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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Mar 18. 2022

옛 글 속의 억새와 <훈몽자회>의 '달 뎍(荻)'

망芒, 망莣과 적荻, 완薍, 담菼, 환萑

아 으악새 슬프우니 가을인가요

지나친 그 세월이 나를 울립니다

여울에 아롱젖은 이즈러진 조각달

강물도 출렁출렁 목이 멥니다.


일제의 압제가 고조되던 1936년, 고복수가 부른 짝사랑의 1절 가사이다. 여기에서 ‘으악새’는 새가 아니라 경기도 방언으로 억새를 말한다고 한다. 이 노래 하나로 억새는 우리 민족에게 쓸쓸한 가을 정서의 표상이 되었고, 가을이면 어김없이 포천 명성산이나 창녕 화왕산, 정선 민둥산 등 억새가 흐드러진 명소가 가을 산행지로 손꼽힌다. 산정에 드넓게 펼쳐진 억새밭에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햇살에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 꽃이 출렁이면서 스산한 가을 소리와 함께 장관을 연출한다.


물억새, 2019.10.29 여주 강천섬


물억새도 감상할만한 가을 풍경으로 각광을 받는다. 한강 둔치나 부산 을숙도, 속초 습지생태공원, 영산강 물억새길, 태화강 둔치 등이 물억새 관광 명소라고 각 지방에서 자랑한다. 현재 통용되는 식물도감을 살펴보면, 우리나라 억새속 식물에 대표적인 것은 억새(Miscanthus sinensis var. purpurascens (Andersson) Matsum.), 참억새(Miscanthus sinensis Andersson), 그리고 물억새(Miscanthus sacchariflorus (Maxim.) Hack.)이다. 억새나 참억새는 주로 산지 숲 가장자리에서 모여 2m 정도까지 자라고 호영 끝에 긴 까락이 있다. 이에 반해 물억새는 전국의 강둑이나 저지대에 1.5m 가량 자라며 까락도 없어서 억새와 그리 어렵지 않게 구별할 수 있다. 한편 최근에 식물분류학자들은 억새와 참억새를 구분하지 않고 Miscanthus sinensis Andersson으로 통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고전을 번역할 때 억새와 참억새는 구별하지 않고 억새로 통칭해도 될 것이지만, 물억새는 구분해주면 좋을 것이다.


(좌) 억새, (우) 억새 이삭 세부, 2021.1.9 의성 - 억새는 촘촘히 모여나고 이삭 세부에 까락이 보인다.
(좌) 물억새, 2020.11.21, (우) 물억새 이삭 세부, 2020.1.18, 남한산성 - 이삭 세부에 까락이 없다.


옛 글에서는 억새와 물억새를 어떤 글자로 표현했을까? 그리고 이 둘을 구분했을까?  <한국고전종합DB>에서 억새로 번역한 글자를 찾아보면, 적荻, 완薍, 담菼, 환萑, 망芒, 겸蒹, 겸가蒹葭, 모茅 등이다. 적荻과  완薍, 담菼, 환萑은 물억새로도 번역하고 있다. 이 중 겸蒹과 겸가蒹葭는 갈대일 가능성이 크고, 모茅는 ‘띠(Imperata cylindrica)’를 가리키므로 이 글자들을 억새로 번역하는 것은 제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 고전을 번역하는 학자들은 적荻, 완薍, 담菼, 환萑에 대해서는 억새와 물억새를 구분하지 않고 통용했으며, 망芒에 대해서는 억새로만 번역했음을 알 수 있다.


