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부령 마산
가을 한가운데에서 강원도를 찾았다. 멋진 시월의 날씨 속에서 보는 아름다운 단풍을 생각하며 계획한 것일 테지만,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예보는 꾸준히 변동 없이 비. 아무래도 인원도 산행 코스도 축소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다행히 산행신청자 그 누구도 예보에 흔들리지 않고 산행에 참여해 주었다. 각자의 위치에서 차를 나눠 타고 출발하여 화양강 휴게소에서 만났다. 비는 계속.
일정과 코스를 조정하고 마산봉 주차장으로 향한다. 구름이 언뜻언뜻 태백산맥 줄기 사이사이에 끼어 운치가 있어 보였다. 이게 지금 5월의 어느 날이라면 푸릇푸릇 생기가 돌고 설레는 그 무엇이었겠지만, 지금은 시월의 한가운데. 다소 춥고 쌀쌀한 느낌마저 들었다. 봄과 가을은 그만큼 다르다.
원래 산행의 코스는 진부령 근방의 마산봉 주차장에서 출발, 마산봉-대간령을 지나 박달나무쉼터까지 가는 코스였다. 그러나 비가 그칠 듯 말 듯하는 데다 이미 내린 비 때문에 박달나무쉼터 부근 계곡을 건너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래서 먼저 도착지를 가 보기로 했다. 역시나 물살이 거셌다. 우리는 결국 확신을 갖고 마산봉에 올랐다가 원점회귀하는 코스로 방향을 잡고 마산봉 주차장으로 향했다.
마산봉 주차장은 비 때문이겠지만 한적했다. 한두 대 정도의 승용차와 뜻밖의 버스가 있었다. 이곳은 백두대간의 마지막 구간이라 사람들이 꽤 찾는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마산봉 부근근에서 우중임에도 많은 종주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비는 조금씩 오지만 산행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무더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건만 계절은 이미 추위를 걱정해야 할 만큼 변하고 있었다. 부슬비를 맞으며 마산봉을 향해 올라 치는데 몸이 무척이나 무겁다. 화양강 휴게소에서 과식한 것도 있겠고 최근 러닝연습으로 피로가 쌓인 탓도 있겠다. 이렇게 가쁜 호흡으로 어떻게 그동안 등산을 다녔나 싶게 힘든 오르막이다.
비에 젖은 단풍, 비에 젖은 낙엽, 비에 젖은 나무 등등. 온통 젖어 버린 가을이다. 지난달 정기 산행지였던 도봉산에서도 비에 젖은 산을 올랐는데.. 이번 가을 참 축축하다.
정상까지가 그리 멀진 않았으나 몸도 마음도 산도 젖어서일까, 참으로 무겁고 처지는 걸음걸이는 어쩔 수가 없다.
마산봉 정상에 오르니 사람들이 꽤 오고 갔다. 정상에서의 경치는 가스가 잔뜩 끼어 전혀 볼 수 없었지만 백두대간 완주를 위해 악천후에도 불구 열심히들 오르고 내려갔다.
우리 단체 사진 하나 찍고 정상 바로 밑에 점심 먹을 사이트를 구축한다.
일부는 사이트에 남아 쉬는 사이 나를 포함한 몇 명은 병풍바위까지 다녀오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병풍바위까지는 주로 내리막인데 비에 잔뜩 젖은 풀길을 헤쳐 가야 한다. 가는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줄 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대부분 중년 남녀로 구성된 산악회 사람들 같은데, 역시 우리나라의 등산 붐은 쉽게 꺾이지 않을 거 같다.
병풍바위도 안개 자욱. 거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간단히 셀카를 찍고 마산봉 밑의 사이트에 돌아오니 사람들이 덜덜 떨며 우리를 맞는다. 비옷에 장갑은 물론 핫팩까지 나왔다.
자리를 잡고 이것저것 간식과 음료를 꺼내니 풍성하다. 5월의 빗속에서 이런 풍경은 몇 번 겪었지만, 가을 빗속에서 앉아 있으려니 몸이 덜덜 떨렸다. 운치는 비슷했지만 몸이 그 운치를 받아들이기엔 시간이 좀 필요했다.
플라이와 타프로 바람을 막고 있는 가운데, 있는 옷을 다 끼어 있고 옹기종기 앉으니 나름의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음식이 들어가고 이야기 꽃을 피우니 역시 익숙한 분위기가 되었다.
타프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들리고.. 젖은 낙엽은 모자 위에 떨어지고.. 각지에서 온 다양한 맛난 음식을 먹고.. 그러고 나니, 이렇게 또 하나의 산행이 이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화끈하게 덥고 습한 여름도, 춥고 눈 쌓인 겨울도 있지만, 비 오는 가을날도 우린 살아 있고, 또 산에 간다. 그냥 그렇게 사는 거다.
먹을 게 다 떨어질 때쯤 마무리하고 하산을 시작했다. 그 사이 비는 더 많이 와서 산행길은 온통 진흙길이었고 온몸도 젖어 버렸다. 그래도 우린 우리가 - 숨 쉬듯이 - 응당 해야 할 일을 마무리하고 있음에 뿌듯해하며 느긋하게 하산을 한다.
하산을 마무리하고, 모두는 청곡으로 향했다. 청곡 주인장님도 손님 준비를 많이 하신 듯. 송이에 한우에 대접이 아주 대단했다. 주인장의 연주에 노래까지 대접은 아주 아주 대단했다.
궂은 날씨 으슬으슬한 기온 그리고 축축한 산길이었지만, 그러한 날도 우린 살이 있는 기간이고 흔한 말로 ‘나가리’라며 버릴 수 없는 우리 인생의 소중한 시간이다. 우린 그 누군가는 버리고 무시할지도 모를 그 시간을 원래의 그 소중함으로 충실하게 보냈다. 그래서 돌아오는 귀경길이 그렇게 즐겁고 충만했는가 보다. (악필, 2025.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