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柳, 양楊, 수양水楊, 백양白楊,『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엄동설한이 지나 개울 가의 갯버들(Salix gracilistyla Miq.)에서 버들강아지가 피기 시작하면 우리는 비로소 새봄이 왔음을 느낀다. 어릴 적 물이 오른 갯버들 가지를 꺽어서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어 본 추억은 시골에서 자랐으면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나도 어린 시절에 봄마다 조무래기 친구들과 함께 버들피리를 만들어 불었다. 곧 수양버들의 하늘하늘 늘어진 가지가 연두색으로 변하면서 봄이 무르익는다. 이른바 “계변양류사사록 溪邊楊柳絲絲綠”이다. 이처럼 버들은 봄을 상징할 뿐 아니라, 우리네 삶과 정서에 깊숙하게 들어와있는 나무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로 이름이 유화柳花, 즉 버들꽃이다. 고려의 태조 왕건과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도, 바가지에 버들잎을 띄워 마실 물을 준 여인과 인연을 맺는다. 즉, 버들은 우리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 지혜로운 여인의 상징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런 역사를 반영하듯, 한글이 창제된 후 1446년 간행된 <훈민정음 해례본>에서 “‘버들’은 류柳가 된다”고 하여, 순 우리 말인 '버들'을 예로 들어 한자로 해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봄의 정경과 사랑을 노래하고 그릴 때 등장하고 있다.
大同江上送情人 대동강서 고흔님 이별을 할제
楊柳千絲不繫人 무어라 저 실버들 님을 못 얽어
含淚眼着含淚眼 우는 눈은 우는 눈 서로 대하고
斷腸人對斷腸人 설은 맘은 설은 맘 애 끊이는고.
안서岸曙 김억金億이 번역한 계월桂月의 시, ‘무심한 실버들’인데, 이때 버들은 정인과의 이별을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버들은 우리네 정서를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 고전에서 버들을 뜻하는 글자로는 양楊과 류柳가 있다. <훈몽자회>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옥편에서 두 글자 모두 ‘버들’로 훈을 달고 있어서, 양楊과 류柳가 지칭하는 나무를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양류楊柳 처럼 두 글자가 같이 쓰여 수양버들(Salix babylonica L.)을 뜻하기도 하지만, 고전에도 양楊과 류柳는 다른 나무를 가리켰을 가능성이 크다.
<훈몽자회>를 보면, 양楊은 “버들양, 위로 일어나는 나무”로, 류柳는 “버들류, 아래로 늘어지는 나무”로 설명하고 있다. 류희의 <물명고>에서는 류柳는 ‘버들’, 양류楊柳는 ‘슈양버들’로 우리말 훈을 적고 있다. 그리고, <광재물보>에서는 류柳에 대해 “버들, 양楊과 류柳는 한 무리에 속하는 두 종류의 나무이지만 상호 같은 이름으로 부른다. 초봄에 움이 트고 곧 노란 꽃술의 꽃이 생긴다.”*라고 했다.
한편 <물명고>와 <광재물보>에는 양楊을 다루는 항목이 없다. 대신 수양水楊과 백양白楊이 나오는데, 수양水楊에 대해서 <물명고>에서 ‘갯버들’, <광재물보>에서 ‘개버들, 잎이 둥글고 조금 넓은데 뾰족하다. 가지는 짧고 단단하며 류柳와 완전히 다르지만 꽃은 서로 같다.”**라고 했다. <산림경제>에도 수양水楊을 “시냇가의 잎이 크고 붉은 가지를 가진 버들 (溪邊大葉赤枝之楊)”로 기술한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갯버들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백양白楊에 대해서는 <물명고>에서 “잎은 배나무 같고 잎자루가 약하다. 미풍에도 떨린다, ‘사사나모’”***, <광재물보>에서는 “’사시나무’, 잎이 배나무 잎처럼 둥글고 두텁고 뾰족하다. 앞면은 푸르고 뒷면은 흰색이며 거치가 있다. 나무 재질은 세밀하고 희며, 굳세고 곧다. 그 잎은 스스로 움직인다.”****라고 서술하고 있다.
즉, 같은 버들 양(楊)을 쓰지만 수양은 갯버들, 백양은 사시나무로 보는 것이다. 명나라 이시진의 <본초강목>도 류柳와 양楊을 모호하게 구분하고 있다. 즉, 류柳의 별칭으로 소양小楊, 양류楊柳를 들고, “양楊을 류柳로 일컬을 수 있고, 류柳 또한 양楊으로 일컬을 수 있다. 그래서 지금 남쪽 사람들은 양류楊柳라고 함께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문헌에 의거해 보면, 버들 류柳는 버드나무(Salix)속의 나무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버들 양楊은 수양水楊처럼 버드나무속의 나무를 가리킬 수도, 백양白楊처럼 사시나무(Populus)속의 나무를 가리킬 수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아>에서 “양楊은 포류蒲柳이다”라고 했듯이, 고대에는 양楊과 류柳를 섞어서 쓰다가, 후대로 오면서 점차 구분하여 썼을 가능성도 있다.
