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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를 품어 더 아름다운 장미와 월계화, 그리고 찔레꽃

장미薔薇, 월계화月季花, 사계화四季花, 야장미野薔薇

by 경인

한 때 ‘그 여름의 마지막 장미 (The last rose of summer)’의 조금은 쓸쓸한 아일랜드 풍 멜로디를 흥얼거리던 때가 있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요즈음, 길 거리를 걷다가 한 두 송이 피어있는 장미꽃을 보면 이 멜로디가 떠오른다. 입동이 바로 코앞인데도 아직 장미는 꽃을 피운다. 봄부터 초겨울까지 거의 사계절 내내 피는 셈이다. “장미는 그 요염한 아름다움과 뇌살시킬 듯한 짙은 향기를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를 함께 수놓으며 사랑을 독점하고, 희비극의 주인공으로서 오늘날도 꽃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 원예가 최영전崔榮典(1923~?)이 1963년 <백화보百花譜>에서 장미를 소개하며 한 말이다. 공감이 간다. 장미는 정열적인 사랑의 상징이며, 젊은 시절 누구나 장미를 선사하거나 받으면서 가슴 설레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이 장미에 대해 최영전은 “오늘날과 같이 요염하고 향기로운 장미의 조상은 중국의 시넨시스(Rosa chinensis)였으며, 이집트인의 손을 거쳐 기원전 오천 년 대에 이미 서유럽에서 재배되었다고 한다. … 이 꽃이 우리나라에 재배된 것은 … 신라시대였다. 신라의 설총薛聰이 간諫한 화왕계花王戒에서 장미의 모습을 요염한 여인에 비긴 것으로서 알 수 있다.”라고 그 유구한 역사를 이야기한다.


장미-IMG_4465-20201025성남아파트단지내.JPG 장미 (월계화), 2020.10.25 성남

<삼국사기> 열전列傳의 설총薛聰(655~?) 부분에 화왕계花王戒가 나오는데, 장미 부분은 다음과 같다. “갑자기, 발그레한 얼굴에 옥 같은 이빨의 한 아름다운 여인이 곱게 단장하고 밝은 옷차림으로 사뿐사뿐 걸으며 얌전히 앞에 와서, ‘저는 눈처럼 흰 모래밭을 밟고 거울처럼 깨끗한 바다를 마주하면서, 봄비에 목욕하여 때를 씻고, 맑은 바람을 쐬면서 마음껏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제 이름은 장미薔薇라 하온데, 임금님의 높으신 덕망을 듣자옵고 저 향기로운 휘장 속에서 잠자리를 모시고자 하오니, 임금께서는 저를 받아주시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은연 중에 장미는 서양에서 근대에 들어온 원예 종 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요즈음 정원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장미는 실제로 그럴 것이다. 그런데 이 서양의 원예 종 장미의 조상이 중국 원산의 Rosa chinensis라니 흥미로웠다. 중국 원산이므로 이웃 나라인 우리나라에서도 재배한 역사가 깊을 터이다. 정태현의 <한국식물도감>이나 이창복의 <대한식물도감>을 보면 Rosa chinensis Jacquin를 ‘월계화’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식물도감에서 장미(Rosa)속을 아무리 뒤져봐도 ‘장미’라는 특정 종(species)은 없다. 대신 덩굴장미(Rosa multiflora var. platyphylla) 정도가 기재되어 있을 뿐이다. <국가표준재배식물목록>도 마찬가지이다. 장미속에서 원예용 교잡종을 제외하면 월계화(Rosa chinensis Jacq.), 목향장미(Rosa banksiae Aiton), 덩굴장미(Rosa multiflora var. platyphylla Thory) 정도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장미(Rose)로 지칭하는 것은 장미속(Rosa)에 속하는 원예용 장미를 총칭해서 부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대의 원예용 교잡종 장미가 없었을 가능성이 큰 신라시대 화왕계의 장미는 무엇이었을까?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고전 속의 장미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우선 <본초강목>에서 장미薔薇와 월계화月季花에 대한 설명을 살펴본다.


장미-20210605강화도.JPG 장미, 2021.6.5 강화도 - 담장에 기대어 자라는 분홍색 장미가 곱다.


