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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May 14. 2021

남쪽 지방의 사철 푸르른 후박나무와 한약재 후박厚朴

2018년 4월 중순 여수에서 새로 난 잎과 함께 꽃망울이 송이 송이 맺힌 후박나무를 만났다. 처음 본 후박나무는 연두색 신록과 황록색 꽃이 어울려 너무나 이채로웠다. 그 후 남쪽 지방에 갈 때마다 후박나무를 감상할 수 있었는데, 꽃눈과 잎눈이 함께 들어있는 겨울눈이 오동통하여 다른 나무와 구별할 수 있게 한다. 녹나무과에 속하는 후박나무(Machilus thunbergii)는 상록교목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울릉도와 제주 및 서남해도서에 자생하는데, “한약재 후박厚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고 <한국의나무>는 설명하고 있다.


후박나무 꽃, 2018.4.14 여수


이를 반영하듯, 정양용의 <아언각비>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후박厚朴이라고 하는 나무는 한약재로 사용하는 진짜 후박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잡목을 후박厚朴이라고 하고 덩굴풀을 목단牧丹이라고 하는 것이 옳겠는가? 허준許浚(1539~1615)은 동의보감東醫寶鑑 탕액본초湯液本草를 편찬하면서 후박厚朴에 당唐 자字를 표기했다. 당시에는 중국에서 수입했던 것이다. 근세에 의약을 대강 알던 제주의 비장裨將이 겨울에 푸른 잡목(어떤 나무인지 모르겠다)을 보고서 망발로 후박이라고 지목했다. 드디어 중국에서 사들여 오던 것을 폐지했다. (강진과 해남에도 이 나무가 있다. 가지와 잎이 동백과 비슷하다.) 내가 옛적에 북경 시장에서 후박을 사서 맛을 보니 조금 맵고 매우 강렬해서 속이 통하면서 기운이 내려졌다. 그러나 제주에서 온 것은 맛이 이상하고, 씹어보니 물기가 있는데 소의 침 같이 끈끈했다.”*


후박나무 잎과 겨울눈, 2018.12.9 진도


정약용은 후박나무 껍질이 동의보감의 약재 후박厚朴은 아닐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다면 <동의보감>에 기록된 후박은 무슨 나무의 껍질일까? <동의보감탕액편>에서는 후박 이름 위에 ‘당唐’ 자字를 표기했고, 약재의 특성과 효능을 언급한 후 “살이 두텁고 자색으로 윤이 나는 것이 좋고, 얇고 흰 것은 쓸 수 없다”**고 한 후, 인용문헌으로 ‘본초本草’, 즉 송나라의 증류본초(重修政和經史證類備用本草)를 적고 있다. 이로 보아 후박은 중국 약재이고 중국 본초학 문헌에서 말하는 나무일 것이다.


이시진은 <본초강목>에서, 후박에 대해 “이 나무는 바탕이 순하고 껍질이 두텁다. 맛은 맵고 아리며, 색은 적자색이다. 그래서 후박厚朴, 열박烈朴, 적박赤朴 등 여러 이름이 있다. … 나무 크기는 서너 장丈이며 직경은 한두 척尺이다.  봄에 떡갈나무 잎(槲葉) 비슷한 잎이 나고 사철 시들지 않는다. 꽃은 붉고 열매는 푸르다. 껍질은 비늘처럼 아주 쭈글쭈글하고 두텁다. 자색으로 윤이 나는 것이 좋은 것이고, 얇고 흰 것은 쓸 수 없다. … 후박 나무의 겉 껍질은 밝고 살은 자주색이며, 잎은 떡갈나무 잎과 같다. 5, 6월에 자잘한 꽃을 피운다. 동청冬青 열매 같은 열매를 맺는데, 푸른 색이다가 익으면 붉어지고 씨앗이 있다. 7, 8월에 채취하며 맛은 달고 좋다.”***고 설명했다. 역시, <동의보감탕액편>의 설명이 <본초강목>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목련, (좌) 미성숙 열매, 2019.6.9 양평, (우) 꽃, 2020.5.10 홍릉수목원 - 일본목련의 껍질도 약재 후박의 대용으로 쓰인다.


오피키날리스목련 Magnolia officinalis, 2021.8.15 제이드가든 - 중국에서 이 나무의 껍질을 후박이라고 한다.


<중약대사전>과 <중약채색도집> 등 중국의 여러 본초학 문헌이나 <중국식물지>에서는, 목련과 목련속의 “Magnolia officinalis Rehder et. Wilson”의 껍질을 후박이라고 한다. 이 나무는 중국에서 후박厚朴으로 부르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중국후박, 또는 당후박唐厚朴이라고 한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일본 원산의 일본목련(Magnolia obovata Thunb.)을 후박나무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일본목련의 껍질도 후박의 대용 약재로 쓰이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도 일본목련을 일본후박(日本厚朴)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일본목련은 중국후박과 같은 속에 속하므로, 녹나무과의 후박나무보다는 약효가 유사할 수도 있겠다.


