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법은 당신의 머릿속에 산다'
상식적으로 볼 때 단어(word)는 언어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단위이다. 하지만 의외로 단어가 무엇인지 정의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내로라하는 학자들이 설득력 있는 이론을 여럿 내놓았지만 그럴 때 마다 그 정의를 빠져나가는 반례가 나타나버리고 만다. 단어가 언어의 기초적 단위임을 누구나 인정하지만 누구도 그 정체를 정확히 모르는 기묘한 상황인 것이다.
가장 유명한 단어의 정의는 아마 블룸필드(Bloomfield)의 '최소 자립형(a minimun free form)'일 것이다. 보통 언어에서 자립한다는 말은 다른 요소에 의존하여 나타나지 않고 단독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가십시다'에 삽입된 선어말어미 '-시'는 단독으로 사용될 수 없어 의존적이다. 반면 '까마귀'는 다른 요소에 의존하지 않고 단독으로 사용 가능하다. 따라서 '-시'는 단어가 아니고 '까마귀'는 단어가 된다. 예시로 볼 수 있듯 블룸필드의 정의는 꽤 직관적이다.
최소 자립성은 대화와 함께 생각하면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Hockett (1958)에 따르면 단어는 주어진 질문에 완전한 답변으로 사용될 수 있다.아래 예시를 보자.
질문: 어제 누구랑 놀았어?
답변: 철수
예문을 보면 어제 누구랑 놀았냐는 질문에 '철수'는 단독으로 사용될 수 있는 최소 단위이며, 따라서 하나의 단어가 된다. 즉, 철수를 더 쪼개서 '철' 혹은 '수'가 된다면 이는 주어진 질문에 적절한 대답으로 쓰일 수 없다. 이 속성은 흔히 뜻을 가진 최소단위로 정의되는 형태소(morpheme)와 단어가 구별되는 지점 중 하나이다. 예를 들어 앞서 말한 '-시'는 뜻을 가진 최소단위이기 때문에 형태소지만 완전한 대답으로 사용될 수 있는 단어는 아니다. 반면 '철수'를 쪼갠 '철' 과 '수' 는 완전한 대답으로 사용되지 못하여 단어가 아니면서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형태소 또한 아니다.
그런데 최소 자립성에 따른 단어 개념은 충분하지 않다. 최소 자립이라는 조건을 빠져나가는 사례가 생각보다 흔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한국어 조사는 의존적이어서 조사가 결합할 다른 요소가 필요하다. 영어에서는 관사(a/the)가 대표적이다. 이 요소들은 분명 다른 단어와 분리되어 사용되지만 최소 자립성 조건을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한국어 조사나 영어 관사는 단어일까? 단어가 아닐까?
이 애매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또다른 기준이 바로 '분리 가능성(seperability)'이다 (Robins 1964). 이를 따라 간단하게 설명하면 단어란 다른 요소와 분리되며 자리를 바꿀 수 있는 요소이다. 예를 들어 영어의 관사 'the'는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다.
The boy is my brother.
This boy is my brother.
In the room, there is the boy.
In the room, there is a boy.
위 예문에 쓰인 'the'와 'the'자리에 대신 자리를 차지한 다른 단어를 주의깊게 살펴보자. 'The boy'의 'the'는 'boy'와 분리되며 'This boy'와 같은 다른 표현을 허락한다. 'a boy'와 'the boy'의 예시도 마찬가지의 속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분리 가능성 기준을 추가로 도입하면 영어의 관사 문제는 다소 해결된다. 하지만 한국어 조사 문제는 아직 애매하다. 물론 국어 연구를 살펴보면 더 자세하고 명쾌한 대답이 있겠지만 다국어를 한번에 관통하는 간편한 정의를 얻기는 여전히 어렵다.
한편 단어의 정체성을 조금 다르게 접근해서 '어휘소(lexeme)'로 정의할 수도 있다. 어휘소란 화자가 알고 있는 어휘 목록이다. 가령 한국어 화자는 한국어 어휘를 머리에 미리 저장하고 있어야 어휘를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어휘소 '달리다'가 머릿속에 이미 존재하지 않으면 '달리는', '달리면서', '달리기' 등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없다. '어휘소' 라는 말에 있는 '소'는 '원소'의 그것과 같은 의미로 이런 다양한 변이형의 원형으로서 기초적 단위임을 나타낸다. 즉, 화자의 머릿속엔 이런 원형, 사전으로 말하자면 '표제어'가 등록되어 있다고 본다.
사전에 등재된 어휘도 이러한 접근법을 따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말이 단어인지 아닌지 살펴보기 위해 사전을 보면 된다는 생각은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이미 '단어란 무엇인가?'에 대한 어떤 입장이 반영된 결과가 사전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일상적으로는 너무나 간단한 개념도 자세히 살펴보면 난점이 있는 경우가 많다.
단어에 대한 논의가 흥미로운 이유는 상식과 직관의 중요성과 한계를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직관은 어떤 것이 단어이고 단어가 아닌지 알아보는 중요한 기준이다. 한편 직관적으로 아주 간단할 것 같은 단어의 개념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한계가 드러난다. 이런 미묘함이 단어에 대한 정의를 어렵게 한다. 물론 실용적으로는 블룸필드식 정의만 사용해도 문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단어의 개념을 이해하려면 더 입체적인 고려가 필요하다. 이는 비단 단어에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며 이처럼 단순함 속에 복잡함이 나타나는 것은 그 자체로 꽤나 흥미로운 현상이다.
참고문헌
Bloomfield, L. (1933). Language. New York: Holt, Rinehart & Winston.
Hockett, C.F. (1958), A COURSE IN MODERN LINGUISTICS. Language Learning.
Robins, R. H. (1964). General Linguistics: An Introductory Survey. Longmans.
김영석. (2015). 영어 형태론 (2nd ed.). 한국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