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파스타'가 뭐라고?: 어휘 의미론

'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by 정진

'사과' 라는 단어는 /사과/라는 소리, 즉 기호와 빨간 식용 과일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이처럼 언어를 '형식과 의미의 연합'이라고 할 때, 이 정의에서 적어도 절반을 차지하는 '의미'를 눈여겨봐야 함은 당연하다. 여기서 '형식'이란 앞서 설명한 여러 감각 가능한 단위들, 가령 문장이나 음운, 형태소나 단어 등을 말하며 '의미'란 그 형식에 의해 표현되는 내용이다. 물론 과연 의미라는것이 무엇인지, 형식과 지시물이 어떻게 연관되는지 등 간단히 정리하기엔 산적한 문제가 너무나 많지만 언어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언어 의미에 대한 연구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의미론(semantics)이고 다른 하나는 화용론(pragmatics)이다. 의미론은 언어 기호, 앞서 말했듯 특정한 형태소나 단어, 문장 등이 도대체 어떤 의미와 연관되는지 연구하며 논리적 의미현상에 집중한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기호와 그 의미, 그리고 기호에 대한 사람들의 직관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화용론은 큰 골자에서는 의미론과 유사하지만 특정 맥락 안에서 화자가 가지는 의도나 발언의 효과에 주목한다. 즉, 의미론은 형식과 의미의 기본적, 논리적 속성을 파악하고 화용론은 해당하는 언어형식이 실제 맥락에서 '사용되는' 국면에 집중한다.


여기서는 의미 연구의 시작점인 의미론을 간략히 설명한다.


1. 어휘 의미론


의미론이 주목하는 언어 단위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인데 하나는 단어(어휘), 또 하나는 문장이다. 이 중 전자를 '어휘 의미론(Lexical semantics)'이라 부른다. 가장 기본적인 어휘 의미론은 단어의 의미를 실제 세계에서 찾는 방법이며 이를 '지시적 의미론'이라 부른다. 지시적 의미론에 따르면 '수박'이라는 단어, 혹은 소리는 그것이 가리키는 실제 과일을 가리킨다. 반면 단어의 의미란 화자의 마음속에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개념적 의미론'이라고 한다. 지시적 의미론은 보편적 의미현상을 기술할수 있다는 장점을, 개념적 의미론은 개별적 어휘와 사용 상황을 구체적으로 다룬다는 장점을 가진다.



여기서 수학적 개념인 '집합(set)'이 쓰였음에 주목해보자. 집합은 의미론에서 매우 유용한 개념으로 어휘 의미를 분석할 때 자주 쓰인다. 예를들어 '파스타'의 뜻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집합을 활용해 다음 그림과 같은 표현이 가능하다. 여기서 어휘의 의미는 의미장(semantic field)에 의해 표현되었는데 이는 마치 자기장처럼 하나의 단어가 특정 속성들을 포괄하는 영역을 가진다는 아이디어이다.


위 도식에 따르면 '파스타'는 '스파게티', '링귀네'를 포함하는 개별 파스타를 모두 포함하는 집합이며 [+얇음], [+듀럼밀] 등의 의미적 자질(속성)을 기본적으로 공유한다. 물론 두껍거나 짧은 파스타도 있지만 설명을 위해 잠시 보류해 두자. 한편 '우동'도 '파스타'와 많은 자질을 공유하고 있는데 '파스타' 집합에 포함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우동'은 '파스타'가 아니다. 이처럼 집합을 이용하면 어휘의 의미와 그 경계 구별을 포함관계를 통해 명확히 나타낼 수 있다.


만약 '파스타'와 '스파게티'처럼 위계적인 포함관계가 있는 경우 '파스타'를 상위어(hyperonym), '스파게티'를 하위어(hyponym)라고 한다. 이들은 기본적인 개념을 공유하면서도 개념적인 범위가 다르다. 상위어인 '파스타'는 '스파게티'를 포함하고 있지만 하위어인 '스파게티'가 모든 '파스타'를 포함할 수는 없다.


상위어 '파스타'와 하위어 '스파게티'의 포함관계

스파게티 ∈ 파스타
(스파게티는 파스타의 원소이다)


또한 기본적으로 개별 어휘의 의미가 [+음식], [+얇음], [+아시아], [+서양] 등 자질(속성, feature)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도 중요하다. 자질은 의미를 설명함에 있어 매우 유용한 개념이다. 예를 들어 '걷기'와 '달리기'의 애매한 차이를 [+빠름]이라는 자질을 설정해 구별지을 수 있다. 자질은 의미론은 물론 통사론과 음운론에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의미에 기여하는 자질을 따로 '의미 자질(semantic feature)'이라 부른다.


그런데 의미 자질을 이용한 분석은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의미 자질이 편의에 의해 자의적으로 늘어날 수 있다. 자질 설정의 기준이 애매한 것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달리기'를 '걷기'와 구별하기 위해 [+빠름] 이라는 자질을 설정했다. 그런데 만약 충분히 빠르게 걸으면 어떻게 될까? 누군가는 [+빠름]을 가지고 여전히 걷고 있을 수 있다. 그러면 이를 보완하기 위해 [+발이 땅에서 떨어짐]등과 같은 작위적인 자질이 끝없이 등장해야 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개별 사례를 어떻게든 설명하려는 시도일 수는 있으나 이론적 일관성은 매우 떨어진다. 또한 자질 분석이 매우 곤란한 단어들도 많다. 대표적으로 '사랑'과 같은 추상적 명사가 그렇다. 사랑이란게 도대체 뭘까? 사람이 조금만 모여도 '사랑'의 핵심적 자질 목록을 합의하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자질과 집합을 통한 분석은 너무나 유용하다. 다른 형식/기호가 같은 지시물을 가지는 동의어(synonym) 분석에서 예시를 찾을 수 있다. 흔히 '세탁'과 '빨래'는 동의어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같은 자리에서 서로 바꾸어 쓸 수 있어야 할 것 이지만 '자금을 세탁하다'와 같이 '*자금을 빨래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미장 이론을 통하면 '세탁'과 '빨래'는 매우 많은 공유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추상성과 관련한 일부 자질을 공유하지 않는 일종의 유의어 관계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읽으면서 느꼈을 수 있겠지만 어휘 의미론은 다소 통일성이 없어 보이는게 사실이다. 왜냐하면 어휘/단어의 의미는 자의적, 우연적인 측면이 강하며 이때까지 전개된 이론도 어휘 전체를 포괄하기 보다는 특정 현상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짙다. 오히려 더 복잡한 단위인 문장, 담화, 텍스트 등이 체계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더 명확히 파악된다는 점은 꽤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의미와 기호의 관계 자체가 우연적이라는 소쉬르의 관찰을 생각하면 단어의 의미가 미스테리한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만약 의미론을 더 알아보고 싶다면 "국어학개론" (신승용 외 2022, 개정 2판 2쇄)과 "언어: 풀어쓴 언어학 개론 (강범모 2022, 개정 4판)"을 시작하는 자료로 추천한다.



keyword
이전 07화단어의 정체 밝히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