깻잎을 똑똑 따는 손끝 느낌이 좋다. 엄지손톱과 검지 살을 이용해서 꾹 누르면 기분 좋게 이파리만 가지에서 똑 떨어진다. 바질과 상추 쑥갓도 아래 잎부터 크게 자란 이파리를 하나씩 따낸다. 밭 두 이랑만 돌아다녀도 바구니는 금세 가득 찬다. 바구니를 들고 돌아오는 길에 내려다보이는 까만 손톱에 웃음이 난다. 비누로 여러 차례 힘주어 씻어보아도 며칠간은 손톱 밑이 까만 아낙으로 지내야 한다.
얼마 전, 중요한 일로 정장을 차려입고 구두를 신는 날이었다. 다음날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고구마 줄기와 쌈 야채를 뜯었다가 하루 종일 시시로 손을 씻은 일이 있었다. 매번 장갑을 낄 수도 없다. 장갑을 끼면 제대로 속도감 있게 잎을 따내기 어렵다. 여러 작가와의 만남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사인을 하면서도 카메라 앞에서는 손톱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부끄럽게 가리지는 않았지만, 종종 눈길이 손에 멈췄다. 아무도 내 손을 보는 이 없었지만 혼자서만 손을 활짝 펼치지 못했다. 누군가가 물었다면 작은 소리로 텃밭 농사를 하느라 물든 손이라 말했겠다. 예쁜 보석과 네일아트가 새겨진 손톱이었다면 카메라 앞에서 손을 활짝 펼쳤을까? 어디서든 그냥 있는 모습 그대로 나를 당당하게 보여주자고 마음먹는다. 그래도 다음번에는 약속을 잘 챙겨서 손톱이 물들지 않도록 주의하리라. 내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말과 행동 그리고 몸짓들에 늘 주의하면서도 당당하리라.
4월 봄에 시장에서 들깨 모종 열 개를 사서 텃밭에 심었다. 주변을 보니 들깨는 어디든 잘 자라서, 밭 모서리 경계선에 심는 것이다. 공간을 아껴 잘 활용해 보지 싶어, 나도 따라 고구마밭 옆으로 조금 자라난 깻잎 모종을 열 지어 심었다. 밭의 울타리처럼 보여서 참 잘했다는 뿌듯함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고구마 모종이었다. 성큼성큼 자라난 고구마 순은 잎과 줄기로 밭고랑을 가득 덮었다. 이웃 농부는 우리 밭 고구마 순이 너무나 깨끗하게 잘 자란다고 칭찬했다. 칭찬받은 순은 뿌리를 한없이 옆으로 내서 들깨 나무에 그늘을 만들고 공간을 다 차지하는 것이었다.
여러 차례 고구마 순을 꺾어주고 뿌리를 들어 옮겨주었지만, 깻잎은 제대로 잎을 펼치거나 진한 초록빛으로 손을 내밀지 못했다. 공간과 뿌리를 차지한 고구마 순이 들깨 성장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제는 아담한 나무처럼 성장한 들깨를 뽑아 옮길 수도 없다. 그냥 연한 잎을 따서 깻잎순볶음으로 요리한다. 그리고 제법 손을 펼친 깻잎들은 낱장을 따서 한 장 한 장 간장 양념장을 펼쳐서 깻잎김치를 만들었다. 내년에는 한두 개 식물이라도 특성을 파악한 후 배치해서 일조량과 뿌리내릴 공간을 조절해 주어야겠다.
고구마 줄기에 둘러싸인 깻잎
사람도 자기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혼자 있는 시간은 생각하게 한다. 새로운 사고를 하게 하고 때로는 성찰하게도 한다. 복학을 위해 자취방을 함께 구하던 아들은 적당한 넓이의 방을 간절히 원했다. 누이와 함께 투룸을 구하면서도 기어이 고집한 것은 눕고 움직거릴 수 있는 쉴만한 공간이었다. 결국 두 아이가 합의로 결정한 집은 두 개의 방 크기가 비슷하면서 넓은 다락이 있는 월세방이었다. 공간을 향한 아이들의 추구는 7월 무더위와 여러 집을 둘러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강했다.
세 아이를 키우고 이사하면서도 매번 고수하는 공간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만의 공간이다. 책상을 좋아하는 나는 앉은뱅이책상이나 빈백이라도 엄마만의 쉴 자리를 매번 챙겼다. 지금은 대학생과 직장인이 되어 부부만 남은 집에서 나만의 공간을 여러 곳에 만들어 놓고 누린다. 두 개 테이블을 붙여 놓은 식탁, 책장 옆 동그란 테이블, 아이들 방에 책상 그리고 테라스에 놓은 부부 테이블까지도 나만의 공간으로 만들어 사용한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식사하는 테이블에서 글을 쓴다는 작가들을 만나면, 혼자서 미안한 마음이 올라오기도 한다. 그녀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만의 멋진 공간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내년에는 넝쿨 식물 옆은 주의해서 모종을 심고 키 큰 식물들은 끼리끼리 모아서 자리 정돈을 미리 생각해 볼 수 있겠다. 특히 들깨는 텃밭 통로와 주변에 방해하지 않은 식물 옆으로 자리를 잘 잡아주는 것으로! 여름날, 비빔면과 삼겹살 구이에 빠뜨리면 안 될 소중한 깻잎을 꼭 사수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