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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장 고무신

11화 보릿짚 땋기

by 캔디쌤

우사 옆에 커다란 포플러 나무 세 그루가 있었는데 사르락 거리는 무성한 잎은 방 안에서 들으면 비가 오는 듯고 낮에 들으면 매우 시원한 소리를 냈다.


나무 아래 볏짚을 깔고 앉아 할머니는 보릿짚을 땋으시고 우린 손바닥만한 포플러 잎을 머리에 얻고 텃밭에서 고추 따고, 가지도 따면서 한여름 대낮을 그렇게 보냈다.


풀이 우거진 곳에 발랑 드러누운 고양이가 뱀에 물릴까 걱정하시는 할머니의 잔소리와 마지못해 작대기로 풀을 휘저어 고양이를 찾는 우리들...


시골 한 낮은 조용하고 덥고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뱀을 입에 물고 개선장군처럼 당당하게 걸어오는 야옹이를 할머니가 보셔야 했는데 야옹이를 항상 과소평가한 할머니 때문에 우린 여름날 생고생을 자주 했다.



오후가 되면 보릿단을 깔고 앉아 할머니와 본격적인 (보릿짚 일곱 가닥으로) 땋기를 시작했는데 도대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른 채 어른들의 부업에 그저 동참했다.


몇 살부터 시작했는지 몰라도 철이 들었을 땐 우리들은 이미 보릿짚 땋기의 준고수가 되어 있었다.


나중에 우리 작품이 밀짚모자나 밀짚방석, 냄비받침 등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많이 놀랐고 나름 뿌듯했던 기억이 있다.


아저씨들은 수작업으로 새끼 꼬고 가마니를 짰고 아주머니들은 사랑방에 모여 모두 한 움큼씩 갖고 온 보릿짚을 땋으면서 밤새 이야기 꽃을 피웠다.


아이돌이 없던 시절이니 연예인에 대한 관심사는 어른들과 동일했다.


가수 대상을 이미자가 받았고 오동잎을 부른 최헌 아저씨가 잘 생겼니 못생겼니 왈가왈부하는 른들의 대화에 끼어드는 재미도 솔솔했다.


이장 아저씨 바람피운 이야기는 실시간 라이브만큼 흥미로웠다.


동네 친구들만 모이는 곳에서 그 이야기를 재탕삼탕하며 흉을 봤고 이장집 딸 옥인 얼굴이 시뻘개져서 엄마의 원수인 '첩'을 씹어댔고 우린 동조했다.


어른들은 우리를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로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우린 희미하게나마 어른의 세계를 이해하고 있었다.



보리도 모종에 따라 길고 하얀 것과 노랗고 짧은 것 두 종류가 있었는데 우리 집은 통일벼라서 그런지 다른 집보다 못 생겨서 땋아놔도 이쁘지 않았다.


늘 다른 집 것과 비교하며 일종의 열등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무 틀에 5단으로 둘둘 말아 마무리하면 일주에 한번 중개상인이 빨랫비누나 천 원, 이천원의 값을 쳐주고 물건을 사갔다.


모든 게 부족했던 그 시절, 소소한 부업거리론 나름 괜찮으나 시간과 노력에 비하면 턱없는 가격이었음에도 불평하거나 흥정하는 어른은 없었다.


저녁 무렵 오글오글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 모일 때도 여자애들은 묘한 경쟁심 때문에 보릿단을 겨드랑이에 끼고 땋으면서 놀았다.


보릿짚 장수가 올 때까지 하나라도 더 많이 완성하고 싶어서..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도 우린 계속 땋고 또 땋았다.


그냥 재밌었고 돈이 되었고 어른들이 시키지 않아도 저녁 호롱불이 꺼질 때까지 우린 정말 열심히도 부업에 충실했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또 땋고 싶은 생각에 혼자서 피식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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