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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성민 Feb 28. 2016

잘했든 못했든 포근히 안아주자. 바로 나에게.

사직 그 이후의 이야기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어!”

요즘 입버릇처럼 달고 사는 말이다.

그러자 마법처럼 주위 상황이 바뀌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주위 상황을 보는 나의 관점’이 바뀌었다.

그러니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게 되었다.

그러자 아주 마법처럼,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계속해서 생겨났다.


아직도 직장을 그만두었던 시기의 그 힘든 상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름답게 반짝인다고 믿었던 나 자신이 스스로 너무나 작고 무능하게 느껴졌던 그 때.

내 고유의 색을 가지고 아름답게 반짝이는 별이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가려졌던 그 때.          

나는 너무 두려웠다.

그렇게 잘나지는 않아도 나름대로 내 소신껏 잘 살아왔다 생각했고, 앞으로도 정말 내 소신껏 잘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내 결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힘든 상황이 연속적으로 나에게 터져왔다.

잔뜩 풀죽어서 에너지가 빠진 채 껍데기처럼 출근하고 퇴근했다.

나름대로 나의 색을 밝히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주위 상황에 묻혀 이대로 내 색깔마저 바래져버리면 어떡하나 생각했고 너무 우울했다.

내가 나를 잃어버릴까봐 정말로 두려웠다.

진심으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힘들었던 시기는 내가 내 중심을 잃기 시작하면서 부터였다.

외부의 비난과 함께 나 자신도 나를 비난하기 시작하면서 말이다.

자존감을 잃은 것이다.          

무작정 직장을 그만두고 쉬기 시작하면서 자존감은 더욱 바닥을 쳤다.

내가 무턱대고 저질러버린 일에 대한 죄책감과 나 스스로에 대한 무능감 때문이었다.     


나 스스로가 부끄럽게 느껴지니 집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누구도 만날 수가 없었다. 연락도 할 수가 없었다. 

자연스레 안부를 묻게 되는 상황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당당하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당당할 수가 없었다.

도망가고 싶었다.     


조금 용기를 내서 상담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상담을 하며 나를 조금이라도 내보이게 되면 상대방에게 내가 꿰뚫린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어김없이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저 사람도 너를 비웃고 있을거야.’

상담이 끝나자 나는 거의 울상인 채로 머리가 복잡하게 뒤섞여버렸다.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침대에서 이불을 뒤집어 쓴 채 하염없이 울었다.     


머리는 알고 있었다.

내가 갖는 이 마음이 지금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더 초조했다.

나는 꼭 나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너무나도 두려웠다.

그저 두려웠다고 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그때마저도 나는 나를 비난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남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이직이고 간호사 사회에서 신규가 그만두는 게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너는 왜 아직도 못 헤어 나오고 있는거니? 정신력이 역시 그거밖에 안됐던거야?’     

나 그자체로 완전하다는 말, 그 때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부족함과 결핍 그 자체였기 때문에 도무지 사랑해줄래야 사랑해줄 수가 없는 존재였다.          


그러다 무엇이 계기였을까.

그래,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그저 할 수 있는 게 없어 쉬고 있던 어느 날, 나는 갑자기 나의 내면에게 한없이 측은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항상 나를 다그치는 편이었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나를 다그쳤고, 내가 세운 내 기준에 못 미치면 나를 다그쳤다.

바깥에서도 안에서도 나를 비난하기만 했기 때문에, 내 진심은 참 슬프고 괴롭고 외롭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아이라는 단어가 있다.

나의 내면적인 존재인데, 꼭 아이와 같은 성향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내면아이라고 부른다.

나의 진심, 가장 여린 부분.

돌이켜보면 나의 의식은 나의 내면을 거의 매번 혼냈다.     

“그렇게 하면 안 돼. 잘 좀 해봐. 너는 왜 그 모양이니? 왜 아직도 그것밖에 못해?”     

아. 생각이 이까지 이르게 되자 너무나도 슬퍼졌다.


직장을 다니면서, 그리고 사직한 그 이후.

나 스스로가 너무 부끄러웠던 그 때.

자책과 자괴감이 가득한 그 때.

그 때를 떠올리자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엄마와 자그마한 아이가 함께 시장을 가는 그림.

아이는 아직 다 성장하지 못해서 엄마만큼 빨리 걸을 수 없다. 금방 지치기도 한다.

아이는 칭얼거린다. 아이이기 때문에 엄마에게 논리적으로 설득하거나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기가 어려워보였다. 그저 힘들어 엄마 힘들어 죽겠어 하고 칭얼거렸다.

그러자 엄마는 그리 개의치 않는 듯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아이를 채근했다.

아이는 힘들었지만 조금만 더 참아보자 결심한 듯 더 걷는다.

하지만 이내 다시 지쳐 칭얼거리기 시작한다.

그러자 엄마가 아주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아이를 바라본다.

“저기 쟤를 좀 봐. 너랑 비슷한 또래인데 저렇게 의젓하게 잘 다니고 있잖아. 너는 왜 그렇게 징징거리니? 엄마 힘들게 좀 하지마.”

아이는 힘든 마음을 이해받지 못해 슬퍼보인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

뭔가 너무 아픈 기분이다. 아이의 복잡하고 슬픈 마음이 나에게까지 전해져오는 느낌이다.

엄마가 조금만 더 이해해주면 좋을텐데. 저 어린아이가 엄마를 힘들게 하려고 칭얼거리는 것도 아닐텐데. 엄마는 아이에게 죄책감까지 씌워버렸다.

