사랑이라는 꽃말을 낳게 했다. … 이 꽃은 중국이 원산으로서 우리는 중국의 이름 그대로 추해당이라 부른다. … 그러나 근래 이 추해당은 인도산인 렉스 베고니아의 인기에 밀려 옛과는 달리 이 아름다운 꽃이 천대를 받는 듯하여 가엾으며, 무턱대고 새것의 유행만 좇는 현대인의 취미가 안타깝기만 하다.” 이와 같이 <백화보>에서는 추해당과 베고니아라는 단어를 병용하고 있는데, 이는 당시 중국 원산의 추해당 뿐 아니라, 서양에서  여러 종의 베고니아가 원예용으로 도입된 사정을 반영하는 듯하다.


그 후 1966년에 잡지 여원女苑의 부록으로 발간된 <園藝와 꽃꽂이>에는 드디어 항목 명으로 추해당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고 대신 베고니아가 나온다. 아마도 1970년대가 되면 베고니아가 보편적인 이름으로 쓰이게 되었던 듯하다. 지금도 일부 영어사전은 begonia를 ‘추해당’으로 옮기고 있고, 국어사전은 추해당을 ‘베고니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설명하고 있으나, 이미 추해당은 일상적으로는 쓰이지 않는 말이 되어 버렸다. 참고로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듯 1994년간 <동아새국어사전>은 ‘베고니아(begonia)’ 항목을 추가하고, 대신 ‘추해당’ 항목에서는 ‘베고니아’를 참조하라고 표시하고 있다.


참고로, 1937년 간행 <조선식물향명집>은 추해당을 수록하지 않았다. 1949년 간행 <조선식물명집 – 초본편>이나 1956년 <한국식물도감 하>도 추해당이나 베고니아를 수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1979년 초판이 간행된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에는 브라질 원산의 사철베고니아(Begonia semperflorens Link. et Otto)가 베고니아과 식물로 수록되어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 식물도감으로는 1924년판 <식물명감>과 1925년판 <일본식물도감>에서 추해당秋海棠(しぅかいだぅ, Begonia Evansiana Ardr.)이 중국 원산으로 정원의 습지에 식재하는 다년생 초본으로 소개되어 있다. (Begonia evansiana는 Begonia grandis의 이명이다.) 아마도 우리 식물학계의 태두이신 정태현 선생 등도 이러한 일본의 식물도감 서적에서 이 추해당을 봤을 터이고, 문일평 등의 글을 보더라도 당시 추해당이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니 이 식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겠지만, 추해당이 아주 드물게 볼 수 있어서였는지 <조선식물향명집>이나 <한국식물도감> 편찬에서는 포함하지 않았다.


베고니아 화분, 2021.9.24 남한산성 - 사철베고니아로 보인다.


아마도, 만약 정태현 선생이 추해당을 식물도감에 수록했다면, 우리는 지금 베고니아를 추해당이라고 부르고 있었으리라. 이제 추해당이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고전 속의 추해당이 베고니아 임을 인식하고, 최소한 ‘가을 해당화’로 번역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꽃베고니아라고 불리기도 하는 사철베고니아는 거리를 장식하는 관상화로 널리 식재되어 이곳 저곳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큰베고니아로 불리는 중국 원산의 추해당은 지금도 드물게 가꾸어지는 듯하다. 언젠가 직접 큰베고니아를 만나 <열하일기>에서 연암이 기록한 추해당 구절을 떠올리며 꽃을 감상하고 싶다.


베고니아 ‘드래곤 웡’, 2021.8.29 한택식물원

<끝 2021.9.25>


* 向夕暑氣益熾 急往所寓 高揭北牕 脫衣而臥 北庭平廣 葱畦蒜塍 端方正直 蓏棚匏架 磊落蔭庭 籬邊紅白蜀葵及玉簪花 方盛開 簷外有石榴數盆及繡毬一盆 秋海棠二盆 鄂之妻手提竹籃 次第摘花 – 열하일기 도강록

** 花草舖. 皆艸花 最多繡毬 秋海棠 石竹 諸色膽甁排揷者 皆四季花 – 열하일기 황도기략黃圖紀畧

*** 養花卉 能致倭蘇鐵 棕櫚 燕中秋海棠 爲貴 - 유득공柳得恭, 京都雜誌

**** 秋海棠, 草花類海棠 色如婦面 世傳美人灑淚所生, 斷腸花 - 물명고

***** 秋海棠 昔有婦人懷人不見 恒灑淚於北墻之下 後灑處生草 其花甚媚 名曰斷膓花 載採蘭雜志 今之秋海棠是也 - 林下筆記 旬一編

++Begonia Eransiana Ardr.는 Begonia evansiana Ardr.의 오기인듯하다.

+표지사진 : 렉스베고니아 (Begonia Rex), 2022.3.6 물향기수목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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