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뜨거운 한 여름에도 잘 버텨내는 상추 새싹이 기특하다. 잎은 푸르고 단단해 보인다. 아침 햇살에 빛나는 여린 줄기가 멋지다. 농부인 내가 할 일은 더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기 전에 흠뻑 물을 주는 것뿐이다. 오늘 하루도 뜨거운 햇빛을 잘 버텨내길 응원한다.
바로 옆 고랑에는 오이가 할 일을 다 하고 마지막 오이들을 매달고 있다. 손바닥만 하던 잎들은 다 시들어 떨어뜨리고 끝물인 작은 오이들을 시들어진 가지에 여러 개 매달고 있다. 오이 지지대 아래는 며칠 전 새로 심은 오이 모종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고 있다. 두 개의 잎 사이에는 작은 새싹들이 출격을 준비 중이다.
4월 마지막 주에 오이 모종을 심었던 때를 기억한다. 딱 요만한 녀석들이었다. 3개월이라는 시간은 오이 모종이 자라고 꽃 피고 열매 맺을 수 있는 시간인가 보다. 3개월간 작고 귀엽던 오이 모종은 지지대를 타고 오르더니 샛노란 별 모양 꽃을 피워 냈다. 빨랫줄처럼 유연한 줄기를 어디든 척척 얹을 수 있는 것은 가는 넝쿨손 때문이다. 다섯 개의 오이 모종을 위해 쇠로 된 지지대를 세워, 오이 줄기가 타고 자랄 수 있도록 줄을 연결해 주었다. 오이 가지들은 줄을 타고 손을 뻗으며 열매를 주렁주렁 맺었다.
4월, 모종을 심고...
노란 꽃 아래로 손가락만 한 초록 오이들이 자라났다. 물을 좋아하는 녀석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기가 달라져, 여행이라도 다녀오면 깜짝 놀랄 정도로 성장했다. 손끝에서 팔꿈치까지 닿을 길이로 기다랗게 자란 오이를 조심스럽게 비틀어 따냈다. 높이 하늘로 치켜들면 장수의 칼이라도 되는 것처럼 날렵하고 곧게 자라, 장난 삼아 공중으로 들어 올려 휘둘러 보았다.
여름 내내 수확한 오이는 서른 개가 훨씬 넘는다. 매일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내 샐러드와 반찬으로 사용했다. 특히 남편이 등산하는 날이면 큰 것으로 두 개를 골라서 껍질을 깎고, 손가락 크기만큼 잘라서 동료들과 나눠 먹도록 배낭에 담아주었다. 산에서는 오이가 최고로 인기 좋은 좋은 음식이라며 남편은 아이처럼 좋아한다.
넓은 감자 칼로 오이를 얇게 벗겨서 샐러드에 말아 올리거나 샌드위치에 얹어 먹으면 시원하고도 아삭거린다. 껍질째 씻어서 용기에 잘라 놓으면, 언제든 저열량 음식으로 과일처럼 집어 먹을 수 있다. 반달 모양으로 오이를 썰어 상추와 함께 간장과 고춧가루 양념으로 묵을 요리할 때면 꼭 챙겨 넣는다. 또 오이는 고추와 함께 쌈장에 찍어 먹으면 밥만 있어도 맛있게 식사할 수 있는 한 끼 반찬이 된다.
텃밭에 놀러 온 지인은 가지에 달린 오이를 바로 따서 먹으며 행복해했다. 여리고 부드러운 오이를 옷에 쓱 문지른 후, 절반으로 쪼개어 나눠먹으니 그 어떤 과일보다 맛있다. 여름 오이는 수분을 보충해 주는 하늘의 선물이다.
텃밭에서 태양에 그을린 얼굴에는 얇게 썬 오이를 붙이고서 열을 식힐 수 있다. 같은 재료로도 멋지게 사용하는 이들을 따라서 오이 요리와 쓰임을 더 살펴봐야겠다.
제일 처음 텃밭에서 맺은 오이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어 식사를 초대해 준 지인에게 전달했다. 여러 채소를 가지런히 비닐 포장하고, 기다랗고 푸른 오이를 봉투에 함께 넣었다. 채소 종합세트를 선물로 받은 지인의 표정은 그야말로 친정어머니께 받은 사랑처럼 감격해했다. 그것도 처음으로 딴 오이라는 사실에 고맙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첫 열매라는 의미가 제법 큰 것 같다.
결혼 후 처음으로 얻은 큰아이의 존재는 서툰 부모에게 무엇이든 신기하고 새롭다. 남편은 아직도 큰 딸의 첫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간호사가 안아서 투명유리로 보여 준 아기는, 혀를 날름거리며 꼼지락거렸다며 남편은 영화처럼 얘기한다. 장남과 장녀의 존재가 아직도 귀히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첫 열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곧고 예쁜 열매가 아닌 굽고 작은 오이를 맺는 오이 나무를 보니, 이제는 거둬낼 때가 된 것 같다. 지지대 아래에 심은 오이 모종이 가지를 위로 뻗으면, 할 일을 다 한 시든 가지들은 뽑아낼 예정이다. 건너편 이랑에 옥수수를 수확한 후 말라가는 옥수수나무도 뽑아야겠다. 새로운 공간이 생기면 그곳에 가을 작물을 심으려 한다. 배추와 무 모종을 심어야겠다.
세상 모든 것들은 할 일을 다 마치면서 끝맺음을 한다. 식물은 꽃과 열매로 심은 이들을 이롭게 하고 마무리한다. 사람은 태어나 배우고 관계를 맺으며 사회 속에 살아간다.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 있는 일들을 추구하며, 주변과 가족들을 이롭게 하고 그 삶을 마친다. 주어진 삶을 마치는 날, 할 일을 다 하고 마음 편히 내가 딛고 있는 땅에서 뽑혔으면 좋겠다. 주렁주렁 열매를 맺어 모두 다 주고 떠나는 오이 나무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