“영실營實, 장미蘠蘼. 장미薔薇이다. … 이 풀은 부드럽고 크게 자라지는 않는 덩굴로 담장에 의지하여 자란다. 그래서 이름을 장미蘠蘼라고 한다. 줄기에는 가시가 많고 찔리기 때문에 사람이 잘 움직이지 못하는데, 소가 즐겨 먹으므로 산자山棘, 우륵牛勒 등 여러 이름이 있다. 그 열매는 다발을 이루며 나오는데, 영성營星 처럼 보여서 영실營實이라고 한다. … 홍경弘景은 ‘영실營實은 곧 장미薔薇 씨앗이다. 흰 꽃이 피는 것이 좋다. 줄기와 잎을 끓여서 마실 수 있다. 뿌리도 삶아서 술을 빚을 수 있다’라고 했다. … 장미薔薇는 들판의 구릉 사이에서 자란다. 봄에 어린 새싹 줄기가 나오면 아이들이 손톱으로 껍질과 가시를 제거하고 먹는다. 자라면 덩굴성 떨기를 이루며, 줄기는 단단하고 가시가 많다. 소엽小葉은 뾰족하고 얇으며 가느다란 톱니가 있다. 4, 5월에 꽃이 피면 사방에 보이며 꽃 중심은 노랗다. 흰 색과 분홍 두 가지가 있다. 열매는 다발을 이루어 맺히며 자랄 때는 푸르다가 익으면 붉어진다. 씨앗의 핵에는 금앵자金櫻子(Rosa laevigata Michx.) 핵처럼 흰 털이 있으며 8월에 채취한다. 뿌리는 아무 때나 채취한다. 인가에서 심어 완상하는 것은 줄기가 엉성하고 잎이 크며 여러 길(丈)로 길게 뻗는다. 꽃도 두텁고 크며 백, 황, 홍, 자 등 여러 색이 있다. 꽃이 가장 큰 것은 불견소佛見笑라고 하며, 작은 것은 이름이 목향木香이다. 모두 향기가 짙어 사람들이 좋아하지만 약용으로 쓸 수는 없다. 남번南番에 장미로薔薇露가 있는데, 이 꽃의 이슬 물이라고 하며, 향기가 특별하다.”**


“월계화月季花. 월월홍月月紅, 승춘勝春, 수객瘦客, 투설홍鬪雪紅이다. … 곳곳의 인가에서 많이 재배한다. 또한 장미薔薇 종류이다. 푸른 줄기가 긴 덩굴을 이루며 단단한 가시가 있다. 잎은 장미보다 작으며, 꽃은 심홍 색이고 수많은 두터운 꽃잎이 있고 다달이 피어난다. 열매는 맺지 않는다.”**


장미에 대한 좀 긴 인용이지만, 봄에 새로 자라는 줄기의 껍질을 벗긴 후 아이들이 먹는다는 것을 보면 어린 시절 찔레를 꺾어 먹던 추억이 떠오른다. <중약대사전>이나 <중국식물지>는 <본초강목>의 장미薔薇를 중국명 야장미野薔薇 혹은 다화장미多花薔薇라고 부르는 찔레꽃(Rosa multiflora Thunb.)이라고 했고, 월계화月季花는 우리나라와 같이 Rosa chinensis Jacq.로 보고 있다. <중약대사전>은 또한 월계화의 이명으로 사계화四季花를 들고 있고, 영실營實은 찔레꽃 열매로 설명하고 있다. <식물의한자어원사전>도 장미薔薇를 중국명 야장미野薔薇 혹은 다화장미多花薔薇로 찔레꽃(Rosa multiflora)이라고 했다. 참고로 <동의보감>도 영실營實을 “딜위여람”이라고 한글 훈을 달고 “야장미野薔薇의 열매이다”라고 설명했는데, ‘딜위’는 찔레의 고어이니 찔레 열매를 말한다. 그리고 <본초강목>은 찔레꽃의 변종으로 여러 가지 색의 큰 꽃을 한 차례 피우는, 목향 등의 재배종 장미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두자.


