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야산다] 시작은 하프다 10

겨울의 달리기 그리고 슬럼프

by 악필

어느새 겨울이 되었다. 러닝에 입문하고 흔히들 말하는 ‘러닝 뽕’에 취해 보낸 2024년 한 해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러닝을 알게 되어 행운이었고 행복했다.

이제 당분간 대회는 없겠지만 나의 러닝은 계속되어야 한다. 적어도 겨울 초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나라가 어수선한 가운데 괜한 불안감에 러닝에 집중하질 못했다. 거꾸로 그런 혼란 속이니 마음을 다잡기 위해 더욱 러닝에 집중해야 한다며 의지를 불태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질 못했다. 술이 들어가고 뉴스는 어지럽고 불안감은 높아지니 러닝은 뒷전이 되었다. 물론 12월 한 달, 나는 나름 괘도에 오른 런너라는 자부심으로 20킬로를 넘어 30킬로까지 달려 보기도 했지만, 한참을 ‘러닝 뽕’에 취해 있던 여름-가을의 마음과는 분명히 달랐다.

거기에 더해 또 한 가지. 겨울 러닝에 대한 제대로 된 대비를 하지 못한 점도 러닝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이라고 봐야 했다.

1월 한 달은 단 한 번도 달리질 못했고, 2월은 고작 15킬로 정도밖에는 뛰질 못했다.


겨울에 느낀 예상밖의 벽은 발 시림이었다. 동상에 걸렸던 왼발은 겨울의 달리기를 두렵게 만들었다. 불과 1,2킬로만 뛰어도 발이 딱딱하게 굳어 그나마 있던 발가락이 떨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앞서 말한 어수선한 정국과 해외 등반 준비까지 핑곗거리로 다가와 달리기는 아예 안 하게 되었다.

요즘 나온 러닝화는 모두 땀 배출과 통풍 기능을 좋게 하기 위해 가볍고 시원하게 만들어져 있다. 겨울엔 부적합하다. 난 그 뒤 1년이 지난 후에야 겨울용 러닝화를 구비하게 되었다.

더불어 장갑과 바람막이, 그리고 적절한 두께의 양말과 바지 등이 충분히 준비되어야 겨울 러닝을 할 수 있다. 손도 곱고 귀도 시려우니 든든한 장갑과 비니나 귀마개는 필수다.

겨울 러닝은 이런 장비들이 잘 구비된 상태라면 꽤 괜찮다. 시원한 바람 속에 몸에 열이 나는 상태는 더운 아침저녁의 러닝보다 훨씬 상쾌하다. 뿌듯함과 성취감도 더 크다. 지난겨울은 러닝을 포기하다시피 했지만, 오는 겨울은 반드시 러닝에 더 집중해 보기로 한다.


2월에는 날이 좀 풀릴까 하여 러닝을 재개해 봤지만, 여전히 추웠다. 신발도 의류도 더 확실히 구비하고 달려야 했다. 몸이 움츠려져 많이 뛸 생각이 나질 않았다. 지난해 말 의욕적으로 신청했던 마라톤 대회도 추워서 포기했다. 그러나 짧게나마 발가락의 통증을 참으며 스피드를 냈을 때는 어렵지 않게 4분대 페이스가 나왔다. 기온이 낮은 게 더운 거보다는 달리기에 좋은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게 3월을 맞아 본격 달리기가 가능한 계절이 왔다. 문득 내가 지난겨울을 너무 달리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달리기가 낯설었다. 거리는 좀 늘렸지만 횟수는 고작 3번. 3월도 제대로 달리기에 집중하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4월에 하프마라톤 대회를 신청했다. 2025 서울 YMCA 하프 마라톤(4/13). 2025년 첫 대회가 되었다. 작년엔 11월 말에 열렸는데 왠지 모르게 이번엔 4월 중순에 열렸다. 친구가 마침 추가 접수 기회가 생겼다며 추천해 주길래 참여하게 되었다. 작년 pb달성 코스와 똑같은 코스. 익숙한 코스였지만, 4월의 바람은 아직 너무 추웠다. 덜덜 떨며 간신히 완주했다. 기록은 1시간 37분 32초. 겨울에 못 뛴 거치곤 나름 선방했다. 추위도 몸상태도 작년의 pb 내던 때랑은 달랐다.