반부준은 <성어식물도감>에서 억새를 '망芒’으로, 물억새를 적荻으로 설명한다. 그리고 <초사식물도감>에서 관雚, <시경식물도감>에서 담菼을 물억새로 보았다.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은 망芒이 억새라고 했고 이명으로 두영杜榮, 파망芭芒, 파모芭茅를 적고 있다. 적荻은 물억새라고 설명한다. 또한 <중약대사전>도 억새를 망芒이라고 했고, 두영杜榮, 파망笆芒, 파모笆茅를 이명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아>에 “망莣, 두영杜榮이다”라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도 후대로 오면서 망莣 대신 망芒으로 쓰게 된 듯하다. 즉, 대개 중국과 일본 학자들은 억새를 '망芒’으로, 물억새를 적荻, 담菼 등으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망莣은 <훈몽자회>에는 실려있지 않은데, <전운옥편>에는 “莣망, 띠(茅) 비슷하며, 두영杜榮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어서 망莣이 식물 이름임을 말 해 준다. 그렇지만, ‘芒망’에 대해서는 “풀의 끝. 망망芒芒은 큰 모양이다. 구망勾芒은 귀신 이름이다. 또, 광망光芒(빛살), 망종芒種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망芒을 억새로 추정한 문헌도 있다. 유희는 <물명고物名考>에서 간모菅茅 류의 하나인 망芒에 대해, “망莣으로도 쓴다. 모여나며 잎은 띠(茅)와 같지만 길고 몹시 날카로워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줄기에서 나오는 흰 꽃은 갈대(蘆) 같다. 그 마른 껍질을 두드려서 끈을 만들 수 있다. 이삭으로는 비를 만든다. 이것도 ‘웍새’인 듯한데, 알 수 없다. 파모芭茅, 두영杜榮과 한가지다. 파왕근초罷王根草의 역어譯語가 ‘웍새’이다.”***라고 했다. 또한 <명물기략>은 <물명고>에서 망芒과 한가지로 본 파모芭茅에 대해 “총생한다. 잎 크기는 부들(蒲) 같고 매우 날카로워 사람에게 상처를 입힌다. 민간에서 악사惡絲라고 하는데 와전되어 ‘억새’로 부른다. 망莣, 망芒, 두영杜榮, 파망芭芒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억새, 2020.9.20 안동 소정리


하지만 망芒을 ‘억새’로 보는 견해는 확산되지 못했던 듯하다. 그 후, <자전석요>에서 “芒망 풀 끝(草端), 가스랑이 망”이라고 설명했고, 이를 이어받아 <한문선신옥편> 등 대부분의 옥편은 ‘가스랑이’라는 뜻만 기록했다. 현대의 <한한대자전>도 ‘까끄라기 망’을 첫째 뜻으로, ‘억새 망’은 다섯째 뜻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러한 자전 류의 설명이 말해주듯이, 대개 우리 옛 글에서 망芒은 ‘억새’라는 뜻 보다는 벼, 보리 따위의 수염을 나타내는 ‘까끄라기’라는 뜻으로 쓰였다.


한편 적荻은 <훈몽자회>에 “적荻 달뎍, 환雈이다. (중국)민간에서 적자초荻子草라고 부른다.”로, 환雈은 “雈 달환 갈(葦) 비슷하지만 작다.”로, "담菼 달 담, 적荻의 작은 것이다."*****로 기록되어 있다. <전운옥편>은 “荻뎍 갈대 종류로 환이다 (蘆屬 雈也)”, <자전석요>는 “荻뎍 환이다 (雈也), 달적”, “雈환 달환”이라고 했다. <한선문신옥편>에서는 “荻 갈(뎍) 갈대이다 (蘆也)”로 설명하여, 일부 혼동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다시 현대의 <한한대자전>은 적荻을 ‘물억새 적’으로 설명했다.


