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옐로피버들
농장에서 탈출한 후, 나의 다음 행선지는 어이없게 정해졌다. 농장 숙소에서 같은 방을 썼던 일본인 룸메의 한 마디. 나 여기 오기 전에 OO에 살았었는데 진짜 좋았어. 그래? 그럼 우선 거기로 간다.
이때부터 나는 계획을 믿지 않기로 했다. 한국에선 미친 J 인간으로 살던 나지만, 호주에선 오늘 한 끼 식사도 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 될 대로 돼라 해. 그냥 내 직관대로 살련다. 안 되면 또 다른 데 가지 뭐.
우선 도시에 도착하니 숨이 쉬어졌다. 시골에서는 행동반경이 좁아지고 혼자 갈 수 있는 곳이 제한적이다 보니 자연스레 생각의 폭도 실시간으로 협소해지는 게 체감되어서 무서울 정도였다. 여기서는 적어도 내가 원하는 곳에 갈 수 있는 기동력이 생겼다. 자, 이제 집을 찾아보자.
백팩커스에 머무는 3박4일 동안 인스펙션만 열 군데를 돌아다녔다. 호주에서는 집을 렌트하기 전에 우선 집을 둘러보는 인스펙션이라는 절차가 있다. 이때 집주인과 대화도 나누고 집 상태도 체크하며 렌트를 할지 말지 결정하는데, 이 과정에서 만난 변태썰을 소개해볼까 한다. 이런 일들이 워홀러들에게 아주 드문 일은 아닌 것 같지만, 솔직히 도착하자마자 변태들을 이 정도 만나는 게 맞는지 아닌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이 집주인은 아랍인으로, 이혼한 뒤 혼자 딸을 키우며 여자 쉐어생을 찾고 있었다. 집은 해가 들지 않아 별로였다. 근데 내 상담사 이력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며 잠시 차를 한 잔 하자고 하기에 앉아서 얘기를 시작했다. 그냥 궁금해서 혹시 이전에 한국인 쉐어생 받은 적 있는지 물었더니, 그 여자에 대한 썰을 풀기 시작하는데 뭔가 찝찝했다. 그 여자가 29살인데 처녀였다는 둥(대체 어떻게 아는지?), 호주남자랑 만나기 시작하면서 집에 늦게 들어오고 외박하는 날이 많아졌다는 둥, 자기 전여친이 일본인이었는데 보통 아시안걸들은 착하고 예의 바르지 않냐고, 근데 그 여자는 아니었다는 둥 듣기 껄끄러운 이야기를 줄줄 늘어놓았다.
으, 기분은 별로였지만 여기까지는 정말 순한맛이었다.
이 집주인은 호주남자였다. 처음 보자마자 상당히 젠틀하고 친절한 느낌이었다. 집과 방을 둘러보는 것은 금방 끝났는데, 이 사람도 차를 한 잔 권하더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호주인들 수다쟁이라더니 진짜 그러네. 별생각 없이 금방 끝나겠거니 하며 앉았다. 그때 앉지 말았어야 했는데.
자기의 직업 이력에 대해 줄줄 늘어놓다가 나더러 한국에서는 뭘 했냐길래 상담사였다 했더니 갑자기 눈이 번쩍이더라. 그러더니 자기가 실은 Certified sex therapist(공인 성 상담사)로 일하기도 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 뭐, 한국에서 흔하지 않아서 그렇지 성 상담도 상담의 여러 분야 중 하나니까. 그런데 듣다 보니 이야기 흐름이 뭔가 이상하다. 성 상담사로 일하는 동시에 BDSM 관련 사업체(...)도 운영 중이라며, 갑자기 폭주하듯 자신의 성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지나치게 자세히 푼다. 자기 전여친이 일본인이었다며(뻔한 레퍼토리) 묻지도 않은 사적인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점점 속이 울렁거려서 얼른 자리를 뜨고 싶었다. 마지막으로 방을 한 번 더 둘러보고 집을 나서려는데, 갑자기 자기 방도 잠깐 구경하고 가라며 안내를 하더니 정신 차릴 새도 없이 뭔가를 막 보여주기 시작한다. 방 안에는 채찍, 수갑 등을 비롯한 온갖 기구(...)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더니 일본인 전여친과 있었던 가학적 성행위에 대한 이야기들을 떠들어 재낀다. 그사이 그 자식은 나한테 채찍을 쥐어주며 만져보라고 했다. 이거 양가죽으로 만든 건데 엄청 부드러워. 맞아도 안 아프다? 그나저나 내가 중국여자도 만나보고 일본여자도 만나봤는데, 아직 한국여자는 못 만나봤어.
그렇게 장장 한 시간을 넘게 그 집에 붙잡혀 있었다. 사실 그 집을 나서면서 좀 혼란스럽긴 했으나 내가 호주 문화를 잘 몰라서 그런 건가? 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방은 맘에 들었기에 어쩌면 그 집에 들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
근데 하루가 지나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저 변태성욕자 집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싶었다. 그렇다고 백팩커스에 더 머물고 싶지는 않아서 일주일 간 임시로 머물 단기숙소를 구했다. 이미 인스펙션도 다녀온 집이었다. 집주인은 마찬가지로 호주남자였는데 여자친구가 일본인이고(이젠 놀랍지도 않다) 잠깐 일본에 휴가차 가있으며, 집에는 다른 일본여자들도 살고 있기에 안심하고 들어갔다.
근데 웬걸? 인스펙션 때만 해도 멀쩡하던 인간이 입주를 하고 나니 눈빛이 살짝 맛이 가있다. 나더러 남자친구 있냐길래 없다 했더니 노골적으로 추파를 던지기 시작한다. 미친 걸까? 너 여자친구 있다며. 그러다가 말 끝에, 그럼 너 호주에 와서 fucking 할 호주남자 찾고 있는 거야? 너 nice package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텐데. 내 귀를 의심했다. 나이스 패키지가 혹시 성적인 의미가 있나 싶어서 챗지피티한테 물어봤더니 맞댄다. 이때부터 호주인이 쓰는 표현에 이상한 기운이 감지되면 지피티한테 성적인 의미냐고 물어보는 버릇이 생겼다.
아, 이 자식이랑도 말을 섞으면 안 되겠다 싶었다. 다음 날 문자로 자기랑 저녁에 영화 보러 가자고 하는 꼬라지를 보고는 그 자식 인기척이 들리면 방 밖으로 아예 나가지도 않으며 그렇게 일주일을 숨죽이며 살았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