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음소 (Phoneme)
각 언어는 정해진 음소(phoneme)를 통해 작동한다. 음소는 말소리의 심리적 최소단위이며 자음과 모음 (분절음운), 운율 (비분절 음운)으로 이루어진다. 이 중 모음은 단독 발음이 가능하며 조음 중 방해를 받지 않는 소리이고 자음은 그 반대로 단독 발음이 어려우며 조음에 마찰 등 방해를 받는 소리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음소 자체에는 뜻이 없지만 뜻을 구별하는 최소대립쌍(minimal pair)을 구성한다는 사실이다. 다음 예문을 보자.
음소 최소대립쌍
한국어
a. 어제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어.
b. 어제는 하늘에서 피가 내렸어.
c. 어제는 하늘에서 배가 내렸어.
영어
a. No pain, no gain.
b. No gain, no pain.
한국어 예문 a, b, c는 각각 단 하나의 음소만 차이가 있다. 기준이 되는 예문 a '어제는 하늘에서 비가 내렸어'와 비교하면 예문 b의 경우 '비'가 '피'로 바뀌었다. 이 경우 모음 'ㅣ'는 그대로이지만 자음이 'ㅍ'로 바뀌었다. 결과적으로 문장이 심각한 호러나 미스터리 재난영화같은 의미로 바뀌게 된다. 예문 c의 경우 반대로 모음'ㅣ'가 'ㅐ'로 바뀌어서 하늘에서 과일 배, 타는 배, 혹은 신체부위 배가 내려왔다는 동화같은 이야기가 된다.
영어 예문 a, 'No pain, no gain'은 '고통이 없으면 결과도 없다'는 문장이지만 예문 b에서 두 자음 'p'와 'g'의 위치를 바꾸자 '결과가 없으면 고통도 없다'는 의미가 전혀 다른 문장으로 변한다. 이처럼 음소는 그 자체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의미를 구별하는 기준이 되며 이것을 '대립적 기능'을 가진다고 말한다.
자연히 각 언어는 서로 다른 음소 목록을 가진다. 예를 들어 영어에서 명확히 별개의 음소로서 구별되는 'f'와 'p'는 한국어에서 구별되지 않고 모두 자음 'ㅍ'로 나타난다. 그런데 각 언어는 보유한 음소의 종류나 갯수에서만 차이를 보이는게 아니다. 음소를 어떻게 배열할 것인가? 그 방식과 전략도 언어마다 차이를 보인다. 이때 음소를 각 언어가 어떻게 조합하는지 살펴보는 분야를 '음소배열론(Phonotactics)'이라 부른다.
순서를 지켜주세요! 음소 배열론
음소의 배열을 따질 때 가장 주요한 관심은 자음과 모음의 배치이다. 각 언어가 가진 음소 배열은 일종의 제약(restriction)으로 작용해서 만역 어떤 말이 음소 배열을 어길 경우 모국어 화자는 해당 배열이 자신의 모국어가 아니라고 느낀다.
영어를 먼저 살펴보자. 영어의 음소 배열을 다소 단순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V는 모음(vowel)을, C는 자음(Consonant)를 나타내며 콜론(:) 우측에 예시를 적어두었다.
영어 음소배열 형태
V : a
VC : on
VCC : ant
CV : to
CCV : snow
CVC : crab
CVCC : cart
CCVC : could
CCCVC : split
CCCVCCC : sprints
CCCVCCCC : strenght
혹은 다음 조합의 결과
V 앞 : 최대 CCC
V 뒤 : 최대 CCCC
영어 단어 'sprint(전력으로 질주하다)'를 예시로 살펴보자. 'sprint'의 발음을 음성 기호로 나타내면 / sprɪnt /인데, 가운데 모음 /ɪ/ 앞에는 세 개의 자음 /spr/가, 뒤에는 두 개의 모음 /nt/가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이 단어는 CCCVCC의 배열을 가지고 있으며 영어의 음소 배열 규칙을 준수해서 '영어의 소리'로 취급된다. 여기에 위 예시처럼 3인칭 단수 주어 일치를 위한 표지 '-s'가 붙으면 모음 /nt/ 뒤에 '-s'에 해당하는 소리가 결합해 CCCVCCC 구조로 변할 것이다.
