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박六駁
내가 이름으로만 듣던 육박나무를 처음 만난 것은 2018년 봄 여수 금오도 에서다. 경북 북부지방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서울 경기 지역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로서는 남부지방에서 자라는 이 나무를 볼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정학유丁學游(1786~1855)의 <시명다식詩名多識>은 시경에 나오는 수많은 식물과 동물을 해설한 흥미로운 책인데, 2007년에 번역본이 출간되었을 때 참고용으로 마련해 두었다. <시경식물도감>을 구한 후에, 나는 두 책의 식물 이름을 하나씩 비교해 본 적이 있다. 대략 170여 종의 수록 식물 중에서 100여종은 이름이 동일하고 20여종은 유사한데 반해, 40여종은 완전히 달랐다. 아마도 다른 것들은 <시명다식> 번역본을 제고해봐야 할 가능성이 큰데, 예를 들면, <시경식물도감>에서 다래 종류로 본 장초萇楚를 <시명다식> 번역본에는 ‘보리수나무’로 설명하고 있는 것 등이다. 육박六駁에 대해서는 양 쪽 모두 육박나무(Litsea coreana H. Lev.)로 보고 있었는데, 이 책들 덕분에 나는 이 특이한 이름의 육박나무를 기억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으로, 금오도에서 육박나무를 처음 봤을 때, 군복의 얼룩 무늬 같은 수피를 가진 그 나무가 유독 반가웠다.
그 후, <시경>에서 육박나무가 나오는 진풍秦風 시, ‘새매 (晨風)’를 찾아보기도 하고, <한국의 나무>에서 육박나무를 꼼꼼히 읽어보기도 했다.
鴥彼晨風 후르륵 새매가
鬱彼北林 울창한 저 북쪽 숲 위를 날건만,
未見君子 그이를 보지 못해
憂心欽欽 시름겨운 마음은 하염없어라.
如何如何 어쩌라고 어쩌라고
忘我實多 날 이다지도 잊으셨나요?
山有苞櫟 산에는 새순 돋는 상수리나무가
隰有六駁 들판에는 육박나무가 있건만,
未見君子 그이를 보지 못해
憂心靡樂 시름겨운 마음은 즐겁지 않아라.
如何如何 어쩌라고 어쩌라고
忘我實多 날 이다지도 잊으셨나요?
<한국의 나무>를 보면, 이 육박나무는 녹나무과에 속하는 상록교목으로 우리나라 남해 도서 및 제주도에서 자라고, 일본 혼슈 이남과 타이완 중부에도 자생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국명은 나무껍질이 육각상으로 벗겨지는(六駁) 특징에서 유래했다”라고 했다. 육박나무의 종소명이 ‘coreana’로 우리나라를 가리키고 있어서, 중국에도 자생하는지 궁금해졌다. <중국식물지>를 찾아보니 육박나무(Litsea coreana Levl. var. coreana)를 조선목강자朝鮮木姜子라고 부르고 있었다. 또한 육박나무 변종으로 모표피장毛豹皮樟(L. coreana var. lanuginose)과 표피장豹皮樟(L. coreana var. sinensis)이 중국 중남부 여러 지방에 분포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박駁이라는 글자는 <전운옥편>에 “말, 잡색(馬 雜色)”으로 나오므로, 말 종류나 얼룩덜룩한 모양을 나타낸다. 육박六駁은 글자 자체로는 나무를 가리키는지 알기 어려운데, 나무 껍질 무늬를 보고 이름을 지었을 것이다. 현대 중국명에서는 얼룩말(駁) 대신 표범(豹) 무늬를 차용한 것이 흥미롭다. 이 육박六駁이라는 식물 이름은 <본초강목>이나 <중약대사전>의 표제어로는 나오지 않는다. 우리나라 문헌에도 이 글자로 식물명을 가리키는 용례는 거의 없고, 대개 ‘논박論駁하다’, ‘반박反駁하다’, ‘잡박雜駁하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있다. 오직 시경에서만 나무 이름으로 사용된 글자인데, 정학유의 <시명다식>에 육박은 다음과 같이 나온다.
