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필기류 문헌의 식물 (4)
이옥(李鈺, 1760~1815)의 소품체 기행문 중흥유기重興遊記의 식물이야기 두 번 째이다. 때는 1793년 가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곳은 북한산 일대의 식물 기록이다. 초목 제 2칙을 읽어보자.
“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들 단풍이 너무 이르다고 말했는데, 산에 들어와보니 풍楓과 낙석絡石 및 나무로서 마땅히 붉어질 것은 이미 다 붉어졌다. 석류화 같은 붉음, 연지 같은 붉음, 분홍, 천화蒨花의 붉음, 성성이 피 같은 붉음, 시들어가는 붉음과 퇴색되어가는 붉음이 이르는 곳마다 색깔이 같지 않았다. 땅에 구별이 있고 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풍楓’은 중국에서는 ‘풍나무(Liquidambar formosana)’를 뜻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단풍나무를 뜻한다. 더 정확히는 <훈민정음 해례본>과 <훈몽자회>에 단풍나무속의 ‘신나무’를 뜻하는 글자로 나오지만 일반적으로 신나무(Acer ginnala) 뿐 아니라 단풍나무 류도 가리킨다. 더 넓게는 가을에 잎이 갖가지 색으로 물든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북한산에는 당단풍나무(Acer pseudosieboldianum)와 신나무가 광범위하게 자생한다. 그러므로 이 글의 ‘풍楓’은 당단풍나무와 신나무 등 단풍나무 류의 총칭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낙석絡石은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대개 털마삭줄(Trachelospermum jasminoides)을 뜻하며, 백화등白花藤 혹은 석벽려石薜荔라고도 한다. 동속 식물 마삭줄(Trachelospermum asiaticum)도 약재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털마삭줄은 상록수로, 줄기에서 기근을 내어 나무나 바위를 타고 자라는 덩굴성 나무이다. 따뜻한 곳을 좋아하여 우리나라 자생지는 경남, 전남, 전북, 제주의 바닷가 및 인근 산지이다. 그러므로 식생으로 보아 북한산에 털마삭줄이 자랄 리 없다.
이 ‘낙석絡石’은 한약재로 사용되어 본초류 문헌에 등장하는데, <동의보감> 탕액편에는 “絡石 담쟝이. 일명 석벽려石薜荔이다. 나무와 바위 사이에 자라며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다. 잎은 가느다란 귤나무 잎 같으며 나무와 바위 그늘로 길다랗게 뻗는다. 줄기 마디가 닿는 곳에 뿌리 수염이 생겨서 바위 곁을 감싸 안는다. 꽃은 희고 씨앗은 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기록을 통해 낙석絡石을 ‘담쟁이덩굴’로도 볼 수 있는 실마리가 생긴다.
물론 담쟁이덩굴(Parthenocissus tricuspidata)은 상록성이 아니라 낙엽지는 덩굴성 목본이고 꽃 색깔도 흰 색이 아니므로 한약재 낙석絡石은 아니다. 그렇지만 담쟁이덩굴은 우리나라 전국의 산지에 자생하고 있으므로 이옥이 북한산에서 목격한 絡石이 담쟁이덩굴일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낙석의 별명이 석벽려石薜荔라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필자는 브런치에 게재한 “김창협의 ‘대승암에 묵으며(宿大乘菴)’의 벽려薜荔는? – 담쟁이덩굴”***을 통해 조선시대 문인들이 벽려로 담쟁이덩굴을 뜻했음을 추정한 바 있다.
한편 이옥은 <백운필> 담초談艸에서, “벽려薜荔는 곧 낙석絡石이다”라고 자신의 식물명 이해를 기록했다. 이로 미루어보면 ‘중흥유기’에서 기록한 북한산의 낙석은 담쟁이덩굴임이 확실해진다. 담쟁이덩굴은 나무 또는 바위를 타고 높이 10m 이상 자라며, 가을에 진한 붉은색으로 단풍이 진다. 단풍이 고와서 이옥이 산에 들어와서 본 단풍의 대표로 단풍나무와 함께 언급할 만하다.
이제 갖가지 단풍의 빛깔을 묘사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식물명으로는 석류와 천蒨이 등장한다. 물론 이 둘은 북한산에 자생하는 식물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석류는 남쪽 지방에서 자라니 온실이 아니라면 북한산에 자랄 수 없다. <중약대사전>에 따르면 천초蒨草(혹은 茜草)는 갈퀴꼭두서니(Rubia cordifolia)를 가리키나 우리나라에서는 대개 동속식물인 꼭두서니(Rubia argyi)를 지칭하는 듯하다. 이 꼭두서니는 매염제로 뿌리로 비단에 진홍색 물을 들였다고 한다. 아마도 이옥도 갖가지 단풍 색깔 중에 꼭두서니로 물들인 듯한 진홍빛을 ‘천화蒨花의 붉음’으로 묘사한 듯하다.**** 이제 우리말 식물이름으로 중흥유기 초목 제2칙을 다시 읽어보자.
“산에 들어가기 전에는 다들 단풍이 너무 이르다고 말했는데, 산에 들어와보니 단풍나무와 담쟁이덩굴 및 나무로서 마땅히 붉어질 것은 이미 다 붉어졌다. 석류화 같은 붉음, 연지 같은 붉음, 분홍, 꼭두서니로 물들인 듯한 붉음, 성성이 피 같은 붉음, 시들어가는 붉음과 퇴색되어가는 붉음이 이르는 곳마다 색깔이 같지 않았다. 땅에 구별이 있고 나무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산의 식생에 맞는 이름을 사용하니 이옥의 글이 한결 생생하게 와 닿는다. 각종 단풍 색깔을 석류화 같은 붉음부터 퇴색되어가는 붉음까지 7가지 빛깔로 묘사하고 있다니, 과연 이옥은 형용사가 발달한 모국어를 한문으로도 잘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끝)
* 艸木二則. 未入山皆言楓太早 及入楓及絡石及木之宜紅者 已盡紅矣. 石榴花紅 胭肢紅 粉紅 蒨花紅 猩血紅 老紅退紅 随處而色不同 地之區而木之殊也 – 중흥유기 (참조: 완역이옥전집 2,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옮기고 엮음, 휴머니스트, 2009.)
** 絡石 담쟝이. … 一名石薜荔 生木石間 凌冬不凋 葉似細橘 蔓延木石之陰 莖節着處 卽生根鬚 包絡石傍 花白子黑” – 동의보감 탕액편
***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160 (중국에서 벽려薜荔는 학명이 Ficus pumila이고 우리나라에서는 푸밀라모람으로 불린다. 남부지방 해안가에 자생하는 모람이나 왕모람과 같은 류이다.)
**** “분수처럼 넘쳐나는 꼭두서니 노을에 - 백년설의 노래 '아주까리 수첩'과 진홍색 염색재 꼭두서니 뿌리 천근茜根”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97) 참고
+표지사진 : 담쟁이덩굴 단풍 (2020.10.25 성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