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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Dec 29. 2020

미려한 얼룩 무늬를 가진 남도의 나무, 육박나무

육박六駁

내가 이름으로만 듣던 육박나무를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봄 여수 금오도 에서다. 경북 북부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 경기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로서는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이 나무를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정학유丁學游(1786~1855)의 <시명다식詩名多識>은 시경에 나오는 수많은 식물과 동물을 해설한 흥미로운 책인데, 2007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을 때 참고용으로 마련해 두었다. <시경식물도감>을 구한 후에, 나는 두 책의 식물 이름을 하나씩 비교해 본 적이 있다. 대략 170여 종의 수록 식물 중에서 100여종은 이름이 동일하고 20여종은 유사한데 반해, 40여종은 완전히 달랐다. 아마도 다른 것들은 <시명다식> 번역본을 제고해봐야 할 가능성이 큰데, 예를 들면, <시경식물도감>에서 다래 종류로 본 장초萇楚를 <시명다식> 번역본에는 ‘보리수나무’로 설명하고 있는 것 등이다. 육박六駁에 대해서는 양 쪽 모두 육박나무(Litsea coreana H. Lev.)로 보고 있었는데, 이 책들 덕분에 나는 이 특이한 이름의 육박나무를 기억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금오도에서 육박나무를 처음 봤을 때, 군복의 얼룩 무늬 같은 수피를 가진 그 나무가 유독 반가웠다. 

육박나무 잎, 2018.4.14 금오도

그 후, <시경>에서 육박나무가 나오는 진풍秦風 시, ‘새매 (晨風)’를 찾아보기도 하고, <한국의 나무>에서 육박나무를 꼼꼼히 읽어보기도 했다.


鴥彼晨風 후르륵 새매가

鬱彼北林 울창한 저 북쪽 숲 위를 날건만,

未見君子 그이를 보지 못해

憂心欽欽 시름겨운 마음은 하염없어라.

如何如何 어쩌라고 어쩌라고

忘我實多 날 이다지도 잊으셨나요?

山有苞櫟 산에는 새순 돋는 상수리나무가

隰有六駁 들판에는 육박나무가 있건만,

未見君子 그이를 보지 못해

憂心靡樂 시름겨운 마음은 즐겁지 않아라.

如何如何 어쩌라고 어쩌라고

忘我實多 날 이다지도 잊으셨나요?


<한국의 나무>를 보면, 이 육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우리나라 남해 도서 및 제주도에서 자라고, 일본 혼슈 이남과 타이완 중부에도 자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국명은 나무껍질이 육각상으로 벗겨지는(六駁) 특징에서 유래했다”라고 했다. 육박나무의 종소명이 ‘coreana’로 우리나라를 가리키고 있어서, 중국에도 자생하는지 궁금해졌다. <중국식물지>를 찾아보니 육박나무(Litsea coreana Levl. var. coreana)를 조선목강자朝鮮木姜子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한 육박나무 변종으로 모표피장毛豹皮樟(L. coreana var. lanuginose)과 표피장豹皮樟(L. coreana var. sinensis)이 중국 중남부 여러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육박나무 수피, 2018.11.10 제주도

박駁이라는 글자는 <전운옥편>에 “말, 잡색(馬 雜色)”으로 나오므로, 말 종류나 얼룩덜룩한 모양을 나타낸다. 육박六駁은 글자 자체로는 나무를 가리키는지 알기 어려운데, 나무 껍질 무늬를 보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명에서는 얼룩말(駁) 대신 표범(豹) 무늬를 차용한 것이 흥미롭다. 이 육박六駁이라는 식물 이름은 <본초강목>이나 <중약대사전>의 표제어로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헌에도 이 글자로 식물명을 가리키는 용례는 거의 없고, 대개 ‘논박論駁하다’, ‘반박反駁하다’, ‘잡박雜駁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있다. 오직 시경에서만 나무 이름으로 사용된 글자인데, 정학유의 <시명다식>에 육박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주자가 말하였다. 박駁은 재유梓楡이니, 그 껍질이 박駁(얼룩배기말) 같은 청백색이다. 육씨陸氏가 말하였다. 나무껍질은 푸르고 흰 얼룩소(박락駁犖) 같고, 멀리서 보면 얼룩말(박마駁馬) 같아서 박駁이라고 했다. 이시진李時珍이 말하였다. 박마駁馬는 재유梓楡이니, 또 육박六駁이라 이름한다. 껍질 색은 푸르고 희며, 많이 얼룩덜룩하다. 또 단목檀木과 비슷하다.”*


이 중, 주자가 말한 것은 <시경집전詩經集傳>에 보이고, 이시진의 해설은 <본초강목> 교목류에서 단檀을 설명하는 부분 말미에 있다. 북송의 학자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여간, 이러한 문헌을 참고했을 때, 진풍秦風 시, ‘새매 (晨風)’에 나오는 육박六駁은 짐승 이름이 아니라 나무 이름이고, 우리가 육박나무로 부르는 남도의 나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박나무, (좌)  2018.12.8 달마산, (우) 2020.11.15 제주도