유박柳璞(1730~1787)은 <화암수록>에서 좋아하는 꽃과 나무를 아홉 등급으로 나누고 각각에 대해 짧은 해설과 감상을 기록한 “화목구등품제花木九等品第”를 남겼는데, 여기에 사계화와 장미가 나온다. 사계화四季花는 3등 부분에 “운치있는 벗. 붉은 꽃과 흰 꽃 두 종류가 있다. 꽃이 흰 것이 운치가 더 빼어나다. 꽃이 네 계절의 그믐에 피어서 이름을 사계라 한다. 그믐에 맞춰 꽃이 피는데 빛깔이 엷은 것은 월계화月季花 혹은 월월홍月月紅이라고 한다.”**** 또한 같은 책의 화개월령花開月令에서 사계화는 음력 3月, 6月, 9月에, 월계화는 4月, 5月, 8月에 핀다고 했다. 유희의 <물명고>에서는 월계화를 “야장미野薔薇와 매우 비슷한데 꽃잎이 많으며, 크고 붉은색 꽃이 사계절 끊이지 않고 핀다”고 했다. 사계화에 대해서는 “월계화의 별종別種이다“라고 했고, 야장미野薔薇는 “잎이 작고 가시가 많다. 4월에 흰 꽃이 피는데 분홍색인 것도 있다. 질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내용으로 보면 <화암수록> 등 우리나라 문헌에서 월계화와 사계화는 거의 같은 종류의 장미꽃으로 보아도 될 듯 하며 본초강목의 월계화月季花일 것이다. 즉 조선시대 화훼애호가들의 사랑을 받은 월계화/사계화가 현대 우리나라 식물도감의 월계화(Rosa chinensis Jacq.)일 것이며, 바로 우리가 장미라고 통칭하는 원예종 장미의 원형일 것이다.

장미-IMG_4502-다발로핀-20201025금토동.jpg 장미, 2020.10.25 금토동


재미있는 사실은 유박은 월계화와 사계화에 대해 시 한 수를 읊으면서, “중국의 그림에는 이 꽃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지금도 <본초>에서 무슨 이름으로 부르는 지 몰라 다만 우리나라 토산이라 일컫는다. 당나라 시에 정원에 핀 사계화를 노래한 구절이 있다”******라고 했는데, 아마도 <본초강목>의 월계화일 것이다.


韻多月月紅 운치 고와 달마다 붉은 꽃 피니

本草誰相當 본초 중 어느 꽃에 해당하려나

不是無名花 이름 없는 꽃은 절대 아니니

須看唐畵上 모름지기 중국 그림 속에서 보라


한편 장미는 ‘화목구등품제’의 5등 부분에, “좋은 벗이다. 황색과 홍색 두 가지가 있다”라고 짧게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화개월령’에서 장미는 음력 4월에 핀다고 되어 있다. 앞에서 중국과 일본 문헌의 장미薔薇는 찔레꽃이라고 설명했지만, 최소한 화암수록의 이 장미薔薇는 원예용으로 재배하는 꽃이기 때문에 찔레꽃은 아니다. 고려 시대 이규보李奎報(1168~1241)나 조선 시대 서거정徐居正(1420~1488) 등 문인들의 시에 등장하는 장미薔薇는 주로 황색이나 자색, 홍색의 꽃을 피우며 울타리나 시렁에서 덩굴을 이루어, 늦봄이나 초여름에 수많은 꽃송이가 만발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훈몽자회>에도 “장미薔薇, 덩굴 줄기에 가시가 많고 꽃은 황黃, 자紫, 백白의 세가지 색이다”로 설명되어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보면 장미는 일년에 한 차례만 꽃을 피우는 장미속 식물로, <본초강목>에서도 언급된 목향장미(Rosa banksiae Aiton)나 찔레의 변종으로 우리가 덩굴장미(Rosa multiflora var. platyphylla Thory)라고 말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화암수록이 지어진 18세기의 대표적인 장미꽃들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재배되고 있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며, 주로 황색 꽃을 피우는 목향장미와 자색, 홍색 꽃을 피우는 덩굴장미는 현대에도 많이 재배되기 때문이다. 한편 찔레꽃은 우리나라 고전에서 주로 야장미野薔薇로 표현되고 있다.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1658~1721)의 시 ‘찔레꽃 (野薔薇)’를 감상해본다.


