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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ina Aug 13. 2024

호주 도착 2주 만에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내가 너무 낭만적으로만 생각했구나

호주로 떠나기 전 당초 내 계획은 이랬다.


1) 시드니에서 일주일 간 여행한 뒤 지역을 이동해서 딸기농장으로 간다.

2) 딸기농장에서 한 3개월 일한 뒤, 시즌이 끝나면 모은 돈을 들고 시티로 이사 간다.

3) 시티에서 어학원을 다니며 일을 구한다.


'이 정도 되면 2024년은 마무리되겠군. 그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이것이 내 계획의 전부였다.

그리고 이 허술한 계획은 호주에 도착한 지 정확히 2주 만에 완전히 어그러졌다.




보통 호주에서 농장을 가는 이유는 세컨비자를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이미 만 31세의 나이로 호주에 도착한 나로서는 세컨비자를 받을 자격이 안 되기에 굳이 농장에 가서 그 힘든 일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근데도 왜 굳이 찾아갔는가? 그건 내게 어떤 낭만적 환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대학 졸업 후 계속 사무직으로만 일을 하면서, 육체노동과 반복작업에 어떤 환상 비스무리한 것이 있었다. 하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하는 것에 신물이 날 지경이었기에 몸을 쓰며 단순한 일을 반복하는 일이 어쩐지 힐링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한국에서 농담처럼 호주에 가면 딸기를 딸 것이라고 말하고 다녔지만, 사실 그게 실현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는데 이래서 사람이 늘 말조심을 해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어찌저찌 정말로 딸기농장을 찾아 들어가게 됐다.


농장지역으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 어쩐지 마음이 너무 불안했다. 뭔가가 불길했다. 예견된 불행 속으로 기어코 찾아들어가는 기분이랄까. 나는 그런 종류의 직감을 믿는 편이다. 그건 내가 삼십여 년 간 살아오며 몸으로 터득한 빅데이터이니 말이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내 불안은 적중했다.


결론적으로 농장에서는 딱 일주일 머물렀다. 여러 복합적인 요인으로 그곳은 (적어도 나에게는) 지낼 곳이 못되었다. 우선 한 집에 사는 인원이 너무 많았다. 크지도 않은 1층 집에 남녀포함 총 9명이 사는데, 그중 7명이 화장실 하나와 욕실 하나를 공유해야 했다(강조하지만 남녀포함이었다). 심지어 방은 너무 좁아서 내 개인짐을 풀 공간도 되지 않아 매번 캐리어를 들춰야만 했다.


하지만 집의 컨디션보다 더 극악이었던 것은 근무환경이었다. 딸기를 따는 일이 당연히 육체적으로 고될 것이라 왜 예상하지 못했겠는가. 근데 막상 와보니 문제는 딸기를 따는 행위보다는 정신적인 압박감이었다. 매일 딸기를 딴 무게 키로수 대로 순위가 발표되고, 하위권 워커들은 관리자들로부터 압박을 받는다. 법정시급도 챙겨주지 않고 오로지 딸기를 딴 무게만큼만 돈을 받는 구조다. 밭이 워낙 넓으니 관리자들은 늘 소리를 지르고, 딸기 따는 것만으로도 힘든데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눈치를 봐가며 일을 하자니 더 하다가는 내 정신건강이 온전치 않아질 것 같았다.


일한지 3일 차 다리 상태


몸 상태를 보니 한숨만 나왔다. 정신 상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엄마와 통화를 하면 바로 울 것 같아서 전화도 걸지 못했다. 보다 못한 엄마는 제발 거기서 나오면 안 되겠냐고 울먹이셨다. 그래, 몸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금방 아물테지만 더 있다가는 정말 정신적으로 피폐해질 것 같았다. 일이 힘든 만큼 돈이라도 많이 벌면 모르겠는데, 그것도 아니니 더 있을 이유가 없어 보였다. 이때는 침대에 눕기만 해도 눈물이 자동으로 줄줄 흐르는 상태였다. 몸이 힘든 것보다 정신적으로, 내가 이 호주까지 와서 뭐 하고 있는 걸까? 하는 생각에, 모든 것이 부질없고 의미 없는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주일 후 도망치듯 농장을 나왔다. 집 보증금도 손해 보며 나왔지만 나는 그 돈이 조금도 아깝지 않을 정도로 잘한 선택이라고 본다. 이 경험은 딱 일주일이면 충분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렇다고 농장에 찾아간 것을 후회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가서 직접 경험해 봤기에 스스로 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덕분에 호주에서 무슨 일을 해도 그다지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이지만 그곳에서 좋은 인연도 만들었다. 한 침대를 썼던, 나보다 열 살 어린 동생은 나에게 흡사 정신적 지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나이면 내가 한국에서 상담사로 일할 때 내담자로 만났던 아이들과 같은 나이다. 근데 인격의 성숙함은 결코 나이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 친구를 통해 절실히 배웠다.


그렇게 행선지도 모르는 상태로 우선 도망치듯 농장을 나왔다. 자,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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