우리 속담에 “사시나무 떨 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사시나무는 잎자루가 길어서 미풍에도 잎새가 흔들리기 때문인데, <본초강목>의 백양白楊 설명에도 “일명 고비高飛이다. … 또한 바람에 홀로 흔들려서 ‘독요獨搖’라는 이름을 얻었다.”*****라고 했다. 이 백양을 <물명고>와 <광재물보>에서 ‘사시나무’라고 했고, <동의보감>에도 백양수피白楊樹皮를 ‘사시나무 껍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중약대사전>에서도 백양수피白楊樹皮를 산양山楊(Populus davidiana Dode.)의 껍질이라고 했는데, 산양은 곧 사시나무이다. 그러므로 고전에서 백양白楊은 사시나무 류임이 거의 확실하다. 이 백양白楊은 고대 중국에서 무덤에 심는 나무였다고 한다.
<한국의 나무>에는 한반도에 자생하는 나무로 버드나무속에는 18종의 나무가 실려있고 하천이나 계곡 어디서나 볼 수 있다. 한편 사시나무속의 나무로는 사시나무와 황철나무 2종만 있다. 또한 사시나무는 경남 및 전남 이북의 산지 및 계곡부 사면에 드물게 자라고, 황철나무도 강원도 깊은 산의 하천 및 계곡부에 자라므로 민가 근처에서 쉽사리 볼 수 있는 나무는 아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보면 우리 고전에서 류든 양이든 '버들'이라고 훈을 달았던 글자는 버드나무 속의 나무를 뜻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고전에서 양楊을 만나면, 문맥을 잘 살펴야 한다. 민가 근처의 정경을 묘사하고 있으면 '버드나무'나 ‘수양버들’로, 개울 가의 관목류를 가리키면 ‘갯버들’ 혹은 '키버들', 그리고 산 속이나 무덤 등의 맥락을 가지고 있으면 ‘사시나무’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좋겠다.
<시경>에 양楊이 나오는 시가 여러 편 있는데, <시경식물도감>에서는 청양靑楊(Populus cathayana Rehd.)로 보고 있고, <식물의 한자어원사전>에서는 은백양銀白楊(Populus alba)이나 모백양毛白楊(Populus tomentosa) 등으로 설명하고 있다. 모두 사시나무속이므로 우리말로 번역한다면 사시나무가 적당할 것이다. 이제 <시경> 소아小雅의 ‘남산에는 사초가 있고 (南山有臺)’를 감상해보자.
南山有桑 남산에는 뽕나무가 있고
北山有楊 북산에는 사시나무가 있네
樂只君子 즐거워라 군자여
邦家之光 나라의 빛이로다
樂只君子 즐거워라 군자여
萬壽無疆 끝없이 사시기를
영시에도 “사시나무 잎처럼 떤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시나무는 미풍에도 떨리는 나무로 유명세를 탄 나무이다. 나는 오랫동안 이 유서깊은 표현의 사시나무를 만나고 싶어했다. 사시나무와 은백양의 교잡종으로 야산에 많이 심어진 은사시나무는 인근의 청계산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은사시나무도 미풍에 떨리는 모습을 볼 수 있지만, 진짜 야생 사시나무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시나무를 볼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2019년 7월 열두달숲 정선 답사에서 드디어 사시나무를 만났다. 가파른 비탈길을 앞서 가던 일행이 사시나무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반가운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조금 거칠어진 얼룩덜룩한 회백색 수피를 어루만져 보고, 미풍에 떨리는 잎새들을 보면서 한참 동안 기쁨에 젖을 수 있었다.
(2018.8.5 처음 쓰고 2021년 3월 보완. 이가원 시경 번역 참조.)
<『옛글의 나무를 찾아서』, 이유출판, 2023, pp.171~178. 초고>
*柳, 버들, 楊柳一類二種 互相稱呼 春初生柔荑 卽生黃蕊花 – 광재물보
**水楊, ‘개버들’ 葉圓微闊而尖 枝條短硬 與柳全別 花則相仝 - 광재물보
***白楊, 葉似梨而蒂弱 風微亦搖 ‘사사나모’ – 물명고
****白楊, ’사시나무’, 葉圓似梨葉而肥大有尖 面靑背甚白色 有鋸齒 木肌細白 性堅直 其葉自動 - 광재물보
***** 柳, 小楊 楊柳 … 楊可稱柳 柳亦可稱楊故今南人猶倂稱楊柳. 白楊, 獨搖 … 木身似楊微白 故曰白楊 … 白楊一名高飛 … 且白楊亦因風獨搖 故得同名也 – 본초강목
****** European aspen (Populus tremula L.) : The botanical name tremula is derived from the fact that the leaves, which are borne on slender flattened petioles (leaf stalks), tremble and quiver in even the slightest breeze. ‘To tremble like an aspen leaf’ is a phrase that goes back to the time of the English poet, Edmund Spenser (1522~1599). – The World Encyclopedia of Trees.
+표지사진- 버드나무, 2022.4.3 여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