계속해서 힘든 상황이 반복되자 아이는 울음을 터뜨려버렸다.

시장 한복판에서 막무가내로 떼를 쓰며 엉엉 울고 있다.

복잡한 감정을 모두 터뜨려버리듯 크게 울고 있다.

그렇다면 엄마는 어떨까? 엄마는 곤란하면서 짜증난듯한 표정이다.

아, 너무 매몰차네. 엄마가 좀 달래주지..

그러다 엄마는 아이를 두고 가버린다. 세상에.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을 짓고서 그냥 떠나버렸다.

아이는 계속 울고있는데 비마저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는 그저 서럽게, 계속 울면서 비를 맞고 있다.

너무 가여웠다. 그리고 또 너무 서러웠다.

그건 바로 내가 그 아이를 지켜보는 입장이면서도 그 아이 자신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 이거였다.

이게 내가 여태껏 나에게 저질러온 일이었다.

나는 엄마가 아이에게 하듯 나 스스로에게 힘든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강요했던 것이다. 마음만큼 잘 따라오지 못하는 나를 감싸주기는커녕 나무라며 나의 힘든 부분까지 내면의 나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웠다.

이건 네가 멘탈이 약한 탓이야. 네가 의지가 없는 탓이야. 네가 성의가 없는 탓이야. 하면서 말이다.     

나의 내면이 얼마나 힘들고 외로웠을까. 그렇게 힘들다고 외롭다고 티를 냈었는데, 나는 그 마음을 알아주기는커녕 제대로 하지도 못하면서 징징거리기나 한다고 스스로 몰아세웠다.


아마 다른 사람이 나에게 상담을 요청했더라면 나는 그 사람을 꼬옥 안아줬을 것이다. 나에게 이 이야기를 하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니 많이 괴로웠지 하며 토닥여주었을 것이다. 그런 내가 나에게는 더 날카로운 잣대를 들이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나에게 하는 말이니 상처받지 않을거라며 자신하고 있었을런지도 모른다. 다 나 잘되라고 채찍질하는거니까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았다. 아. 마치 꼭 자식이 잘되라고 하는건데 하며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부모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깨달았다. 

내가 다른 사람을 존중하듯, 나는 나 자신도 진심으로 존중해야 했다.     



그날부터 나는 나를 비난하는 것을 멈췄다.

단점보단 장점을 찾기 시작했고 스스로 그 장점을 뿌듯해하는 시간도 가졌다.

조바심과 초조함이 들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루아침에 사람이 바뀔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한번에 긍정적인 마음을 먹지 못하더라도 그런 나 자신을 비난하지 않았다.

조바심이 들 때 마다 ‘그래 많이 초조하구나. 조바심이 들만도 해. 그렇지만 괜찮아.’하고 나에게 말했다. 그래도 종종 나를 비난하는 소리가 무의식적으로 나올때도 있었다. 그럴땐 ‘나에게 그렇게 이야기하지 말자. 상처줘서 미안해.’하고 이야기했다. 그래도 불안함이 가시지 않을땐 어린아이를 꼬옥 끌어안아주며 나는 언제나 네 편이라고 얘기하는 나를 상상했다.     


정말로 마법같이 하루아침에 모든게 바뀌었던 건 아니었다.

여태까지 해온 게 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바뀔 수 있을까.

다만 아주 천천히 조바심 내지 않고 내가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를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장점이 떠오르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찾아내서 칭찬을 했다.


나는 나를 즐겁게 해주고 싶었고 사랑을 듬뿍 주고 싶었다.

남자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하는 것처럼, 나 자신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다.

사실 그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깨끗하고 정돈된 방에서 살고싶다’는 욕구가 들려오면 방을 깨끗이 정돈했다.

‘맛있는게 먹고싶어. 이왕이면 정갈하고 건강한 음식으로..’하는 생각이 들면 나를 위해 어떤 요리를 할 수 있을지, 혹은 어떤 음식을 사주면 좋을지를 고민했다.

바로 나를 위해서 말이다.          



나 스스로 에너지가 채워지자 조금씩 긍정적인 에너지가 바깥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스스로 여유가 생기자 엄마에게 오늘 립스틱이 잘 어울린다거나 오늘따라 예쁘다거나 하는 가벼운 칭찬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버스를 타면 기사님께 인사하는 여유가 생겼고, 길을 걸으며 두리번거리는 사람을 만나면 도와줄게 있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긍정적인 마음은 공명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긍정과 따뜻함으로 세상을 조금씩 대하자 세상도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자 내가 가진 것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얼마나 풍요로운 상태에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정말 신기한 경험이었다. 한달 전의 나와 지금의 나에게 외부적으로 아주 큰 변화가 생긴 것은 아니다.

나는 로또에 당첨되지도 않았고 거액의 유산을 상속받지도 않았으며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위대한 일을 벌인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보다 훨씬 더 풍요로움을 가득 느끼고 있고, 나 자체로 충만하고 완전하다고 느낀다.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문제로 고민했다면, 스스로를 안아주었으면 좋겠다.

낯간지럽다고 생각하지 말고 스스로를 칭찬하고 아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 이유 없이 그냥 자신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사랑받을 이유는 충분하다.

엄마가 아이를 무조건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가 도움이 된다면 좋겠어요.

어떤 고민이든, 함께 고민해봐요.

소통하고 싶어요 :)


메일 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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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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