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야산다] 시작은 하프다 9

2024 서울 YMCA 마라톤 (11/24)

by 악필

2024년 마지막으로 출전한 대회다. 본 마라톤 대회일은 정확히 1년 전 갑자기 추워진 날에 골프 라운딩을 하다 허리를 다친 날이기도 하다.

11월은 오래전부터 내겐 추운 달이었다. 가을과 겨울 사이. 준비가 안 된 몸은 항상 11월을 추워했다. 그 추운 달에 그것도 마지막주에 열리는 대회인데 나는 무사히 뛸 수 있을까.

한편으론 이번 기회에 허리부상의 트라우마를 깔끔히 해결해 보자는 생각도 있었다. 멋지게 완주하고 한 해를 마무리하기로.

대회 전날 혹시나 하는 불안감에 10킬로를 뛰고야 말았다. 추위도 달리면서 극복되기는 했다. 한편 또 달리기에는 좋은 계절이기도 해서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다가왔다.


아내와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경기가 시작되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대회 당일 아침은 배변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인데, 결국은 시청역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경기는 매일 출근하던 회사 앞에서 시작한다. 이순신 장군 동상 주변에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몰려 있었다. 세종대왕 동상 옆에서 출발해서 관철동쯤에서 피니쉬를 하는 코스인데 짐을 맡기기엔 번거로움이 있어 아내에게 모든 걸 맡기고 출발대에 섰다. 막판에 세종문화회관 화장실을 갔다 왔으니 이젠 걱정할 게 없다.


기록을 제출했더니 앞조에 배치를 해줬다. 설레는 가운데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몸을 풀었다. 다른 사람들은 비닐 우비를 입어 열 손실을 막고 있었지만 나는 그냥 버텨 보기로 한다. 문득 보니 인파를 뚫고 앞으로 가는 가수 ‘션’ 형님이 보였다. 1회 대회임에도 한해의 거의 마지막 대회다 보니 유명인 포함 많은 사람들이 참여한 듯하다.


드디어 출발. 몸은 의외로 가벼웠다. 다소 쌀쌀한 날씨라서 몸을 덥혀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몸은 쭉쭉 나갔고 꽤 빠른 페이스임에도 지칠 줄 모르고 달렸다. 앞조의 다른 사람들의 페이스가 빠르다 보니 나도 모르게 몸이 나간 것도 있다.

경복궁을 돌아 광화문으로 다시 오고 거기서 시청으로 가는 코스다. 내가 평소 자주 지나다니던 세종로를 달리다 보니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다시 코스는 청계천으로. 그저 평범한 직장인으로 술에 취해 배회하던 곳을 달리게 되었다. 감회가 새로우면서도 결국에 그 술 때문에 몸이 망가진 게 아닐까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만회를 하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달리자.


정확히 어디쯤이었는지 모르겠는데, 달리다 보니 옆에 갑자기 ‘션’ 형님이 나타났다. 달리기 하는 연예인으로 가장 유명한 분이자 기부로 더 유명한 분이다. 존경에 마지않는 션 형님을 보니 다소 흥분도 되고 같이 계속 달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보다 한 발짝 앞서 뛰고 있었는데 계속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션 형님은 보폭이 커서 성큼성큼의 느낌이 났다. 보폭이 비교적 작고 케이던스를 높이는 주법인 나는 따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나중에 기록을 보니 무의식 중에 보폭을 늘리기 위해 노력한 것도 같다.

한 7,8킬로 정도를 따라간 것 같은데 점점 거리가 벌어지더니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냥 보내드렸다.


그래서인가 15킬로 정도 구간쯤에서 너무도 지쳐 있는 나를 발견했다. 이래저래 전반에 오버페이스를 한 것 같다. 숨은 턱에 차서 당장에라도 멈추고 싶은데, 그동안 해온 페이스를 죽이고 싶지 않아 미친 듯이 달렸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페이스는 점점 떨어졌다.


날이 쌀쌀해서인지 달리고 있음에도 몸이 더운 느낌은 안 들었다. 손이 시렸고 곱아서 물을 먹거나 에너지젤을 뜯는데도 원활하지가 않았다. 다른 사람처럼 장갑을 준비했어야 했다.


마지막 3킬로는 정말 지옥과 같았다. 사람들이 많은 응원을 하고 있었지만 멘탈도 유지하기 어려웠고 몸은 부서질 것 같았다. 1킬로, 1킬로가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래도 혹시 힘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초코파이 조각을 먹다 사레가 들어 힘이 더 빠졌다. 분명 전에 뛰던 대회 보다 힘이 더 들긴 한 거다. 스피드를 너무 낸 거다.

그렇게 길게 느껴졌던 피니쉬라인은 갑자기 나타났다. 청계천을 따라 을지로를 달리다 종로 방면으로 우회전하니 바로 나왔다. 힘은 들었지만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골인. 기록은 확실한 pb였다. 1시간 32분 54초. 션 형님 덕분이겠지? 내 몸으론 다시는 깰 수 없을 만한 기록이다. (실제로 1년 후까지도 깨지 못했다)


나중에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아내를 찾는데 한참이 걸렸다. 그래도 좋은 기록으로 기분이 너무 좋았다. 앞으로 더 더 성장할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한해 마지막 대회의 성공적 마무리로 홀가분한 마음이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악필, 2025.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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