한가지 의문은 과연 조선 중기 <훈몽자회>에서 우리 말로 ‘달’이라고 한 적荻이나 환雈,  완薍, 담菼이 과연 무엇일까?  <훈몽자회>는 로蘆와 위葦, 가葭를 ‘갈’이라고 했고, ‘달 환雈’을 “갈(葦) 비슷하지만 작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으로 미루어 보면 최세진은 ‘갈’과 ‘달’을 비슷하지만 다른 식물로 인식한 것이 분명하다. <명물기략>에도 “갈대보다 짧고 작으며 (줄기) 가운데가 비어있고 껍질이 두터우며 푸른색인 것이 ’菼담’이다. 민간에서 ‘달(딸)’로 바뀌었다. 완薍, 적荻, 환萑이다”******라고 하여 갈대와 ‘달’을 구분하고 있다. 즉, ‘달’은 갈대와 비슷하지만 더 작은 식물을 가리키므로 물억새를 뜻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갈대는 2m이상 자라지만 물억새는 1.5m가량 자란다. ‘달’이 현재의 달뿌리풀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달뿌리풀은 갈대와 같은 속의 식물로 대단히 유사하여 옛 문인들은 그 둘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갈대로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옛 문헌 속의 ‘달’이 물억새라면 언제부터 ‘달’이라는 우리 말이 쓰이지 않게 되었을까? 흥미로운 것은 1937년 <조선식물향명집>에서 Phragmites japonica Steudel, 즉 현재 우리가 ‘달뿌리풀’로 부르는 갈대속의 식물에 ‘달’이라는 향명을 부여하고 있는 점이다. 그러다가 1949년 <조선식물명집-초본편>에서 ‘달’을 ‘갈대’의 이명으로 처리하는 대신 ‘달뿌리풀’을 신칭했다.******* 우리 고어의 ‘달’이 무엇인지에 대한 근대 식물학자들의 고민을 엿볼 수 있는데, 결국 ‘달’은 갈대속의 식물이라고 판단하게 되면서 ‘달’이라는 이름은 사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달’ 적荻은 <조선식물향명집>에서 Miscanthus sacchariflorus Hackel, 즉, 물억새의 한자명으로 기재했고, 현대 옥편에서도 물억새로 설명하고 있다. 이제 결론을 내리자면, 옛 글에서 망芒은 억새, 적荻, 완薍, 담菼, 환萑은 물억새로 보아야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망芒이 주로 ‘까끄라기’라는 뜻하는 글자로 쓰이게 되면서 적荻이나 완薍으로 물억새 뿐 아니라 억새도 함께 표현한 듯하다. 결국 억새와 물억새는 서식 환경이 다르므로 이 글자들이 사용된 문맥이나 글이 지어진 환경을 잘 살펴야 할 듯하다.


예를 들면 노적蘆荻은 갈대와 물억새가 함께 있는 모습인데, 내륙 지방의 풍경이면 오히려 달뿌리풀과 물억새일 가능성이 크다. 안동의 구담습지 하중도에는 (갈대는 없고) 달뿌리풀과 물억새가 같이 자란다는 식물상 조사 결과도 있다. 적荻이나 완薍이 단독으로 쓰인 경우, 산지 풍경이면 억새이고 하천 배경이면 물억새일 것이다.  <광해군일기> 1610년 음력 6월 15일 기사에 현재의 고양高陽 남쪽 강에 있던 섬 압도鴨島에서는 “매년 군인을 많이 뽑아 한 달 정도 부역으로 완薍 풀을 베어 수시로 필요한 대소사에 사용하였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 기록에서 완薍은 물억새일 것이다.


(좌) 물억새, (우) 달뿌리풀, 2020.9.20 안동

이제 조선 중기 안동 예안에 살았던 권시중權是中(1572~1644)의 시 “밤에 강 가를 바라보며 (夜望江洲)”를 읽어본다.


江洲盡日無人渡             강 가엔 온종일 건너는 이 없는데

一片輕舟繫浪頭             한 조각 작은 배가 물결 머리에 묶여있네

半夜寒霜空載月            한밤에 찬 서리는 공연히 달빛 싣고

荻花蘆葉幾經秋            달 꽃과 갈 잎은 가을을 몇 번 지냈나?


