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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경인 Feb 26. 2021

겨울 햇살에 열매 송이가 빛나는 가죽나무

고栲

대한大寒을 이틀 앞둔 지난해 1월 18일, 한겨울 날씨로는 이상할 정도로 따뜻한 날에 식물애호가들과 함께 남한산성을 따라 거닐면서 겨울 나무를 감상했다. 작지만 날카로운 갈고리모양의 가시를 품은 푼지나무를 구경하고, 용버들과 버드나무 수형을 비교해보고, 오동나무 엽흔과 황벽나무 겨울눈 등을 감상했다. 답사를 거의 마무리할 즈음 동문 근처에서 하얗게 빛나는 열매를 잔뜩 달고 있는 가죽나무 한 그루를 만났다. 일행이 주운 열매 다발을 자세히 보며, 씨앗을 한 개씩 품고 겨울을 견디고 있는 빛 바랜 꼬투리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가죽나무는 <장자>에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쓸모 없는 나무 저樗로 소개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가죽나무의 또 다른 글자인 고栲에 대해 고전에서 어떻게 쓰이는지 살펴본다. 이 글자는 <시경> 당풍唐風의 ‘산에는 시무나무가 있네 (山有樞)’에 “산에는 고栲가 있고, 진펄엔 찰피나무가 있네 (山有栲 濕有杻)”에 소개되어 있다.  우리나라 고전 번역에서는 이 글자를 ‘산가죽나무’ 혹은 ‘붉나무(Rhus javanica L.)’로 번역하고 있는데, <한국식물명의 유래>나 <우리나무의 세계 1>을 보면, 붉나무는 중국명이 염부목鹽膚木, 오배자수五倍子樹 등이며 한자로 천금목千金木, 부목膚木 등으로, 고栲와의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다. 그리고 ‘산가죽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는 식물도감에서는 찾을 수 없는 나무이다. 하지만, 이 글자를 ‘산가죽나무’라고 번역하게 된 근거는 있다. 왜냐하면 한漢 나라 이전 전국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가장 오래된 중국의 자전字典인 <이아爾雅>의 석목釋木 편에 “고栲는 산저山樗이다 (栲 山樗)”가 나오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저樗는 가죽나무(Ailanthus altissima [Mill.] Swingle)이므로, 이것을 단순히 옮기면 ‘산가죽나무’가 되는데, 이런 나무는 없으므로, ‘산에 있는 가죽나무’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가죽나무 (좌) 열매 송이 2020.1.18 (우) 하트 모양의 엽흔, 2020.3.21, 남한산성


곽박郭璞은 “고栲는 가죽나무(樗) 비슷한데, 흰색이 조금 있고 산 속에 자라므로 이름이 붙었다. 또한 옻나무(漆) 종류이다*”라는 주석을 달았다. 이 주석 때문에 산에 자라면서 옻나무 비슷한 붉나무로 이 글자를 이해하게 된 듯하다. 하지만 옻나무와 가죽나무는 잎이 우상복엽으로 서로 비슷하므로, 이것을 묘사했을 수도 있으므로, 이 문장을 근거로 붉나무로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육기陸機는 “산에 자라는 가죽나무(山樗)와 들에 자라는 가죽나무(田樗)는 다르지 않다. 잎이 조금 좁을 뿐이다**”라고 하여, 산저山樗가 가죽나무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본초강목>에서 이시진도, “고栲 나무는 가죽나무(樗)가 산 속에 자라는 것이다. 나무가 무르고 커서 목수가 간혹 쓰기도 하지만, 긁으면 썩은 것 같아서 옛사람들이 재목으로 쓸 수 없는 나무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여 고栲가 산에 자라는 가죽나무임을 밝히고 있다. 참고로 가죽나무는 낙엽교목임에 반해 붉나무는 낙엽소교목으로 큰 나무라고 하기는 어렵다. 이 해설을 이어받아 <시경식물도감>에서도 이 나무를 가죽나무로 설명했다. 

