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소와 언어의 분절적 무한성
'감기'에는 'ㄱ'이 몇 개 있을까? 답은 당연히 두 개 이다. 이는 한국어 화자라면 쉽게 알 수 있는 사실로 '감기'는 'ㄱ'을 포함한 5개의 음소(Phoneme) 혹은 음운 'ㄱ, ㅏ, ㅁ, ㄱ, ㅣ'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음소는 말의 의미를 구별하게 만드는 말소리의 최소 단위로(비 vs 피), 국어 교과서에는 보통 음운으로 소개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음소가 언어를 구성하는 심리적인 최소단위라는 것이다.
음소는 심리적인 최소단위이기 때문에 실제로 조음(articulate)되는 물리적인 소리와 같은 개념이 아니다. 이 글을 연 '감기' 라는 단어를 예로 들어 보자. '감기'의 소리를 국제 음성 기호(IPA)로 적어보면 [Kamgi]로 적을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감/과 /기/의 'ㄱ'이 서로 다른 음성적 소리, 즉 /k/와 /g/로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어의 심리적인 소리와 물리적인 소리는 다르다고 했다. '감기'를 예로 들자면 'ㄱ'은 심리적인 소리인 음소이며 /k/, /g/는 특정한 음운 환경에서 실제로 발음되는 음성적 소리인 '이음'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인간의 언어가 일종의 심리적인 소리를 모은 아이템 목록(색인, index 혹은 inventory)에 기반해 작동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현대 한국어 화자는 'ㄱ'을 비롯한 말소리 아이템들 (음소), 즉 'ㄱ, ㄴ, ㅏ, ㅓ, ㅙ, ㅜ, ㅏ' 등을 활용해 언어 생활을 한다. 이 목록에 없는 말 소리를 한국어로서 활용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일본어 'つ(tsu)'는 한국어 말소리 목록에 없는 소리라 한국어라는 시스템 안에서 작동할 수 없다. 한국인도 당연히 그러한 소리를 낼 수 있지만 그 소리는 한국어의 일부가 아닌 것이다. 즉, 말소리로 취급될 수 있는 목록은 언어마다 정해져 있다.
둘째로 각각의 음소는 여러 형태(물리, 음성적 소리)로 실현된다는 점이다. 앞에서 잠시 소개한 '이음(allophone)' 이라는 것이 그 개념인데, 이는 하나의 음소가 실현되는 여러 형태를 말한다. 'ㄱ'이라는 음소는 /k/(크)와 /g/(그)라는 이음으로 실현된다. 이것은 음소적 환경, 즉 앞 뒤에 어떤 음소가 있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감기'의 두 'ㄱ'은 같은 음운이지만 그 환경, 즉 앞 뒤에 연결된 음소가 달라서 서로 다른 이음으로 실현된다.
말소리의 이런 특징은 인간 언어의 분절적 무한성(discrete inifinity)으로 이어진다. (분절성이란 그 경계가 나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언어의 놀라운 특성 중 하나인데 왜냐하면 이 특성으로 인해 언어는 한정된 수단을 활용하여 무한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런 창의적, 생산적 속성은 데카르트나 다윈을 비롯해 지금의 언어학 이전부터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끈 언어의 특성이다. 혹자는 심지어 자유의지와 언어의 속성을 엮기도 했다.
음소나 음운, 이음에 대한 논의는 뭐라고 할까, 조금 째째해 보이는 인상이 있다. 음소나 이음, 음성적 특성을 하나 하나 따져야 하고 아주 작은 데이터에서 여러 현상을 관찰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개인적으로 느끼기에는 연구는 커녕 해당 분야를 처음 공부할 때 느껴지는 지루함이 큰 장애물이다. 알아야 할 것의 가짓수가 많고 큰 의미 없는 단순 작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째째함(?)을 통해 언어의 보다 큰 속성이나 본질을 살짝이나마 엿볼 수 있다. 부분을 보면 부분만 보일 줄 알았는데, 부분을 통해 전체 틀이 어렴풋이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