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야산다] 시작은 하프다 12

첫 풀코스 - 2025 JTBC 서울 마라톤 (1)

by 악필


사람이 살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집중력을 모아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작품일 수도 있고, 어떤 특정 시험의 합격일 수도 있고, 멋진 건물을 짓거나, 한 나라의 정치 제도를 만드는 것일 수도 있다. 이번에 내가 하려는 것은 그저 소소한 한 인간의 바람이고 작은 성취에 불과할 수 있으나, 현재의 나에게는 중요한 것이고 사는 의미이며 어쩌면 이날에 있어서는 인생의 전부이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나의 역량을 모으고, 나의 나태한 본성을 거역하며, 나의 작은 근육들을 단련하고, 나의 갈 길 몰라하는 정신을 바로 잡아, 오로지 한 가지, 이 긴 거리를 내가 원하는 방식과 원하는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것이다. 무질서를 질서로, 무형을 유형으로, 존재하지 않던 것을 존재로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서 말한 그 많은 과정을 밟아 왔고, 훈련을 해 온 것이다. 오직 이 한 번의 러닝을 위해.


시작부터 거창하다고? 내가 하겠다는 것은 무려 풀코스 마라톤 42.195킬로미터를 다치지 않고 중간에 걷지도 않고 다리에 쥐도 나지 않고 불필요한 지체 없이 완주하는 것이 아닌가. 현재 나의 상태로는 목숨을 거는 느낌의 비장함을 빼놓고 말할 수 없는, 충분히 거창해야 마땅한 일이다.


드디어 실전의 날. 4시 반에 일어나 아내를 깨우고 스트레칭을 시작한다. 어제 느꼈던 허리의 묵직함 또는 뻑뻑함은 좀 나아졌다. 대회날 아침 항상 그랬듯 약간의 긴장감 속에 샤워를 하고 아내가 만들어 준 토스트 2개를 잼에 발라 먹었다. 과식도 안 되고 너무 안 먹어도 안 된다. 집을 나서기 전에 화장실에서 큰 일을 마무리해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다. 딱히 시원하다 할 수는 없지만 마무리하고 어제 준비해 둔 싱글렛과 반바지를 입고 테이핑을 한다. 왼쪽 무릎에 4조각, 등과 허리에 3조각, 발바닥에도 한 조각씩. 음악도 없이 헤어밴드도 없이 뛰기로 하고 필요한 에너지젤과 마그네슘 그리고 식염포도당까지 챙기고, 카본화와 반장갑까지 백에 넣어 경기장으로 향했다. 항상 그렇지만 일찍 일어나도 예정 시간보다 항상 늦다.

환승역인 대림역에서 또 한 번의 배변에 성공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합정역에서 갈아타려는데 월드컵경기장을 향하는 인파가 장난이 아니다. 지하철을 두 번이나 그냥 보내고 꾹꾹 눌려서 간신히 지하철 탑승.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걸어가기로 한다. 거기서도 화장실. 대변 줄에서 몇 분을 소모하고 후다닥 소변을 보고 나오니 늦었다. 경기장 도착 전 부랴부랴 달리는 모드로 옷을 정비하고 카본화를 신었다. 아내에게 모든 짐을 맡기고 손에 에너지젤을 쥐고 뛰기 시작했다. 비닐 우비가 부스럭부스럭 시끄럽다. 월드컵 경기장에 도착하니, 아, 인파가 또 장난이 아니다.


나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 선수가 뛰었다는 그 거리와 똑같은 거리를 무사히 뛰려고 새벽부터 일어나 수많은 인파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일단 출발 지점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물어물어 내가 출발할 F조 위치를 찾았다. 8시에 엘리트 선수가 첫출발을 하니 F조는 한참 후에 출발. 분위기 파악을 했으니 적당히 스트레칭하며 출발을 기다린다. 하, 정말 사람 많다.

7시 반쯤부터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런저런 행사를 하고 F조가 출발하려면 8시 반은 되어야 할 것 같았다. 초반부터 사회자의 말을 듣고 우비를 벗고 있었더니 추위가 몸을 감돈다. 괜히 일찍 벗었다.

8시부터 엘리트, A조 순서로 출발하는데, 소변이 마렵기 시작한다. 뛰다 보면 땀으로 나가겠지. 하지만, 이미 소변이 된 수분은 땀으로 나가지 않을 걸 안다. 또 추위를 생각하면 땀이 날 것 같지도 않다. 고민..

B, C, D조가 한 7,8분 단위로 출발하는데 소변이 심해진다. 그러다 문득 배정받은 조보다 먼저 출발하면 실격이지만, 늦는 건 상관없다는 안내문이 떠올라, 과감히 무리를 이탈해 횡단보도를 건넜다. 화장실을 가기로. 그러나 가까운 화장실은 여전히 10여 미터 줄이 서 있다. 어떤 여자분이 저 멀리 간이화장실을 알려줘서 부리나케 뛰었다. 몸에 열이 났다. 5개월을 기다렸는데 출발도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므로 속도를 냈다. 다행히 줄이 없어 문제를 해결하고 또다시 전력질주.