每年塍塹雪紛紛 해마다 밭두둑과 구렁은 눈이 내린 듯 한데

馥郁淸香遠近聞 짙고 맑은 향기가 사방에 퍼지네

自落自開誰復賞 저절로 지고 피니 누가 다시 감상하랴

田家只用候耕耘 농가에서 다만 밭갈이 때로 알 뿐이네

찔레꽃-20200522용인.jpg 찔레꽃, 2020.5.22 용인


우리나라 전역에서 자라는 찔레꽃은 5월 초순에 처음 꽃이 피기 시작하면 절기로 입하立夏 무렵이므로 농가에서 밭갈이 때로 활용한다. 자하紫霞 신위申緯(1769~1845)의 시 ‘목화(木綿)’를 보면 “장미 피는 입하 절기를 놓칠까 두려워라 (恐失薔薇立夏時)”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 때 장미는 야장미野薔薇, 즉 찔레꽃을 뜻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해당화-20130607-천리포수목원.jpg 해당화, 2013.6.7 천리포수목원


그렇다면 조선 시대 여러 문인들이 시로 읊었고, 식물도감에도 수록되어 있는 월계화라는 이름을, 우리는 언제부터 사용하지 않게 되었는지 의문이 남는다. <일한사전>을 참고해보면, 일본에서는 장미薔薇를 바라(ばら)라고 하며, 월계화(Rosa chinensis Jacq.)를 코우신바라(庚申薔薇, こうしんばら)라고 했다. 그리고 서양의 로즈(Rose, ロ–ズ)를 일본어로 번역할 때 ‘바라(ばら)’, 즉 장미로 번역했을 것이다. 그래서 서양문명이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 월계화의 서양 원예종이 장미로 우리나라에 소개되면서, 월계화나 사계화라는 이름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라고 추정해볼 뿐이다. 지금까지 여러 문헌을 살펴보면서, 고려와 조선시대 고전에서 장미는 덩굴장미나 목향장미, 사계화/월계화는 월계화를, 야장미는 찔레를 가리킨다고 추정해보았지만 정작 화왕계의 장미가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왜냐하면 화왕계의 장미는 사는 곳이 바닷가 모래사장이라고 하여, 명사십리로 유명한 해당화(Rosa rugose Thunb.)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해당화는 줄기에 크고 작은 가시가 촘촘히 있고, 꽃도 장미만큼 풍성하지는 않으므로 해당화를 말한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월계화나 덩굴장미 류의 재배종으로, “요염한 아름다움과 뇌살시킬 듯한 짙은 향기를” 가지고 있었을 거라고 상상해볼 뿐이다. 강호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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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원예종 장미, 2021.11.6 아산 피나클랜드 - 모두 Rosa sinensis (월계화)의 후손일 것이다.


<끝>


* 忽有一佳人 朱顔玉齒 鮮粧靚服 伶俜而來 綽約而前曰 妾履雪白之沙汀 對鏡淸之海 而沐春雨以去垢 快淸風而自適 其名曰薔薇 聞王之令德 期薦枕於香帷王其容我乎 – 삼국사기

**營實,蘠蘼. 薔薇. … 時珍曰 此草蔓柔靡 依牆援而生 故名蘠蘼 其莖多棘 刺勒人 牛喜食之 故有山棘 牛勒諸名 其子成簇而生 如營星然 故謂之營實 … 弘景曰 營實即薔薇子也 以白花者爲良 莖葉可煮作飲 其根亦可煮釀酒 … 時珍曰 薔薇野生林塹間 春抽嫩蕻 小兒掐去皮刺食之 旣長則成叢似蔓 而莖硬多刺 小葉尖薄有細齒 四五月開花四出 黃心 有白色粉紅二者 結子成簇 生青熟紅 其核有白毛 如金櫻子核 八月採之 根采無時 人家栽玩者 莖粗葉大 延長數丈 花亦厚大 有白黃紅紫數色 花最大者名佛見笑 小者名木香 皆香艷可人 不入藥用 南番有薔薇露 云是此花之露水 香馥異常 – 본초강목

*** 月季花, 月月紅 勝春 瘦客 鬪雪紅. … 時珍曰 處處人家多栽插之 亦薔薇類也 青莖長蔓硬刺 葉小於薔薇 而花深紅 千葉厚瓣 逐月開放 不結子也 – 본초강목

**** 四季. 韻友. 有紅白兩種 花白者韻勝 花開四季朔者名四季 逐朔花開而色淡者名月季 一名月月紅 – 화암수록 화목구등품제 3등 (정민 등 번역 인용)

***** 月季花 : 極似野薔薇 而千瓣大紅花四時不絶. 四季花 : 月季別種. 野薔薇 : 葉細多刺 四月白花 亦有粉紅者, 질내 – 물명고

****** 月四季. 唐畵多寫此花 而尙不知本草中爲何名 只稱我國土産 而唐詩有咏 園開四季花 一句 – 화암수록 (정민 등 번역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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