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만 듣던 조건부적 친구
사람들이 '주석'이라 부르는 그 장관의 이름을 호기심에 검색해 보니 몇 년 전 한국에도 방문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왜소한 체구에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 좋게 얘기해서 카리스마지 사실 성격 장난 아닌 듯한 매서운 눈빛. 대충 그 장관에 대한 첫인상이다. 집도 베이징이라 했는데 필요에 따라 머무는 호텔도 그야말로 으리으리하고 화려했다. 그 화려함 속의 삶을 위해 이 사람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치고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와 싸움을 해 왔을까 생각하며 전혀 부러워하지 않는 나 자신이 기특하게 느껴질 뿐 그런 호사스러움이 나에게 주는 특별한 영향은 없었다. 특이점은 역시 장관과 대화를 나누면서 발견...
약속된 시간 그 상큼하고 멋있는 비서는 호텔 앞에 마중 나와 장관이 있는 객실로 인도했고 화려하고 편안해 보이는 커다란 소파에 앉아 본격적으로 중요한 통역이 시작되었다. 장관은 아침을 먹었냐는 말로 인사를 했고 많은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의 듣기 평가 시간은 길지 않았다. 아름다운 장가계가 있는 후난성 사람이어서 북경 표준어가 아닌 관계로 말을 한 번에 못 알아들은 게 몇 마디 있었고 그래도 장관은 한두 번 더 말해주는 친절을 나타냈다. 정말 중요한 '부탁'이란 걸 했을 때 장관은 흔쾌히 "커이"(해 줄 수 있다)라고 대답했고 사랑과 우정이 가득해지는 회장님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그런데 생각지 못한 장관의 그다음 중국어가 들려왔다. '조건'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았지만 엄연한 조건이 있었다. 자신과 친밀한 화가가 있는데 곧 한국에서 전시회를 한다. 그 전시회에 회장의 지인들과 함께 참석하고 그림들을 좀 사 주었으면 한다 였다. 이게 그 말로만 듣던 대륙의 조건부적 친구 관계? 처음 베이징에 왔을 때 중국인들에게 친구란 '내가 뭔가를 너에게 주면 너도 나에게 뭔가를 줘야 하는 사람'이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오늘 만난 이 장관과 같은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집 근처 철물점 사장님만 보더라도 내 주변의 거의 모든 중국인들은 순수했다. 철물점에 물건을 사러 두 번째 갔을 때 사장은 내가 두 번째 왔다는 이유로 물건값을 너무 저렴하게 주었고 몇 번째 갔을 때는 단골이라고 저렴한 물건값은 아예 받으려 하지 않았다. 가난한 유학생인 나는 아무것도 줄게 없는데 그들은 그렇게 아무런 조건 없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주저함 없이 관대하게 베풀고 도움이 필요할 때 진심으로 도와주려 하는 친절, 어떤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 친구들과 가족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주는 열정과 사랑,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베풀고 도와주는 그야말로 진정한 친구... 대부분의 베이징인들이 그러했다. 물론 워낙 대륙이라 지역마다 또 다르긴 하다. (몇 년 후 윈난 성 쿤밍에 갔을 때 또 다른 세상을 봄) 그래도 소수의 이런 조건부적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 나라의 친구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좀 과하다고 본다. 사실 이런 관계는 '친구'관계가 아니라 그저 사업거래에 불과한 관계일 뿐... 장관과 좋은 친구라고 말했던 우리의 회장 1님은 장관의 조건 제안에 흔쾌히 OK를 외치셨고 그렇게 짧은 미팅은 끝이 났다. 그리고 곧 베이징 인민대회당(국회의사당과 같은)에서 있을 중국문화와 관련된 중요한 모임에 우리를 초대했다. 생각지 못하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중국의 중요한 국가적 회의가 진행되는 곳에도 들어가게 되는 기회를 만끽하며 우리는 호텔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