육박六駁이나 재유梓楡는 <물명고>나 <광재물보>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단, 박駁과 같은 글자로 쓰이는 박駮과 박마駮馬는 나무이름으로 <물명고>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박駁 - 적리赤李, 지금의 자도(紫桃)가 아닌지 의심된다.” “박마駮馬 - 껍질은 개(狡)처럼 푸르고 희며, 또한 단檀 종류이다. 그래서 옛 말에 ‘단檀을 자를 때 살피지 않으면 계미檕迷를 얻게 되고, 계미檕迷를 구하려다 오히려 박마駮馬를 얻는다’라고 했다. 혹시 ‘무푸레’ 종류가 아닐까.”*** 


이 해석을 좀더 보충하기 위해 <중약대사전> 등 본초학 문헌을 참조해보면, 단檀은 대표적인 향목으로 백단白檀, 전단旃檀 등으로 불리는 단향檀香(Santalum album) 류가 있지만, 이들은 열대지방에서 자라므로 제외하면, 청단靑檀(Pteroceltis tatarinowii Maxim) 정도로 볼 수 있다. 계미檕迷는 협미莢蒾의 이명으로 가막살나무(Viburnum dilatatum Thunb.)이다. ‘무푸레’는 물푸레나무를 말하는 것일 터인데, 사실 청단과 가막살나무, 육박나무는 따뜻한 지방에 자란다는 것 외에 딱히 유사하다고 할 만한 요소는 없다. 또한 이 나무들이 모두 잎이 단엽이라서 복엽인 물푸레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유희柳僖 선생도 육박나무는 모르고 있었던 듯 하다. 참고로, 일본 한자사전 <한어림漢語林>을 살펴보면 박駮의 뜻 중 하나가 마유미(まゆみ), 즉 참빗살나무(Euonymus sieboldianus Blume)이고, 우리나라 <한한대사전>에서도 박駮을 참빗살나무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육박六駁은 황필수黃泌秀(1842~1914)가 1870년에 펴낸 <명물기략名物紀略>의 단향檀香 부분에, “우리나라에 별도의 한 종이 있는데, 박단駁檀이다. 전轉하여 ‘박달’이라고 부르며, 또 육박六駁이라고 한다. 껍질 색은 푸르고 희며 얼룩 무늬가 많다. 잎은 회화나무(槐) 같고 껍질은 푸르고 광택이 있다”****라고 나온다. 육박을 우리말 ‘박달’로 기록한 것이 흥미롭지만 어느정도 육박나무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정태현은 <조선삼림식물도설>에는 육박나무(Iozoste lancifolia (Sieb. & Zucc.) Bl.)의 한자명으로 육박六駁을 기록하고 있다.


육박나무 잎, 2018.11.10 제주도 청수 곶자왈

이제 정태현 선생의 기록 등에 의거하여 육박六駁을 육박나무로 봐도 될 듯하다. 간혹, 이 육박六駁을 ‘여섯 그루의 가래나무’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근거를 찾기 어려운 해석이다. 나는 열두달숲 답사모임을 통해 금오도에서 육박나무를 처음 본 후, 미황사가 있는 해남의 달마산과 제주도 곳곳에서 여러 차례 이 나무를 만났다. 육박나무는 볼 때 마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얇은 껍질의 흰 얼룩 무늬가 인상적이었는데, 육박전을 할 듯한 군복 무늬뿐 아니라 모과나무 무늬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직 나는 녹나무과의 육박나무를 나뭇잎만 보고는 구별하지 못한다. 열두달숲에서 한참 더 공부해야 해서, 당분간 하산은 못할 듯하다. 


<끝 2020년 12월>


* 六駁. 朱子曰 駁 梓楡也 其皮靑白如駁 陸氏曰樹皮靑白駁犖 遙視似駁馬 故謂之駁 李時珍曰 駁馬梓楡也 又名六駁 皮色靑白 多癬駁也 又似檀木 – 시명다식

** 梓榆, 南人謂之朴 齊魯間人謂之駁馬. 駁馬即梓榆也. 南人謂之朴 朴亦言駁也 但聲之訛耳. 詩隰有六駁是也. 陸璣毛詩疏 ‘檀木皮似系迷 又似駁馬 人云 斫檀不諦得系迷 系迷尙可得駁馬’ 蓋三木相似也. 今梓榆皮甚似檀 以其班駁似馬之駁者 今解詩 用爾雅之說 以爲獸鋸牙 食虎豹 恐非也. 獸 動物 豈常止於隰者 又與苞櫟 苞棣 樹檖非類 直是當時梓榆耳. - 몽계필담夢溪筆談

*** 駮馬, 皮靑白如狡 亦檀之類 故諺云 斫檀不諦得檕迷 檕迷尙可得駮馬 恐與무푸레相類 – 물명고

**** 東國別有一種 駁檀 轉云 박달 又名六駁 皮色靑白 多癬駁 葉如槐 皮靑而澤 肌細而膩 體重而堅 卽國風所稱 伐檀樹檀者也 – 명물기략 

+시경의 시는 이가원 번역 참조. 시명다식은 허경진 번역 참조. 표지사진 - 육박나무 수피 무늬,  2018.12.8 달마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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