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이라는 이름은, 뭔가 잘 입은 후 벗어낸 옷처럼 익숙하고도 아쉽다. 잘 사용한 후, 드디어 쉰이라는 새 옷을 얻어낸 기분이다. 세 자녀들의 사춘기를 잊을 수 없고, 부모님들의 노년도 떼 낼 수 없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 홀로 떠났던 남편의 해외근무도 뺄 수 없다. 10년이라는 중년 초입에서부터 죽을 만큼 힘겨운 터널을 지나는 동안, 나는 놀랍게 성장하고 성숙해졌다. 몸과 마음도, 지성과 감성도...
사십 대 중반에 쌍둥이를 포함한 세 아이들은 모두 중학생이 되었다. 때로는 아이들 덕분에 어깨를 흔들며 혼자만의 기쁨을 누렸고, 자랑하고픈 입술을 지그시 누르며 지인들의 칭찬을 즐기기도 했다. 남편의 승진으로도 아내의 역할을 제법 잘 한 듯, 전업주부의 보람을 좁은 우물 속에서 그렇게 찾아냈다. 좋은 일이라면 무엇이든 뿌듯하고 행복했다. 내가 해 낸 것처럼 아이들과 남편은 그렇게 나의 성적표가 되었다. 앞으로 무슨 일들이 또 벌어질지 예상도 못한 채 말이다.
그래도 나의 마흔이 예쁘기만 하다. 그저 최선을 다 했던 나의 열정과 수고가 기특하다. 계산하지 않고 자녀들을 사랑하고 도왔던 일들은, 지금 생각해도 도저히 다시 할 수 없는 것들이다.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도 아이들을 바르고 멋지게 키워내려, 수많은 책을 읽고 선배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며 잠언을 읽어 주던 그 밤과 순간들은 다시 쌓을 수 없는 열심들이다.
또한 가장 많은 눈물을 흘렸던 때이기도 하다. 훌륭한 부모가 되려 했기에 어렵고 당황한 순간들이 많았다, 성품 좋고 재정을 잘 굴리려는 아내의 역할도 버거웠다. 수많은 순간에 내 행동을 후회하고 정죄했다. 충직하고 착한 며느리의 모습은 너무나 무거워서 내적 갈등이 심했던 시기다. 시댁과 친정의 경계를 공평하게 가르고 싶으면서도, 사회적인 풍조를 거스를 수 없어 인정하며 따랐다. 신혼 초 평등한 부모 섬기기는 포기한 지 오래였다. 바보 같지만 착했던 사십 대의 내가 그래도 사랑스럽다.
나 자신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을 자각하게 된 시기는 둥지를 떠나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만나고 서였다. 티브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특목고 입학을 위해 정보 수집을 했고, 스펙을 쌓도록 전폭적으로 아이들을 도왔었다. 각 반에서 임원을 하고, 전교 임원으로 일하도록 재정과 시간 그리고 정성을 쏟았다. 물론 자녀들의 스펙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리더십을 양성하고 좋은 경험들을 채워주면, 아이들이 사회로 나갔을 때 대우받는 인재들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세상의 일반적인 부모들이 생각하고 실행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사십 대의 열정과 시간 그리고 재정을 쏟아서 자녀들의 대학입시를 도왔다. 언제나 아이들을 학원과 학교로 이동시킬 준비가 되어있는 도로 위의 고3 맘으로도 지냈다. 그러던 세 아이들은 각자의 대학에 입학하고, 각각의 삶을 잘도 살아냈다. 사십 대의 엄마는 세 자녀가 떠나간 빈 둥지를 한 동안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나와 평생을 함께 할 이는 남편임을 그때에야 알게 되었다. 정작 내가 잘 돌봐야 할 사람은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 자신이 늙어가고 있음을 겁낸 것은 바로 사십 대였다. 흰머리가 늘어가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름이 생겨나고 체중이 늘고, 관절에도 변화가 있음을 자각하게 되었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면서 낡고 닳아진다는 느낌에 가끔은 서글픔도 올라왔다. 오십 대가 된 지금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로 여기면서 건강을 위해 나 자신을 챙기고 있지만 말이다.
사십 대의 나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많은 엄마요 아내였다. 그래도 감사하는 것은 나 자신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고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일들을 도모했었다. 책을 읽고, 다양한 강연에 수강자로 참여했다. 문화센터와 인터넷을 통해 좋아하는 예술 활동으로 취미를 계속 계발시켰다. 나 자신에게 조금씩 보상하며 교육을 시켰던 일은 지금도 칭찬하고 싶다.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 합창단 활동을 하면서 나의 강점들을 찾아냈다. 전공을 살려 영어학원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치고, 영어책과 한글책을 꾸준히 읽어냈다.
오십이 된 지금에는 사십 대의 독서와 열정 경험들로 글을 쓰게 되었고, 무엇이든 다시 도전하고 배우게 되는 중년이 되었다. 사십에 조금씩 내게 투자하고 미리 외로움을 견디는 연습을 했던 것은 참 잘 한 일로 꼽고 싶다.
"선생님 나이에 어떻게 그게 가능하지 싶어서 계속 지켜봤는데 결국 '공부'였어요. 몇 년 전부터 선생님은 항상 반걸음 앞서 눈앞에 다가온 미래를 공부하고 계시더라고요" -김미경의 마흔 수업-
오십이 되니 갑작스러운 자유들이 주어지면서 외로움도 덤으로 주어졌다. 사십에 가끔씩 연습했던 것들을 친구로 삼아 이제 이 삶을 익숙하게 하고 있다. 그림, 글쓰기, 영어, 요리...
사십의 혹독한 시기들도 내게 좋은 것들을 주는 선물이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고마운 사람이 한 명 있다. 마흔의 김미경이다. 그 힘든 세월을 꿋꿋하게 버텨준 내가 진심으로 고맙다." -김미경의 마흔 수업-
마흔의 나를 다시 기억하며, 고맙고 기특하게 여기게 해 준 그녀 김미경 작가 또한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