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錢起(710~782)-늦봄에 고향 초당에 돌아오다(暮春歸故山草堂)
봄간다고 산곡山谷엔 꾀꼬리 울고
개나리 살구꽃은 바람에 지네.
반갑고야, 창窓밖에 푸른 대포기.
예전빛을 그대로 나를 기두네.
谷口春殘黃鳥啼
莘荑花盡杏花飛*
始憐幽竹山窓下
不改清陰待我歸
안서岸曙 김억金億(1896~?)의 역시집譯詩集 <망우초忘憂草>에 실려 있는 실명씨失名氏의 한시 번역으로 제목은 ‘대포기’이다. <망우초> 초판본은 1934년 간행이지만, 여기에서는 1943년 재판본 p.72에서 인용했다. 개나리, 살구꽃 등 봄 꽃은 덧없이 지는데 창 밖의 대나무만 푸른 빛으로 나를 기다리는 정경을 노래하고 있다.
이 한시의 신이莘荑를 개나리로 번역하고 있어서 내 관심을 끌었다. 나는 달포 전에 옛글 속의 신이가 무엇인자 찾아보면서 글을 쓴적이 있었다. 신이는 백목련이나 자목련 등 목련을 뜻하다가 조선후기부터 혼란이 발생하여 개나리를 신이화로 부른 사례가 있다라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사실 이 시의 신이화莘荑花가 목련인지 개나리인지는 이 시를 지은 시인만이 알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목련이나 살구꽃은 꽃이 떨어지는 정경이 뇌리에 선명하게 남는데 반해, 개나리는 활짝 피었다가 어느 날 꽃은 듬성듬성해지고 이파리가 나면서 사라지기 때문에, 이 시가 묘사한 신이화는 목련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호기심이 발동하여 찾아보니, 이 시는 당나라 시인 전기錢起(710~782)가 지은 ‘늦봄에 고향 초당에 돌아오다 (暮春歸故山草堂)’라는 시였다. 중국 쪽 문헌에는 신이莘荑가 신이辛夷로 되어 있지만 같은 뜻이다. 그렇다면 이 시에서 신이화는 목련류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후기에 신이화 명칭에 혼란이 생겨서 개나리를 뜻하기도 했지만, 중국에서 신이는 백목련이나 자목련을 뜻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는 살구꽃이 피기 전에 핀 것으로 보아 백목련일 가능성이 더 크다.
김억이 이 시를 번역한 것이 1930년대일 것이다. 당시에는 유명한 언론인 문일평도 개나리를 신이화로 표현하는 등 많은 사람들이 신이화를 개나리로 본 듯하며,*** 이 영향으로 김억도 신이화를 개나리로 번역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 시에서 신이는 목련이므로, 활짝 핀 백목련이 지고 살구꽃이 피는 정경을 상상하면서 다시 시를 읽어보자.
봄 간다고 산골짜기엔 꾀꼬리 울고
목련꽃 살구꽃은 바람에 지네.
반갑구나, 창窓 밖에 푸른 대 포기.
예전 빛을 그대로 나를 기다리네.
<끝>
*원문에는 신이莘荑가 신제莘苐로 되어있지만 苐는 이荑의 오기이다.
** https://www.arteducation.com.tw/shiwenv_a4ee90274e74.html 에서도 “신이辛夷: 백목련의 꽃, 일명 목필화, 또한 영춘화라고도 한다. 살구꽃에 비해 일찍 핀다. (辛夷: 木蘭樹的花, 一稱木筆花, 又稱迎春花, 比杏花開得早, 比杏花開得早)”라고 설명하고 있다.
*** 옛 글 속의 신이화辛夷花를 찾아서 - 자목련과 개나리 (https://brunch.co.kr/@783b51b7172c4fe/85)
+표지사진-백목련 (2023.4.2. 시흥 용도수목원)
% 친구 시인 한 분이 전기의 시가 좋다고 운율을 맞추어 한시 번역을 다듬었다. 멋지다.
산골에 봄 간다고 꾀꼬리 울고
목련은 지고 살구꽃잎 흩날리네
반갑구나, 창 너머 대나무 숲이여
푸른 빛 그대로 나 오길 기다리네
(2023.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