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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May 21. 2021

방랑 시인과 설움을 함께 한 시무나무

추樞, 자유刺楡

선친께서 남기신 책 중에 손수 두툼한 종이로 표지를 만들고 붓으로 <김립시집金笠詩集>이라 쓴 책이 한 권 있다. 김삿갓으로 불린 김병연(金炳淵 1807~1863)의 시집으로, 1977년 대구시 중구에 주소지를 둔 서울출판사에서 간행했다. 거친 갱지 102장에 조잡하게 인쇄된 책으로, 제목이 있던 앞 표지는 없어졌고 맨 뒤 페이지의 판권지만 남아있다. 본문의 마지막 줄에 ‘각주상해 김립시집료 (脚註詳解 金笠詩集了)’라고 씌어있어서 본래 책 제목을 추정할 수는 있다. 출간 당시 정가 250 원으로, 아마도 선친께서 시골 장터에서 장돌뱅이 책장수에게서 구입한 듯하지만, 선친의 손길이 베어 있어서 나에겐 소중한 책이다. 이 책의 첫 시가 ‘스무나무 아래에서 (二十樹下)’이다.

 

김립시집의 二十樹下 (1977년 대구 간행) - 표지 글씨는 선친 필적이다.


二十樹下三十客 스무나무 아래 설운 손이요

四十家中五十食 마흔 집 가운데 쉰 밥이다

人間豈有七十事 인간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不如歸家三十食 돌아가서 설은 밥 먹는 것만 못하다.


둘째 구는 ‘망할 놈의 마을에선 쉰 밥을 주더라 (四十村中五十食)’로 된 판본도 있는데, 이시는 김삿갓의 파격적 풍자시의 대표로 인구에 회자되어 왔다.


시무나무, 2021.5.8 영월 - 남면의 어느 마을 길 가에 자라고 있다.


지난 2월 8일 나는 나무애호가들과 함께 경기도 가평의 화야산 큰골계곡으로 겨울 나무를 감상하러 갔다. 개울 가에 서 있는 아름드리 나무 앞에서, 김태영 선생이 이 시를 인용하면서 시무나무(Hemiptelea davidii [Hance] Planch.)를 설명했는데, 선친의 손때 묻은 책이 떠올라 한동안 감상에 젖어 있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수많은 잔 가지가 얽혀있는 나무를 쳐다보니, 아직 가지마다 조그마한 열매를 매달고 있었다. 봄에 꽃을 피워 여름에 열매가 맺혔을 텐데 겨울이 다 가도록 매달고 있는 것이 기특했다.

 

시무나무 겨울 모습, 2020.2.8 화야산


김삿갓이 ‘이십수二十樹’라고 쓴 이 시무나무는 <시경> 등 고전에서 추樞나 자유刺楡로 쓴다. <시경> 당풍唐風에 ‘산에는 추樞가 있네 (山有樞)’라는 시가 있고, 주자는 <시경집전詩經集傳>에서 “추樞는 치荎이다. 지금은 자유刺楡라고 한다*”로 해석했다. <본초강목>에서는 “자유刺榆는 자柘(꾸지뽕나무,  Cudrania tricuspidata Carriere)와 같은 바늘 가시가 있다. 잎은 유榆(비술나무) 같은데, 데쳐서 나물국을 만들면 백유白榆보다 좋다**”로 나온다. <중국식물지>나 <시경식물도감>, <북경삼림식물도보> 등에 의하면 현대 중국명으로도 자유刺楡는 ‘시무나무’를 가리킨다.


시무나무 꽃차례, 2021.4.16 화야산


우리나라에서도 <훈몽자회>에 “자유수刺楡樹 스믜나무”가 나오고, 추樞는 “지도리 츄”로만 나오지만, 앞에서 소개한 주자의 “추樞는 자유刺楡”라는 주석 때문에 자연스럽게 추樞를 시무나무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설명을 이어받아 <물명고>에도 자유刺榆와 추樞는 ‘스믜나모’, <광재물보>에서도 ‘쓰무나무’로 나온다. 정태현의 <조선삼림식물도설>도 시무나무의 한자명으로 자유刺榆와 추樞 등을 기재했다. 이런 사정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고전의 추樞와 자유刺榆를 대체로 시무나무로 바르게 번역할 수 있었다.


시무나무 열매, 2020.5.30 여주 - 열매 한쪽에만 빈약한 날개가 있어서 속명 Hemiptelea가 붙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아억각비>에서 “우리나라 민간에서, 비술나무(白楡)는 들에서 자라고 [방언으로 ‘늘읍’이라고 한다], 시무나무(剌楡)를 가정에 심는다 [방언으로 ‘늣희’라고 한다]***”라고 하여, 자유刺楡를 ‘늣희’ 즉, 느티나무(Zelkova serrata [Thunb.] Makino)라고 했다. 황필수(黃泌秀 1842~1914)의 <명물기략名物紀略> 수목부樹木部에도, “자유, 민간에서 ‘龜木귀목’이라고 한다. 또한 소유蘇楡라고 하는데, ‘느틔나무’로 바뀌었다. 나무는 꾸지뽕나무(柘) 같고, 잎은 비술나무(楡) 같다. 우리나라 풍속에 사월 팔일 잎을 채취하여 떡을 만든다. 추樞이다. 이원교(員嶠 李匡師, 1705~1777)는 황유黃楡를 ‘느틔’, 자유刺楡를 ‘스믜나무’라고 했다.****”가 나온다.


시무나무 가시, 2021.1.9 의성


이를 보면, 조선시대 일부 학자들이 자유刺榆를 느티나무로 보았고, 일부는 시무나무로 본 듯 하다. 하지만, 느티나무 가지에는 가시(刺)가 없고, 시무나무에는 있는 점으로 미루어 자유剌楡는 시무나무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참고로 <훈몽자회>에서는 “황유수黃楡樹 누튀나모”가 나온다. 마지막으로 앞에서 언급한 <시경>의 시를 감상해보자.


산에는 시무나무 - 山有樞

 

山有樞             산에는 시무나무가 있고

濕有楡             진펄엔 비술나무가 있네.

子有衣裳          그대에게 옷이 있어도

弗曳弗婁          걸치지 않고,

子有車馬          그대에게 수레와 말이 있어도

弗馳不驅          타지 않고 아끼다가,

宛其死矣          만약 그대 죽게 되면

他人是愉          남이 그걸 즐기리라.

 

 

<끝 2020.2.12 이가원 번역 <시경> 참고>

 

* 也 今刺楡也 - 詩經集傳

** 有鍼刺如柘 其葉如 瀹爲蔬羹 滑於白 – 本草綱目

*** 吾東之俗 白楡野生 [方言云늘읍] 刺楡家種 [方言云늣희] - 雅言覺非

****  俗言龜木귀목 又曰蘇楡 轉云느틔나무 樹如柘葉如楡 東俗四月八日取葉作餠 o 樞 o 李員嶠 以黃楡爲느틔 刺楡爲스믜나무 - 名物紀略 樹木部

+표지사진: 시무나무 가시, 2020.5.30 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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