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야산다] 시작은 하프다 13

첫 풀코스 - 2025 JTBC 서울 마라톤 (2)

by 악필

하프통과. 하프까지도 초반 쳐진 페이스를 만회하지 못했다. 나는 5분 페이스 안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하프를 지났지만 달리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여전히 오버하지 않으려고 꾹꾹 누르며 페이스를 유지했다. 보통 25킬로미터 지점부터 몸에 신호가 왔었기에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렇다고 보수적으로 뛸 생각도 없었다. 계속 고! 이제 남은 거리가 15킬로미터 정도 남았고 이미 뛴 거리가 아까워서라도 포기하거나 페이스를 지레 낮출 생각이 없었다.


드디어 30킬로미터 지점. 잠실대교에 들어서자 동영상에서 보던 롯데타워가 보였다.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서서 쥐를 풀던 그곳 아닌가. 사람들이 여전히 많았지만 내가 뛰는데 방해가 되거나 페이스에 지장을 받지 않았다. 몸에 피로감이 쌓여 갔지만 페이스를 늦출 정도는 아니었다. 길고 긴 잠실대교를 지나는데, 요 마라톤 참 매력적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누구 하나 허투루 장난 삼아 달리는 사람이 없었다. 진지했고 몇 개월을 준비한 것을 여기서 원 없이 펼쳐 보이겠다는 각오가, 그 비장하고 치열함이 서린 각오가 보였다. 서로 응원도 해주고. 그렇게 그렇게 아름답기도 하고 치열하기도 한 잠실대교를 지났다.


이제부터 진짜 게임이 시작된다. 32킬로미터 지점. 예상대로 다리가 무거워져 왔지만 포기할 생각은 전혀 안 들었고 오히려 페이스를 유지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나 38킬로미터쯤에서 쥐가 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버페이스는 조심하면서. 사실 이제부터 오버페이스는 하려야 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페이스 유지는 꼭 하자는 생각은 있었다.

점점 사람들의 지친 모습이 나왔다. 걷는 사람도 나오고 다리에 스프레이를 뿌리는 사람도 나왔다. 다행히도 아직까지 난 괜찮았다.


아, 이제 35킬로미터. 죽음으로 가는 미지의 영역에 도달한 느낌이랄까. 내가 한 번도 뛰어 보지 못한 거리에 도달했다. 그래? 그럼 재밌겠다. 다리가 부러지나, 내가 포기하나, 보자. 뛸만했고 당장 쥐가 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솔직히 힘이 들었다. 정신력이 개입되기 시작했다. 여전히 난 38킬로미터 지점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게 어디쯤인지 정확하지 않지만 갑자기 급한 오르막이 나왔다. 유튜브에서 얘기한 그 마의 구간이었다. 페이스가 뚝 떨어졌다. 걷는 사람, 비명을 지르는 사람, 서로 응원하며 뛰는 사람 등등. 그러나 모두 페이스는 엉망이었다. 5분 30초를 훌쩍 넘어가는 게 보였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페이스를 올렸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38킬로미터도 지났다. 다리가 더더욱 무거워지고 잠겼다. 근데 남들이 뛰니 나도 뛰게 되는 상태가 되었다. 에너지젤도 먹고 이온음료도 먹고 다시 힘을 내서 뛰고 또 뛰었다.

이게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 그냥 빨리 완주하고 쉬고 싶어서 뛸 뿐이었다. 사람들이 얼마 안 남았다며 응원을 해주고, 이제는 나도 샤이함을 벗어던지고 소리도 지르고 하이파이브도 했다. 내가 받을 수 있는 어떤 도움도 활용해야 했다.

다른 사람들도 힘들긴 마찬가지. 포기자가 곳곳에서 나왔다. 그러느라 나랑 부딪칠 뻔하기도 하고. 여기서 포기하면 평생 후회한다며 독려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소용없었다. 그 독려는 내가 가로채고 난 또 그 힘으로 뛰었다.


