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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세 줄 일기

그래, 살 만한 곳이었어

세줄일기 16

by Jina가다


옷수선집 어렵게 찾았다.

배송받은 양복바지 기장을 줄여, 남편 서울 출장길에 입히고 싶었다.


집 근처에서 못 찾고, 시내 나가는 길에 옷을 들고 갔다.

시내까지 운전해서 30분이다.

병원, 우체국 일 마치고 검색한 옷수선 가게로 향했다.

골목에 어렵게 주차하고 가게 문을 열었다.

손님 와도 주인은 돌아보지 않는다.


"사장님, 바지 기장 줄이려는데요. 혹시 지금 가능할까요?

제가 멀리서 왔어요. 가게 찾기 너무 힘드네요."


"지금 일이 많아요. 바쁜 시간이고요. 거기 두고 전화번호 적어둬요."


"그럼 얼마나 걸려요? 근처에서 두 시간은 기다릴 수 있는데요. "


"오늘돼요. 손으로 뜰까요, 그냥 박을까요?"


"손으로 떠 주세요. 그럼 내일 점심때 찾으러 올게요."​



문 닫고 나오는데 서글프다.

오전부터 느꼈던 불편함이 계속 모아진 탓이다.


집 앞 세탁소는 간헐적으로 문 열어, 들고 간 세탁물이 그대로 자동차에 있다.

나처럼 세탁소 앞에서 멍하니 안내문을 읽는 젊은 남자를 보았다.


저녁시간 작은 카페에 앉아 있으면 주인에게 미안해진다.

손님 없으면 폐점시간 상관없이 문 닫는 곳 있다.


새벽 배송은 꿈도 안 꾼다.

로켓배송 주문인데도 이틀, 사흘 걸린다.


수선 가게 아주머니의 배포 가득한 말로, 작은 절망들은 더 큰 눈덩이가 되어버렸다.

기운 빠져 집에 갈 수 없었다. 근처 대형 카페로 운전대를 향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반짝반짝 빛나고, 실내 연못에는 시원한 소리 내며 물이 흘렀다.

한가한 오후 네시,

아무도 없는 공간 구석, 작은 전등 아래 앉았다.

통창 밖으로 하얗고 까만 고양이 한 마리가 야외 정원을 누비고 다닌다.

초점 잃었던 두 눈동자는 고양이를 좇느라 바쁘다.

고양이를 사진에 담고, 크리스마스 트리에 매달린 귀여운 인형도 사진 찍었다.

웃는 내 얼굴도 셀카로 남겼다.

물소리와 캐럴만 들리는 공간이 포근해졌다.


들고 온 지인의 호주 여행 에세이를 펼쳤다.

사막에서 활짝 웃으며 높이 점프한 중년 부부 사진이 유쾌하다.

한 챕터를 읽고 있는데, 핸드폰에 모르는 전화번호가 떴다.


"여보세요, 수선집인데요.

혹시 아직 시내예요?

지금 수선하고 있어요. 밤에 잠이 안 올 것 같아서요.

내가 이렇게 마음이 여려요. 언제 오실래요?"


"30분 후에 갈게요. 감사합니다."




경상도에 살게 된 지 8년이다.

처음에는 무뚝뚝하고 날카로운 어투에 놀랜 적 여러 번이다.

지금은 안과 밖이 똑같은 솔직함을 알고, 못 꺼낸 따뜻함도 발견한다.

'겉바속촉'이다.

사장님의 쑥스러움 가득한 전화로 불평은 금세 사그라져 버렸다.



따뜻한 말과 행동은 불편함을 잠재운다.

옷 수선집을 알아놓았으니 이제 그곳으로 가면 되겠다.

저녁에는 대형 카페지.

세탁소는 규칙적으로 여는 곳을 다시 찾아보자.

로켓배송 안 되니, 미리 주문하지 뭐.


마음을 바꾸니 살 만한 곳 된다.

나도 누군가에게 슬픔을 더하는 자 아니길.

이 세상이 살만한 곳으로 여겨지도록 돕는 자이길.



정원을 누비는 멋진 걸음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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