가죽나무 수꽃차례, 2019.6.8 성남

우리나라 문헌을 살펴보면, <전운옥편>에서 “栲 고, 나무이름으로 산저山樗이다. 옻나무 류이다. (類漆)”라고 했고, “고로栲栳, 버드나무 그릇(柳器)이다“로 설명하고 있다. <물명고>에서 유희는 “栲고, 북나모, 산저山樗”, <광재물보>에서는 “栲고, 북나무, 즉, 산 속에 자라는 가죽나무(樗)이다. 나무는 크고 무르다”로 설명하고 있다. 즉, 해설은 가죽나무(樗)와 붉나무가 뒤석여 있는 듯하다. 이러한 해석을 이어받아 <자전석요>는 “栲, 산저山樗, 북나무 고”, <한선문신옥편>은 “栲, 북나무고, 산저山樗로 옻나무 류이다(類漆)”, <한일선신옥편>은 “栲, 북나무고, 산저山樗”로 설명하고 있다. 이런 해석 때문에 고栲를 붉나무로 번역하고 있지만, 앞에서 설명했듯이 이 글자는 가죽나무로 번역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본다. 그런데, 현대에 통용되는 <한한대자전>은 의외로 “栲, 멀구슬나무”로 설명하고 있는데, 그 근거를 모르겠다. 우리나라 남부지방에 자라는 낙엽교목인 멀구슬나무(Melia azedarach L.)는 중국 고전에서는 련楝, 고련苦楝이라고 했고 일본에서는 센단(栴檀)이라고 했으므로 멀구슬나무는 아닐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栲가 시어로 나오는 <시경> 당풍唐風의 ‘산에는 시무나무가 있네 (山有樞)’ 일부를 감상해본다****.

가죽나무 열매, 2017.7.16 가평


山有栲 산에는 가죽나무가 있고

濕有杻 진펄엔 찰피나무가 있네.

子有廷內 그대에게 집이 있어도

弗洒弗掃 물 뿌리며 쓸지 않고,

子有鐘鼓 그대에게 종과 북 있어도

弗鼓不考 치지 않고 아끼다가,

宛其死矣 만약 그대 죽게 되면

他人是保 남이 그걸 차지하리라.

가죽나무, 2020.2.8 화야산

참고로 버들 가지로 만든 그릇을 뜻하는 버들고리, 고리짝이나 고리백정의 고리가, <전운옥편>에 나와있듯이 한자 ‘고로栲栳’에서 비롯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고로栲栳는 중국에서도 버들 가지를 이용하여 만든 용기를 말하므로, 이 의견은 타당해 보인다. 그러나 이 고리에 왜 가죽나무 고(栲)자가 쓰이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에서 폭력을 사용해 수사하여 사회 이슈가 되었던 ‘고문’을 한자로 ‘拷問’이라고 쓰는데, ‘栲問’이라고 쓰기도 한다. 또한 조선시대에 죄인에게 형장(刑杖)을 써서 신문하는 것을 고신(栲訊)이라고 했는데, 이 단어들에서 왜 ‘가죽나무 고(栲)’를 쓰는 지 모르겠다. 아마도 ‘칠 고(拷)’와 글자 모양이 비슷해서일 것이다. 조선시대에 고신(栲訊)을 하면 죄가 없어도 몽둥이에 맞아서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최소한 법적으로 고문을 할 수 없는 민주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제 고문이 사라져, ‘가죽나무 고(栲)’가 천수를 누리는 나무의 상징으로만 사용되길 기대해본다. 


<끝, 2020년 2월 1일>


* 栲似樗 色小白 生山中 因名 亦類漆樹. 爾雅注, 郭璞

** 山樗與田樗無異 葉差狹爾. 陸機

*** 栲木卽樗之生山中者 木亦虛大 梓人亦或用之 然爪之如腐朽 故古人以爲不材之木 - 본초강목

**** 리가원, 허경진 공찬 <시경>의 번역에서 나무 이름을 수정했다.

+표지사진: 가죽나무, 2020.1.18 남한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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