이를 계기로 다시 달리기 본격 재개. 거리도 늘리고 횟수도 늘렸다. 5월에도 하프마라톤을 신청했다. 이번엔 밤섬 마라톤(5/18). 기록은 1시간 41분 06초. 다소 덥기는 했으나 뛸만했다. 전날 인수봉을 오르고 뛰 걸 감안하면 선방한 편.


겨울엔 제대로 뛰질 못했으니, 봄은 러닝의 적응기간이 되었다. 대회도 나갔고 컨디션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역시 아직은 준수한 런너야,라는 착각 속에 있었다.


그러나 6월이 문제였다. 긍정의 힘 마라톤 대회(6/15)에서 몸 상태가 여실히 드러났다. 5킬로 지점에서 왼쪽 오금에 쥐가 날 것 같은 통증으로 멈추기로 한 것. 전날부터 몸이 무거웠고 뭔가 근육의 피로가 풀리지 않은 느낌이었다. 이전 두 번의 대회에서는 왜 괜찮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마도 컨디션 관리에 소홀해서겠지. 그렇게 생애 처음으로 마라톤 대회 DNF라는 걸 해봤다. 아내가 있는 출발지이자 피니쉬라인으로 걸어가는데 5킬로가 무지하게 멀게 느껴졌다. 날은 너무 더웠고 몸은 무거웠다. 그나마 거기서 멈춘 게 다행스럽기도 했다. 걸어오다 보니 결승선 부근에는 쓰러져 있는 사람도 몇 명 있었다. 6월은 마라톤 대회에 적합하지 않아 보였다.


그 후 며칠 뒤, 나는 멀쩡하던 허리를 자극하는 아주 나쁜 선택을 하고 만다. 회사 사람들의 압박에 못 이겨 골프 약속을 잡았는데, 왠지 불안했던 나는 출장을 며칠 앞두고 커뮤니티 센터에서 골프연습을 해 봤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 다시 허리 통증이 재발한 것. 주변에서는 달리기를 그렇게 많이 하는데 허리 아파 골프를 못 친다는 게 말이 안 된다며 살살 쳐보자는 권유로 해 본 건데, 역시나였다. 통증의 전이과정이 과거에 느낀 통증을 압축한 것처럼 한꺼번에 나타났다. 내 허리의 문제는 딱 그 골프 때문에 생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골프 이제 완전히 그만두기로 했다.

문제는 바로 있는 해외 출장을 가야 했다는 것. 출장 중 혹시나 하고 러닝을 시도했으나 통증만 가중되었다. 조심조심 마무리 후, 보름 뒤 또다시 출장. 허리를 회복할 시간이 부족했다. 아슬아슬한 허리 상태가 계속되었고, 회복은 더뎠다. 나 스스로에게 욕을 퍼부었다. 멍청이. 러닝으로 치면 최악의 슬럼프에 빠졌다.


이 통증은 결국 8월 중순까지 해소가 되지 못한 것 같다. 불안함에 8월의 설악산 등반도 포기했는데, 조심조심 트레킹 후 조금씩은 회복되는 것 같았다. 다시는, 다시는 이런 상태를 만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8월 마지막 주부터는 다시 정상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다. 휴우! 매일 뛰기로 했다. 마일리지를 늘리기로 했다. 마침 신청해 놓은 2025 JTBC 풀코스 마라톤이 당첨되어 훈련이 필요했다. 이 허리가 훈련에 큰 지장을 준 거이다. 11월 초 대회이니 9월, 10월 두 달은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허리 때문에 충분한 훈련 시간을 확보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늦게라도 회복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LSD에 집중하며 몸이 러닝에 적응할 수 있도록 하는 게 우선이었다. 슬럼프를 벗어날 수 있을까? 작년의 컨디션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이미 일어난 불행은 돌이킬 수 없으니 현실을 인식하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악필, 2025.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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