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하는 것부터

우선은 내가 해왔던 것, 잘하는 것부터

by 스타트업 기미상궁

내 첫 직장은 국내 유수의 홍보 대행사로, 직원이 80~90명에 달하는 큰 대행사였다.

체계가 잘 잡혀있고, 기본기를 탄탄히 배울 수 있는 전통 있는 회사였다.

미디어 모니터링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문서 작업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고, 고객사에게 메일을 쓸 때는 어떤 형식으로 써야 하는지, 메일을 쓸 때 수신인은 누가 될 것인지와 같은 기본적인 회사 생활에 대한 것들은 물론이, 제안서 작성하기, 실행 플랜 작성하기, 오프라인 이벤트 기획/운영하기, 보도자료/기획자료 작성하기, TV 뉴스 취재 지원 등, 홍보에 관한 한 A to Z를 빠르게 경험하고 익힐 수 있는 곳이었다.


그 회사의 특징은 3년 차가 되는 대리부터는 아예 클라이언트를 도맡아 책임지는 형태였기 때문에, 고객의 니즈에 맞춰 필요한 프로젝트들을 조합하고 시간을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어려웠던 것은 클라이언트를 하나만 맡는 것이 아니라 3~4개는 맡아야 하기 때문에, 혹시각 클라이언트들의 업무가 겹쳐지면서 너무 바빠지거나, 일처리가 밀리지 않도록 잘 조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짧은 기간 안에 많은 일들을 하고 어려운 일들도 하면서 정말 많이 배웠다는 것은 사회 초년생에게는 정말 필요한 일이었던 것 같다. 한 달에 300시간을 넘게 일할 정도로 야근이나 주말 출근도 많았고, 일하다 스트레스로 쓰러진 적도 있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첫 직장이 그 회사였던 것은 나에게 틀림없는 행운이었다.


이제 다시 스타트업에 입사한 나의 시점으로 돌아가서...

내가 해야 될 일이 여전히 오리무중이었던 그때, 내가 가장 먼저 했던 일은 바로 미디어 모니터링이었다.

이 회사는 어떤 회사인지, 어떤 제품을 팔고 있는지, 어떤 제품을 팔아왔는지 누구도 먼저 알려주지 않았기 때문에 업무도 하면서 회사와 제품에 대해 파악해 나가기로 한 것이다. 가장 먼저 미디어 모니터링을 위한 양식을 만들고, 매일 아침 10시까지 미디어 모니터링을 한 다음 회사의 대표님을 비롯한 주요 인력들에게 메일로 전달했다.


모니터링을 하다 보니, 이 회사가 기존에는 제품디자인을 하던 업체가 아니었으며, UX/UI 디자인과 모션 그래픽 디자인을 주로 해왔던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 아주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아이디어 제품을 기반으로 돈을 꽤나 많이 벌게 되었고, 그 이후 사용자의 니즈에 맞는 디자인 제품, 나아가 IOT 제품으로까지 확장하게 된 회사였다.


회사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하고, 공허한 시간이 좀 줄어들기 시작하자, 조금씩 마음에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더 많은 것들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 외에는 할 일이 아직 없었다.

그래서 나를 이 회사에 추천해 주신 - 현재는 일주일에 두 번만 회사에 출근하시는 - 이사님에게 출근날 어떤 일을 하면 좋을지 알려달라고 말씀드렸다.


"네가 잘하는 것부터 해봐. 원래 해왔던 거"

제가 해왔던 것?


그래 그럼... 그것부터 해야겠구나.


그때부터 바로 마케팅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내가 잘할 수 있는 미디어 홍보와 온라인 홍보 - 첫 직장이었던 홍보대행사에서 미디어 홍보는 기본이었고, 온라인, 특히 소셜미디어 위주의 홍보를 도맡아 했었다. - 를 중심으로 한 마케팅 플랜이었다.


마케팅 플랜을 짜기 위해 항상 을이었던 나는 우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갑에게서 제품에 대한 정보, 마케팅(홍보)의 목적, 예산, 기간을 알아내는 일이었다. 지금 나에게 갑은 누구인가? 그렇다. 바로 날 고용해 준 그분, 우리 회사의 대표님이었다. 대표님에게 지금 준비 중인 제품의 출시일과 대략적인 소요 비용, 마케팅 예산을 확인하기 위해 대표실의 문을 두드렸다.


"대표님, 저희 제품 판매처는 어디고, 출시일은 언제인가요?"

"응? 판매처는 아직 정해진 바는 없는데? 출시는 지금부터 3~4개월 정도 뒤 일 것 같은데, "

"출시 프로모션이나 홍보를 위한 예산도 따로 있으신가요?"

"아니. 아직 그런 건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예산도 그렇고"

"그럼 제가 책정해 볼게요. 연간 예산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계시나요?"

"연간 예산? 그런 것도 정해본 적이 없는데."

"그럼 저희 생산 수량은 어떻게 되죠? 연간 목표 판매 수량 같은 것도 있나요?"

"아니 우선 5만 개 생산 예정이에요. 목표 판매 수량은 잘 모르겠고."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우선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보겠습니다."

"어. 그래, 잘 부탁해요."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딱히 없네?

대행사에서 근무하던 -내가 을이던- 시절에는, 아예 예산과, 기간, 목적을 정확하게 통보받고, 만약 추가로 확인할 정보들이 있다면, 그때그때 바로 물어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면, 바로 답변이 오거나 늦어도 하루 이틀 뒤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갑에 왔는데- 회사 대표님으로부터 아무런 정보도 들을 수가 없다니.

예상밖이다. 갑에 오면 분명 더 정확하고 빠르게 요구 사항이나 필요한 정보들을 파악하고 일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는 생각지 못했다. 그 모든 것들을 정하고, 요구하고, 필요하다고 대표를 설득하는 것까지 나의 일이라고는.


생각했던 정보들을 얻지 못한 그때의 나는 그 상황 그대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플랜을 짜되, 예산이나 기간을 특정하지 않고도 준비할 수 있는 것들을 먼저 준비하기 시작했다.

제품 소개자료, 홈페이지, 소셜미디어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 회사는 디자인회사였기 때문에 고객에게 보이는 소개자료, 홈페이지 등은 정말 남부럽지 않게 결과물을 뽑아낼 수 있었다.-

그렇게 플랜을 짜기 시작하며, 제품에 대해서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아직 시간은 있었고, 나는 자신도 있었다.


플랜을 짜는 데에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았다. 플랜을 대표와 부사장님에게 보여드리고 바로 실행에 옮겨갔다. 인스타그램과 페이스북에 계정은 이미 있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관리하며 디자인이 강점인 회사답게 세련된 이미지들로 매일매일 소통을 시작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What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