도착하니 마지막 그룹인 G조가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웜업이 제대로 된 상태에서 그룹의 중간쯤 출발을 위해 섰다. 대소변 뭐 하나 아무리 짜내도 나올 것 같지 않은 아주 상쾌한 상태가 되었다. 와우, 이제 출발이다.

화장실 다녀오며 느낀 심박의 쿵쾅거림이 남은 상태로 약간은 흥분하여 출발점을 지났다. 가민 시계를 꾹 누르고 드디어 대망의 풀코스를 시작한 것이다.


시작부터 오퍼페이스를 조심하라고들 했지만 풀코스 G조는 오버페이스가 아예 불가능했다. 적어도 내가 뛰는 위치에서 사방 1미터 이내에는 사람들이 뛰고 있었다. 속도를 내려면 틈새를 이용해 추월을 해야 했는데 그래봤자 앞을 또 가로막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있으니 몇 번 하다 그냥 현실을 받아들이고 같이 뛰는 걸 택하는 편이 나았다. 대략 5분 20초에서 5분 30초 페이스. 전반에 힘을 아껴 후반에 퍼지지 않는 게 더 중요했다.

상암을 출발해 여의도를 향하면서 일부 내리막도 나왔는데 그 부분은 공간이 좀 나왔다. 기회 될 때마다 4분대 페이스도 내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추월했다. 그러다 또 병목.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지만 그럭저럭 레이싱을 할 수 있었다.

양화대교 근방에서 지독한 병목구간은 아예 거의 걸을 정도까지 되었다. 그래도 뭐, 첫 풀코스 아닌가. 유튜브로 봐서 예상했던 구간이기도 하고. 기쁜 마음으로 구간을 지났다.


그럭저럭 여의도. 이제 공간이 훨씬 더 여유로웠다. 속도를 냈다. 5킬로미터마다 있는 음료대는 적당히 목만 축이고, 스펀지는 덥지도 않았으므로 그냥 지나쳤다. 응원 인파도 많았고 거리가 온통 축제 분위기다. 거의 10킬로미터에 다 돼 가는데 전혀 힘이 들지 않았다. 어김없이 ‘대회뽕’이 온 것. 하늘은 맑고 공기는 상쾌하고 나는 서울 한 복판을 뛰고 있다. 신난다. 이거 참 잘 신청했다.


마포대교를 넘어가면서는 더욱 속도를 냈다. 이제 대열의 맨 왼쪽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면서 사람들을 추월하는데 더 집중했다. 내가 추월한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될까? 100명? 1000명? A조로 출발한 사람들은 좀 한가로운 거리를 뛰었을까? 어쨌든 이제 10킬로미터를 넘어 본격적인 레이스에 들어가야 할 시점이 왔다.

미리 조정해 놓은 가민의 누적 페이스를 보니 5분 20초 전후로 레이스를 펼쳐 온 것 같았다. 이걸 5분 페이스까지 따라잡으려면 4분대는 계속해서 뛰어 줘야 했다. 힘을 더 냈다. 그러나 오버페이스는 하지 않도록 조심해서 뛰었다. 4분대를 유지하되 무리는 하지 않는다. 이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주변의 응원을 들으면 힘이 나지만 흥분하여 오버할 가능성이 많았기 때문. 꾹꾹 누르고 눌러 나의 페이스를 유지해야 했다.


공덕 무렵에서 광화문까지 가는 길은 낮은 오르막이 길게 이어져 있었다. 페이스를 획기적으로 줄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마침 차를 몰고 나온 반대편 차선의 운전자들이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 중에는 길 막지 말라며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커다란 장갑을 들고 응원을 하며 하이파이브를 유도하는 사람도 있었다. 축제 같기도 하고 시장바닥 같기도 한 시끌벅적한 분위기에서 나는 어쨌든 사람들과 같이 열심히 뛰어갔다. 누가 내 이름을 부르고 파이팅을 하길래 반가워서 봤더니 모르는 사람. 내 이름표를 보고 응원을 그렇게 해 준 거였다. 묘하게 힘이 났다.

그렇게 꾸역꾸역 달려 광화문 사거리 회사 옆까지 왔다. 슬슬 피로감이 몰려왔다. 15킬로미터 전후. 페이스도 괜찮았고 몸상태도 괜찮았다. 다만 초반 10킬로미터에서 처진 페이스를 회복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계속 생겼다. 대략 5분 10초 이내까지 페이스를 끌어올린 것 같았다. 좀 더 힘을 내 보자.


종로 거리를 가며 다시 한번 몸상태를 체크한다. 이미 7,8킬로미터 지점부터 적당히 에너지젤을 먹었고, 가끔씩 쥐 나는 걸 대비해 마그네슘액도 먹었다. 종종 미리 까서 주머니에 넣어 둔 식염포도당도 먹었다. 수분 섭취도 빠뜨리지 않고. 그래서 그런지 컨디션이 꽤 괜찮았다. 더구나 꾹꾹 누르며 레이싱을 진행해 온 덕에 15킬로미터를 넘어 하프에 가까워졌는데도 별로 힘이 들지 않았다. 하프 대회였다면 이미 여기부터 사점이 시작되어 죽도록 힘들었을 텐데. 어쨌든 갈 만했다. 페이스도 유지할 만했다. 그럼 계속 가는 거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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