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크대는 깨끗하고 냉장고에는 생수만 채워졌다. 침대와 화장실 그리고 옷장만 사용할 뿐 거실과 두 개의 방은 책상만 덩그러니 놓여서 냉기가 흐른다. 절약정신이 투철한 그는 잠을 자는 안방에만 보일러를 열어 퇴근 후부터 다음날 출근 전까지만 방을 데운다. 유리창을 열어보거나 서랍을 여는 일도 없이 그렇게 혼자서 두 달을 보냈다. 주말에는 빨래만 챙겨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부산 집으로 왔다.
전셋집이 거래되지 않아 보러 오는 이가 없으니 이사는 늦어질 것 같다. 언제든 이사할 수 있도록 정리정돈을 해놓고 네 군데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다. 집주인은 1년이나 계약기간이 남은 상황에서 배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답답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니 주어진 상황을 잘 사용하며 즐기도록 하자.
아들의 출국일이 다가오자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출국 전 아빠의 숙소에서 세 가족이 함께 했다. 가족을 위해 고생하는 아빠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함께 대화하는 시간들을 갖기 위해서였다.. 저녁이 되면 우리 셋은 근처 산책길을 오르며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요즘 고민들은 무엇인지 그리고 인간관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말없이 그냥 함께 산책로를 걸어도 좋았다. 때로는 맛집을 탐방하는 것도 좋았다. 아들이 출국하자 나는 남편의 거처로 간단한 짐들을 옮겨 아예 눌러앉았다.
하나둘씩 차에 싣고 이동했던 물건들은 제법 집을 집답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식기류 두 세트, 물컵 두 개, 플라스틱 접시류 그리고 냄비와 청소도구였다.두 번째 방문할 때는 사기접시와 양념류, 쌀과 밥솥 그리고 카펫과 빈백, 스팀다리미였다.세 번째 방문하면서는 읽을 책들, 빨래 건조대와 믹서기, 프라이팬과 부엌 양념과 과일도 챙기게 되었다.
더 이상 짐을 들이지 말고, 이 기회에 미니멀 라이프를 잠시라도 누려보자는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와 블로그에서 자꾸만 부러웠던 미니멀을 이곳에서 연습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책장에 가득한 책들과 옷장 가득한 옷들을 부산에 두고, 몇 가지 살림살이들로 잘 살아가는 단출한 삶이 의외로 재미있었다. 달걀 프라이는 조심히 숟가락으로 뒤집고, 압력 밥솥의 밥도 숟가락으로 조심히 퍼낸다. 온갖 접시로 상을 넓게 썼던 것과 달리 각 접시 한 개에 밥과 반찬을 담았다. 큰 원형접시에 샐러드와 과일을 놓아 식사를 차리니 매 끼니 건강하고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국물을 끓여도 한 끼 식사로 끝내고, 남은 국물은 작은 일회 용기에 담아 냉동시킨 후 급할 때 식사에 사용한다. 비치된 냉장고는 용량이 적어서 장을 많이 봐 둘 수 없는 것도 오히려 좋다. 매번 다섯 명의 식사를 준비하던 습관 때문에 커진 손을 줄이는 것도 숙제다
혼자 있으면서 이틀 동안 같은 셔츠를 입었던 남편은 이제 매일 셔츠를 갈아입는다. 전날 가벼운 향수를 뿌려놓은 양복을 입고 남편은 출근한다. 회사 식당에서 아침과 저녁을 먹었던 남편은 집에서 가벼운 식사를 채울 수 있어 좋다고 한다. 그의 출퇴근하는 모습이 아이처럼 즐겁다. 단조롭고 규칙적인 자신의 삶이 만족스럽다 말한다.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면 우리는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뒷산에 오른다. 관광지의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대화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가끔 회사 사람들을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한다.
벚꽃이 핀 호수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따뜻한 차 한 잔에 마주 앉아 각자의 폰을 사용한다. 9시가 되면 함께 뉴스를 듣고, 10시가 넘으면 작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잠이 든다. 내게는 조금 불편한 생활이지만 홀로 고생하던 남편을 잘 돌볼 수 있어 감사된다. 오히려 내게도 안정감이 생기고 신혼의 행복했던 마음들이 올라온다.
중년의 자유로운 시간에 새로운 직장을 알아보고, 뭔가 자기 계발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종종 밀려오기도 한다.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그렇다. 여태 수고한 남편을 잘 돌보고 쉬게 해 줄 수 있는 이 시간을 편히 누리는 것도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중 하나라고 말이다. 남편은 시골에 온 내가 심심하지 않을까 매번 걱정한다. 자동차 키를 넘겨주고 이른 시간 회사 셔틀버스를 사용하는 그가 고맙다. 퇴근 후, 오늘은 어디에 다녀왔냐 물어주는 그가 있어 행복하다.
남편을 위해 내가 애쓰고 있다 생각했다. 남편에게 내가 필요해서 이곳에 있다 생각했는데, 나에게 남편이 필요한 것이었다. 3년 동안 남편의 해외생활은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함께 함을 선택한 우리라서 좋다.
"부부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으면 칼날 폭만큼의 침대에서도 잠잘 수 있지만, 서로 반목하기 시작하면 십 미터나 폭이 넓은 침대로도 너무 좁아진다" -탈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