본초강목의 설명 중,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사계절 시들지 않는다’라든가, ‘5, 6월에 자잘한 꽃을 피운다’이다. 중국후박이나 중국목련, 일본목련은 모두 낙엽교목으로 흰색의 커다란 꽃이 핀다. 정약용이 언급한 제주비장이 바로 이러한 설명을 보고 ‘겨울에 푸른 잡목’을 약재 후박을 생산하는 후박나무로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후박나무(Machilus thunbergii)는 사철 푸르고, 봄에 자잘한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후박나무숲, 천연기념물 123호, 2022.5.23 변산반도


몇 해 전에 한도준(韓道濬)과 김수만(金壽萬)이 편찬하여 1931년에 초판을 발행한 <선한약물학鮮漢藥物學>이라는 책을 구했다. 이 책은 당시 도입된 서양의약에 대응하여 한의학의 과학화를 위해 편찬되었으며, 한약재의 화학적 성분에 대한 연구 성과를 기술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일부 한약재에 대해서는 해당 식물의 우리말 이름과 학명을 부기하고 있다. 후박厚朴을 찾아보니 우리말로 “후박나무 (남목楠木, 남자목楠仔木)”으로 표기하고, <본초강목>의 내용을 인용하고 있었지만 학명 설명은 없었다. 1944년 행림서원 발행 <향약집성방>에도 후박을 “남목楠木, 남자목楠仔木”으로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후박나무(Machilus thunbergii)를 중국에서는 홍남紅楠, 즉 남楠 나무의 일종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선한약물학>이나 <향약집성방>에서 후박 설명에 남목(楠木)을 부기한 것은 아마도 우리나라 남쪽지방의 후박나무를 나타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 문헌들에서는 후박厚朴을 우리나라 후박나무의 껍질로 보았을 가능성이 크다. 즉, 정약용이 <아언각비>에서 후박厚朴은 중국산 약재이고 우리나라에는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제로 후박나무 껍질을 오랫동안 한약재 후박厚朴으로 대용해왔던 것이다. 1530년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제주목 토산 조에 후박厚朴이 있는 것으로 보아 후박나무라는 이름의 사용도 유래가 깊다. 그 결과,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조선명은 그대로 채용함’을 향명 사정査定 요지의 첫째로 삼아 1937년에 발간된 <조선식물향명집>도 Machilus thunbergii에 ‘후박나무’라는 이름과 함께 한자 ‘厚朴’을 병기했던 것이리라. 그 후, <조선삼림식물도설>과 <한국식물도감>에도 이어져 현재에 이르렀다.


중국목련(Magnolia biloba), 2020.5.10 홍릉수목원 - 이 중국목련의 나무 껍질도 한약재 후박이다.


나는 2020년 5월 홍릉수목원에서 ‘중국목련(Magnolia biloba)’ 푯말을 달고 있는 나무를 만났다. 나무 모습이 일본 목련과 흡사했는데, 중국에서 요엽후박凹葉厚朴으로 부르는 중국목련도 한약재 厚朴을 생산하는 나무라고 한다. 약재의 효능이 무엇이 더 좋은지는 내 관심사 밖이지만, 약성은 각 나무마다 조금씩 다를 터이다. 중국산 후박과 약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정약용 선생이 잡목으로 타박하긴 했지만, 우라나라 남도에서 자라는 후박나무도 그 나름의 약성은 있을 것이다. 어쨌든, 후박나무는 사철 푸르른 무성한 잎과 5월의 꽃이 이채로운 멋진 나무이다.


<2019.7.21 쓰고, 2021년 1월  보완>


* 雜樹以爲厚朴 蔓草以爲牧丹可乎 許浚撰東醫寶鑑湯液本草 厚朴標唐字 此時猶唐貿也 近歲濟州裨將有粗知醫藥者 見冬靑雜樹 (不知爲何木) 妄指爲厚朴 (遂廢唐貿 康津海南 亦有此樹 柯葉如山茶) 余昔貿之於燕市 其味微辣峻烈 通中下氣 而濟州來者味憃 嚼之有沫如牛涎 – 아언각비

**(唐)厚朴, … 以肉厚色紫而潤者好 薄而白者不堪用 … 本草 - 동의보감탕액편

***其木質朴而皮厚 味辛烈而色紫赤 故有厚朴烈赤諸名 … 木高三四丈 徑一二尺 春生葉如槲葉 四季不凋 紅花而青實 皮極鱗皺而厚 紫色多潤者佳 薄而白者不堪 … 朴樹膚白肉紫葉如槲葉 五六月開細花 結實如冬青子 生青熟赤 有核 七八月採之 味甘美- 본초강목 후박

+표지사진 - 후박나무, 2020.11.15 서귀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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