“주자가 말하였다. 박駁은 재유梓楡이니, 그 껍질이 박駁(얼룩배기말) 같은 청백색이다. 육씨陸氏가 말하였다. 나무껍질은 푸르고 흰 얼룩소(박락駁犖) 같고, 멀리서 보면 얼룩말(박마駁馬) 같아서 박駁이라고 했다. 이시진李時珍이 말하였다. 박마駁馬는 재유梓楡이니, 또 육박六駁이라 이름한다. 껍질 색은 푸르고 희며, 많이 얼룩덜룩하다. 또 단목檀木과 비슷하다.”*
이 중, 주자가 말한 것은 <시경집전詩經集傳>에 보이고, 이시진의 해설은 <본초강목> 교목류에서 단檀을 설명하는 부분 말미에 있다. 북송의 학자 심괄沈括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하여간, 이러한 문헌을 참고했을 때, 진풍秦風 시, ‘새매 (晨風)’에 나오는 육박六駁은 짐승 이름이 아니라 나무 이름이고, 우리가 육박나무로 부르는 남도의 나무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육박六駁이나 재유梓楡는 <물명고>나 <광재물보>에 수록되어 있지 않다. 단, 박駁과 같은 글자로 쓰이는 박駮과 박마駮馬는 나무이름으로 <물명고>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박駁 - 적리赤李, 지금의 자도(紫桃)가 아닌지 의심된다.” “박마駮馬 - 껍질은 개(狡)처럼 푸르고 희며, 또한 단檀 종류이다. 그래서 옛 말에 ‘단檀을 자를 때 살피지 않으면 계미檕迷를 얻게 되고, 계미檕迷를 구하려다 오히려 박마駮馬를 얻는다’라고 했다. 혹시 ‘무푸레’ 종류가 아닐까.”***
이 해석을 좀더 보충하기 위해 <중약대사전> 등 본초학 문헌을 참조해보면, 단檀은 대표적인 향목으로 백단白檀, 전단旃檀 등으로 불리는 단향檀香(Santalum album) 류가 있지만, 이들은 열대지방에서 자라므로 제외하면, 청단靑檀(Pteroceltis tatarinowii Maxim) 정도로 볼 수 있다. 계미檕迷는 협미莢蒾의 이명으로 가막살나무(Viburnum dilatatum Thunb.)이다. ‘무푸레’는 물푸레나무를 말하는 것일 터인데, 사실 청단과 가막살나무, 육박나무는 따뜻한 지방에 자란다는 것 외에 딱히 유사하다고 할 만한 요소는 없다. 또한 이 나무들이 모두 잎이 단엽이라서 복엽인 물푸레나무와는 거리가 멀다. 유희柳僖 선생도 육박나무는 모르고 있었던 듯 하다. 참고로, 일본 한자사전 <한어림漢語林>을 살펴보면 박駮의 뜻 중 하나가 마유미(まゆみ), 즉 참빗살나무(Euonymus sieboldianus Blume)이고, 우리나라 <한한대사전>에서도 박駮을 참빗살나무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육박六駁은 황필수黃泌秀(1842~1914)가 1870년에 펴낸 <명물기략名物紀略>의 단향檀香 부분에, “우리나라에 별도의 한 종이 있는데, 박단駁檀이다. 전轉하여 ‘박달’이라고 부르며, 또 육박六駁이라고 한다. 껍질 색은 푸르고 희며 얼룩 무늬가 많다. 잎은 회화나무(槐) 같고 껍질은 푸르고 광택이 있다”****라고 나온다. 육박을 우리말 ‘박달’로 기록한 것이 흥미롭지만 어느정도 육박나무를 설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후, 정태현은 <조선삼림식물도설>에는 육박나무(Iozoste lancifolia (Sieb. & Zucc.) Bl.)의 한자명으로 육박六駁을 기록하고 있다.
이제 정태현 선생의 기록 등에 의거하여 육박六駁을 육박나무로 봐도 될 듯하다. 간혹, 이 육박六駁을 ‘여섯 그루의 가래나무’로 번역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근거를 찾기 어려운 해석이다. 나는 열두달숲 답사모임을 통해 금오도에서 육박나무를 처음 본 후, 미황사가 있는 해남의 달마산과 제주도 곳곳에서 여러 차례 이 나무를 만났다. 육박나무는 볼 때 마다, 푸른 기운이 감도는 얇은 껍질의 흰 얼룩 무늬가 인상적이었는데, 육박전을 할 듯한 군복 무늬뿐 아니라 모과나무 무늬가 떠오르기도 했다. 아직 나는 녹나무과의 육박나무를 나뭇잎만 보고는 구별하지 못한다. 열두달숲에서 한참 더 공부해야 해서, 당분간 하산은 못할 듯하다.
<끝 2020년 12월>
* 六駁. 朱子曰 駁 梓楡也 其皮靑白如駁 陸氏曰樹皮靑白駁犖 遙視似駁馬 故謂之駁 李時珍曰 駁馬梓楡也 又名六駁 皮色靑白 多癬駁也 又似檀木 – 시명다식
** 梓榆, 南人謂之朴 齊魯間人謂之駁馬. 駁馬即梓榆也. 南人謂之朴 朴亦言駁也 但聲之訛耳. 詩隰有六駁是也. 陸璣毛詩疏 ‘檀木皮似系迷 又似駁馬 人云 斫檀不諦得系迷 系迷尙可得駁馬’ 蓋三木相似也. 今梓榆皮甚似檀 以其班駁似馬之駁者 今解詩 用爾雅之說 以爲獸鋸牙 食虎豹 恐非也. 獸 動物 豈常止於隰者 又與苞櫟 苞棣 樹檖非類 直是當時梓榆耳. - 몽계필담夢溪筆談
*** 駮馬, 皮靑白如狡 亦檀之類 故諺云 斫檀不諦得檕迷 檕迷尙可得駮馬 恐與무푸레相類 – 물명고
**** 東國別有一種 駁檀 轉云 박달 又名六駁 皮色靑白 多癬駁 葉如槐 皮靑而澤 肌細而膩 體重而堅 卽國風所稱 伐檀樹檀者也 – 명물기략
+시경의 시는 이가원 번역 참조. 시명다식은 허경진 번역 참조. 표지사진 - 육박나무 수피 무늬, 2018.12.8 달마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