권시중은 예안에 살면서 <선성지> 등을 편찬하기도 한 분이므로, 이 시의 배경이 된 강가는 청량산을 지나 예안을 가로질러 흐르는 낙동강 상류일 것이다. 낙동강 상류 강 가 습지라는 서식지 환경으로 보아 ‘갈대와 억새’가 아니라 ‘달뿌리풀과 물억새’가 자라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권시중은 강 가의 물억새와 달뿌리풀을 보며 ‘달’과 ‘갈’을 뇌이면서 ‘적화노엽기경추荻花蘆葉幾經秋’라는 시구를 다듬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다음에 도산서원 앞을 흐르는 강가에 가면 자세히 살펴봐야겠다. 과연 달뿌리풀과 물억새가 자라고 있는지!


<끝>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 1985>에서는 참억새(Miscanthus sinensis Andersson) 변종으로 억새(Miscanthus sinensis var. purpurascens (Andersson) Rendle) 다루고 있는데, 조양훈 등의 <벼과 사초과 생태도감, 2016> ‘참억새 기록했고, 김진석 등의 <한국의 들꽃, 2018> ‘억새(참억새)’ 통합하고 있다.

**芒망 草端 大貌芒芒 神名勾芒 又 光芒 芒種 – 전운옥편

***芒, 亦作莣 叢生葉如茅而長 甚快利傷人 抽莖白花如蘆 剝其蘀皮 可爲繩 其穗作帚 此亦似웍새而未可知. 芭茅 杜榮 仝. 罷王根草 譯語웍새也 – 물명고

****芭茅 叢生 葉大如蒲 甚快利傷人 俗言惡絲 轉云억새 莣 芒 杜榮 芭芒 – 명물기략

*****荻 달뎍 雈也 俗呼荻子草, 雈 달환 似葦而小, 菼 달 담 荻之小者, 蘆 갈로 葦未秀者 – 훈몽자회

******短小於葦而中空 皮厚 色靑蒼者菼담 俗轉달也 薍也 荻也 萑也 - 명물기략

*******<조선식물명집-초본편>은 Phragmites longivalvis Steudel에 “갈대(달) (蘆)”라는 이름을 부여하고, Phragmites prostrata Makino에 “달뿌리풀”를 부여했다. Phragmites longivalvis Steudel은 현대 도감에서 갈대의 학명으로 사용하는 Phragmites australis (Cav.) Trin. ex Steud.의 synonym 이다. 현대 학자들은 달뿌리풀의 학명으로 Phragmites japonicus Steud.을 사용한다. Phragmites prostratus Makino는 현재 우리가 ‘큰달뿌리풀’로 분류하는 Phragmites karka (Retz.) Trin. ex Steud.의 이명이다.

******** 鴨島每年多定軍人 至於經朔赴役 取刈草葉薍 以待大小不時之需 – 광해군일기

+표지사진 - 억새, 2020.10.17 남한산성

(2023.10) <명물기략> 인용에서 글자 하나가 틀린 것을 발견했다. "菼담 俗轉달也"인데 이중 轉을 傳으로 잘못 인용했던 것이다. 글자를 교정하면서 번역도 맞게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황필수 선생의 갈과 달에 대한 어원 설명을 보게 되었는데, "俗言葭가 轉云갈"이라고 했고, "菼담 俗轉달也"라고 했다. 해석해보면, 갈대를 뜻하는 '葭가'에서 '갈'이라는 이름이 나왔고, 물억새를 뜻하는 '菼담'에서 '달'이라는 이름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중 '갈'은 살아남아 '갈대'가 되었고, 아쉽게도 '달'은 달뿌리풀로 잘못 비정하거나 혼동을 일으키다가 물억새라는 현대 이름에는 흔적이 없게 되었다. 또 한가지, 확인해야 할 사항은 억새 줄기 속이 비어있는지, 물억새 줄기 속이 차 있는지 확인이 필요하다.

(2024.5.31) (++) 조선말엽의 필사본인, 이종진의 <녹효방綠效方>에 野田蔓蘆에 “따에벗어나난갈”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이것은 ‘땅에 벋어 나가는 갈대’라는 뜻으로 달뿌리풀을 뜻한다. 이는 조선시대에 달뿌리풀을 갈대의 일종으로 보았으며, ‘갈’이라고 불렀음을 확인할 수 있는 문헌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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