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을 헐떡이며 아침 8시 42분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앞장선 아들은 테니스채 가방을 등에 메고 헤드셋을 귀에 건 채 가볍게 움직인다. 20분에 한 대씩 지나치는 지하철을 타고 해운대 중심에 있는 치과로 향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몸을 천천히 조심히 움직이려 한다. 무엇이든 시간은 좀 더 여유 있게 잡아서 급히 뛰거나 헐떡거리는 모습은 나타내지 않으려 한다. 10년 전, 남편의 슬리퍼를 끌고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빙판길에 미끄러져 대문니를 다친 뒤로는 매번 주의하게 된다. 그 이후 몸 다치는 것은 무엇이든 끔찍하게 느껴진다. 새하얗고 고른 치아를 다 드러내며 활짝 웃는 모습을 최고 장점으로 자부하던 때였다. 피가 나서 흔들리던 치아는 까맣게 멍이 들더니 의사의 말대로 시간이 흐르면서 자연 치료되는 듯했다.
세월이 가면서 피곤한 날이면 왼쪽 앞니가 잿빛을 띄었다. 검진 시 몇 차례 문의를 했지만 신경관이 막혀서 미백치료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코로나 3년간은 마스크가 잘 가려주었다. 남들은 크게 발견하지 못했지만 나 스스로는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다. 단체 사진을 찍을 때면 입을 다물고 미소만 지었다. 셀카를 찍을 때면 입을 자연스럽게 가리거나 측면을 찍어서 대문니를 가렸다. 이 작고 작은 일이 사람들 속에서 활짝 웃는 일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입 안에 좁쌀처럼 거친 느낌이 들어 윗입술을 들어 올려 보았다. 작은 여드름처럼 대문니 잇몸 위에 염증이 차 있었다. 두 번 정도 이런 증상이 나자 겁이 났다. 뭔가 치아 뿌리에 문제가 생겼기에 잇몸 밖으로 나타난 것이다. 치과에 동반한 아들은 스케일링을 하도록 하고 나는 염증을 진료받았다.
먼저, 귀걸이와 목걸이를 빼고 구강 방사선 사진을 찍었다. 진료 의자에 앉아서 의사와 함께 치아사진을 보았다. 28개의 치아는 가운데 신경관 통로까지 다 볼 수 있었다. 엑스레이 사진으로만 미의 기준을 둔다면 고른 치아의 배열일 것 같다. 의사에게 하고 싶은 질문들을 여러 개 물었다.
“이미 대학병원에서는 신경관이 막혀서 신경치료는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그럼 크라운을 씌워서 미백치료를 해도 소용이 없겠네요?”
“염증은 계속 생기면서 더 커질 수도 있어요. 결국은 빼내는 것밖에요.”
“... 최대한 빨리 치료하는 게 나은가요?”
“뿌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빨리 치료하는 게 낫지요. 옆의 대문니도 똑같이 진행될 겁니다.”
“잇몸이 약해서인지 시린 증상을 계속 치료해야 해서요. 치아 때문에 치료와 임플란트를 하려면 보험에 드는 것이 낫겠지요?”
“현재 볼 때 특별히 필요한 치료는 없어요. 잇몸은 노화로 자연스러운 증상입니다.”
“이 나이가 되면 일반적인 증상이라는 거죠?”
“네. 그래도 통증으로 어렵기 전까지는 본인의 치아를 끝까지 사용하세요."
‘노화로 자연스러운 증상’...
마취 후 염증을 짜낸 후 두툼한 거즈로 지혈을 해 놓은 터라 입술은 부풀었고 앙다물어서 비툴게 닫아졌다. 의자에서 일어나기 전 마스크로 입술을 덮어 가렸다.
깔끔하게 스케일링을 끝낸 아들은 카페에서 여유 있게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음료대신 샌드위치를 구매해서 아들에게 건넸다. 1시간 동안 지혈을 위해 저작과 흡입활동은 주의해야 했다. 거즈를 교체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어느 정도 지혈이 된 듯해 거즈를 빼고 화장을 고쳤다. 나오기 전 거울을 보는데 밝은 화장실 조명에 잘 자란 흰머리들이 속속들이 보인다. 염색할 때가 되었다.
50이 되어 자연스럽게 변화되는 현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니 서글픔이 밀려왔다. 테니스를 치러 가는 아들에게 조용히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입술은 앙다문 채 엄습한 슬픔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게 했다. 책을 읽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모든 것이 귀찮게 느껴졌다. 미지근하게 식은 물을 두 모금 마시고 가방을 정리했다. 바깥에 보이는 맑은 햇살에 조금 걸어보자고 밖으로 나왔다.
사거리를 건너고, 해운대 시장을 지나쳤다. 외국인들이 오가는 구남로를 지나 파스텔톤 하늘색 바다가 펼쳐진 해운대 바다로 나왔다.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뒤에 위치한 조선호텔로 들어갔다. 2층 카페에 당당하게 입장해 좋아하는 뜨거운 라테 한 잔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