한국어와 비교하면 하나의 모음 앞에 자음이 세 개 씩이나 오는 것은 큰 차이이다. 직관적인 예시로 'sprint'를 한국어로 음차할 경우 어떻게 될까? 아마 '스프린트'가 될 것이다. '스프린트' 에서 모음 앞 'spr'에 해당하는 부분에 주목해보자. 영어에서는 하나의 모음 /ɪ/ 앞에 한꺼번에 오던 'spr'의 소리가 각각 다른 모음에 의해 분리되어 CV의 형태가 되었다. 이것은 한국어가 하나의 모음 앞에 3개의 자음이 오는 배열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어의 음소 배열 형태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G는 반모음(glide, 혹은 활음)을 나타내는데, 반모음이란 모음의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단독으로 쓰일 수 없는 중간적 성격의 음소이다. 반모음은 단모음과 합쳐져 이중모음을 이루며 'ㅣ'에 'ㅓ'를 합쳐 '여'를 이루는 식으로 쓰인다.
한국어 음소배열 형태
V : 아, 어, 이
VC : 악, 욱
GV : 야 (ㅣ +ㅏ)
GVC : 약
CV : 자, 카
CVC : 작, 칵, 팝
CGV : 쟈, 캬
CGVC : 갹, 퍙
혹은 CGVC: 모든 조합이 CGVC에서 파생 가능하다.
한국어의 음소 배열을 살펴보면 모음 하나에 두 개 이상의 자음이 허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앞서 예로 들었던 'strike'를 'ㅅㅌㄹㅏ잌' 과 같은 조합이 한국어로서 성립할 수 없다.
그런데 단순히 자음과 모음의 배열 패턴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앞서 말했듯 영어의 경우 하나의 모음 앞에 최대 세 개 까지의 자음이 올 수 있다. 하지만 모든 자음이 이 구조에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scream', 'sprint', 'strike'등이 대표적인 단어인데 이를 잘 살펴보면 모두 다음과 같은 공통점이 발견된다.
CCCV가 허용되는 상황
/s/ + 폐쇄음(stop sound) + 접근음(approximant)
s t r
s c r
s p r
폐쇄음(stop sound)은 흔히 파열음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조음 과정에서 공기의 흐름이 폐쇄되었다 터지는 소리이다. 대표적으로 /p, t, k/가 해당된다. 접근음(approximant)이란 아래턱과 위턱의 조음기관이 서로 근접하긴 하지만 완전히 붙어 장애를 만들지는 않는 소리로 영어에서는 'rug'의 'r' (ɹ), 'less'의 'l' (l)가 대표적이다. 다만 접근음은 그 정의와 범위 등에 다소 이견이 있다. (영어의 다른 접근음으로는 'yes'의 'y'에 해당하며 모음적 성격이 강한 [j]와 'wave'의 'w' 소리인 [w]가 있다)
이 개념을 염두에 두고 예시를 보면 '/s/ + 폐쇄음(stop sound) + 접근음(approximant)' 이라는 일관적 패턴이 관찰된다. 즉, 영어는 CCCV...구조를 허용하긴 하지만 여기에 활용될 수 있는 요소에 제한을 두고 있다.
한국어도 마찬가지이다. 혹시 베트남에서 가장 흔한 성씨가 뭔지 아는가? 바로 Nguyễn이다. 이를 한국어로 간략히 옮겨 적으면 '응우옌' 이 될 것이다. 베트남어에서 아주 자연스러운 이 음소의 조합이 한국어에서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이는 /ng/에 해당하는 자음이 CVC에서 첫 번째 C, 즉 초성에 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거나 아니면 유사한 경우라도 '응석받이' 처럼 VC로 분석되기 때문일 것이다. '응석받이' 혹은 '응암역'을 보면 /ng/소리가 모음 'ㅡ' 뒤에 받침으로 와서 VC구조를 이룬다고 생각할 수 있다. /ng/을 '기차역' 처럼 '/ng/+ㅣ차역' 과 같이 조합하긴 어려워 보인다.
이처럼 각 언어는 각자의 말소리 목록인 음소를 가지고 있으며 이들을 조합하는 고유의 방법인 음소 배열 제약을 가지고 있다. 만약 둘 중 하나라도 준수하지 않으면 어떤 언어의 원어민은 해당하는 말소리를 모국어가 아니라고 인지할 것이다. 음소 배열과 음소의 분포는 언어마다 크게 다르면서도 상당히 보편적인 특성을 가진다. 표면상 언어간의 차이가 커 보이지만 보편성이 없다면 애초에 음소라는 개념이나 음소 배열론이 성립하기 어렵다. 게다가 언어 간에 나타나는 말소리 목록은 상당히 중복되는 모습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