어느새 40킬로미터. 사람들이 잔뜩 도열한 잠실벌을 달리는데, 힘들었지만 기분이 꽤 괜찮았다. 거기다가 고작 2킬로미터 정도만 뛰면 풀코스 완주자라는 어마어마한 업적을 이루게 되는 거 아닌가. 도대체가 여기까지 달려 놓고 포기하는 사람이 있을까? 적어도 그게 내가 되어서는 안 되었다. 35킬로미터에서 40킬로미터까지의 페이스는 예상대로 형편없었다. 목표했던 330은 불가했다. 그러나 그게 딱히 아쉽거나 억울하진 않았다. 첫 출전에다가 40킬로미터를 넘게 뛰는 나는 충분히 힘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름 꾹꾹 눌러왔지만 충분히 힘든 상태. 이게 내가 바라는 최고의 전략이고 관리 포인트였다.


마지막 좌회전 구간. 거길 지나면 피니쉬라인이 보일 거 같았다. 역시 그랬다. 200여 미터 전방에 피니쉬를 표시하는 간판이 보였다. 올림픽 게임의 마지막 종목인 마라톤 대회에 뛰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고 응원의 물결도 컸다.


나는 달렸다. 여기서는 쥐가 나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기어서라도 갈 수 있었다. 시계도 안 보고 오직 피니쉬만 보면서, 많은 사람들을 추월하면서 전력질주를 했다.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다리가 아파도 아픈 줄 모르고 숨이 턱에 차도 죽을 거 같진 않았다. 피니쉬라인을 통과할 때 초주검이 되어야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제발 좀 힘들고 지치게 해 달라는 것 마냥 미친 듯이 달렸다.

나는 또 달렸다. 주변의 응원 인파가 오로지 나만을 응원한다고 착각하며 그 응원을 모두 혼자 독차지하겠다고 마음먹은 듯이 쇼맨쉽도 보여주며 자기애에 빠져 미친 듯이 달렸다.

아, 그 짜릿함이란.


조금만 가면 나는 2개월 반 준비에 소모한 모든 에너지를 보상받고, 그동안의 고민과 번뇌를 다 털어 버리고 아내를 만나 잘난 척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은 이미 승리자가 되어 결승선을 통과했다.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드는데, 아무도 본 사람이 없고 신경도 안 썼겠지만, 나는 그 순간 그냥 우승자였다. 그렇게 웃으며 나는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했다. 세상을 다 얻었고 내 몸은 엔도르핀 중독을 걱정할 만큼 기분이 좋았다.


내가 특히 기분 좋았던 건 이 긴 거리를 내 의지에 의해 준비하고 관리하여 결과물을 완성했다는 성취감 때문이었다. 나는 단연코 말할 수 있다. 마라톤은 관리의 예술이라고. 그리고 나는 이제 확실히 내가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건 내 인생에서 결코 작은 성취라고 할 수 없었다. 살면서 이런 거 한 번쯤 경험해 봐도 되는 거 아닌가.


완주 후 메달을 받고 음료를 받아 마시며 걷는데 다리가 오그라드는 느낌이 들었다. 드디어 내 다리가 참았던 비명을 지르는 듯하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옆 사람에게 전화를 빌려 아내와 통화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열심히 다리를 풀어줬더니 다행히 생각보다 빨리 회복이 되었다.

아내를 만나고 기록부터 확인했다. 3시간 37분 15초. 이 정도면 충분히 훌륭하다. 카톡 친구들의 응원이 고마웠다. 아내에게 무용담을 한참 풀고 나니 저 밑바닥부터 희열감이 쉴 새 없어 올라온다. 그렇게도 나는 기분이 좋았더랬다.


같이 참가했던 친구와 간식을 먹으며 몸을 회복하고 나니 순간 피로감과 추위가 확 몰려왔다. 여전히 뛰고 있는 친구를 기다리지 못하고 우리는 지하철로 귀가. 길고 긴 하루가 지나갔다.


뭔가 한 것은 증거가 확실했으니 의심의 여지가 없고, 나는 그것을 위해 준비했고 목표한 바를 달성했으니 성취감은 근거가 있었다. 인생의 가장 큰 가치는 성취감임을 새삼 느낀 찐한 하루, 아니 찐한 2개월 반을 그렇게 마무리한 셈이다. (악필, 2025.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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